내 첫 해외여행은 자그마치 대륙을 건너 유럽에서 시작됐다. 14살의 나는 당시 유행하던 바가지 머리를 하고 촌스러움으로 무장한 채 유럽 10개국을 여행했다. 60여 명의 또래 친구들 그리고 몇몇 선생님들과 함께 한 달을 여행하는 여름 캠프였다. 우리는 중학생들이었으므로 교육적 목표에 근거해 짜인 철저한 시간표를 따라 움직여야 했다. 목적지 도착, 체크, 이동이 반복됐다. 더위에 지쳐 터덜터덜 걷던 친구는 선생님께 등짝을 맞았다. 온종일 뙤약볕 아래 강행군을 하고, 캠프장에서 텐트를 치고, 저녁밥을 만들어 먹는 일정은 고됐다. 여행 3일째 되던 날 밤 같은 조 친구가 말했다. “문정아, 우리 지난 3일 열 번만 더 하면 돼.” 나는 울고 싶었다. 유럽까지 여행을 와서 설거지하게 될 줄 몰랐다. 일정표를 보며 몇 밤이 남았는지 손가락으로 세어 보았다. 그러다가 그날 일정표에 '샹젤리제 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름다운 샹젤리제는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 노래 ‘오 샹젤리제’를 지겹게 불렀던, 기대하던 관광지 중 하나였다. “친구야, 오늘 샹젤리제 거리 왜 안 갔지?” “갔잖아. 네가 비둘기 쫓아다니던 곳” 그 길고 지루한 비둘기 똥 밭이 샹젤리제 거리라는 사실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샹젤리제 거리는 파리에 여전히 있었지만, 내게는 없는 곳이 되었다.
모차르트 생가 앞에서 선생님이 모두에게 '건물에 들어갈 사람 손 드세요'라고 물었고, 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죽었는데 그가 살던 집에 들어가서 뭘 한단 말인가. 나를 본 선생님은 '여기까지 왔는데 모차르트 생가를 안 간다는 게 말이 되니?!'라고 버럭 소리치며 내 등을 떠밀었다(예상했겠지만 내 친구 등짝을 때린 선생님이다). 예상대로, 우리를 맞이할 모차르트는 집에 없었다. 길고 지루했던 오전 일정이 끝나고 한 시간의 짧은 자유시간이 시작됐다. 나는 해방감에 친구 손을 잡고 이름 모를 골목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젤라토도 두 개나 사 먹었다. 왜 하겐다즈 가게가 텅텅 비어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사람들을, 가게들을 구경했다. ‘저 아주머니는 뱃살이 늘어졌는데도 배꼽티를 입었네, 그래,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창밖으로 걸어둔 화분들이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구나.’ 혼자서 테라스 카페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 신기하면서도 외롭지는 않을까 걱정도 하고. 나는 친구와 빽빽한 일정의 한쪽을 빌려 우리 나름의 여행을 했다. 온갖 유명한 관광지를 가도 네이버에서 찾아본 사진들이 훨씬 예뻤기 때문에 단순한 나는 흥미를 잃었다. 마그넷과 열쇠고리를 파는 호객꾼들도 무서웠다. 반대로 관광지를 벗어난 골목에서는 외국인 관광객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의 일상이 흘러갔다. 나는 그저 조용히 사람들의 일상을 보고 싶었다. 크든 작든 시내 곳곳에 뻗쳐있는 골목은 내가 내 속도와 방식대로 이 낯선 공간과 사람들, 그리고 문화를 감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이후 나는 여행을 할 때 관광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골목으로 들어갈수록 그곳이 삶의 일부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낯선 방문자가 궁금하고 반가운 사람들은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길이라도 물어보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나와 함께 걸어주었다. 태국의 카오산 로드 옆 동네에서도, 모로코 마라케시 광장을 벗어난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각각의 골목은 서로 다른 삶의 현장이고 세상이었다. 나는 골목을 거닐며 여행이 풍요로워짐을 느꼈다. 또한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해서 나한테도 만족감을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내 취향을 알아가고 나만의 방식을 만들어갔다. 여행하는 방법은 곧 삶의 방식과도 비슷했다. 사람들의 말에 솔깃해서 일단 따라가지만, 곧 내 방향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과정을 꼭 거치는 경우가 그렇다. 또 주류에 속할 때보다 비주류일 때 마음이 더 편하다거나, 화려하고 강한 것보다 작고 약한 것에 마음이 더 끌리는 것처럼. 그렇게 골목은 현지인들의 삶을 구경할 수 있는 통로였지만, 곧 자신을 알아가는, 나를 향한 길이 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그리고 다시 나에게 가닿기 위해 언제까지나 골목에서 헤맬 것이다. 골목을 누비는 발걸음의 수만큼이나 내 삶의 지경이 넓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