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의 시작
우리나라에 인문학 열풍이 불었던 때가 있었다. 글로벌 경쟁의 당락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인 다양성, 창조성, 독창성이 우리나라에는 결여되었다는 자성이 일어난 시기였다. 근현대 한국 사회는 이공계 중심의 산업 발전을 통해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문학, 역사학, 철학 등의 인문학은 등한시되었다. 현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인문학이, 21세기 글로벌 경쟁의 핵심 요소를 꽃피우는 해답으로 주목받은 것이다. 말하자면 자성에 대한 해답으로 2010년대 초반에 이르러 인문학이 본격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는 애플의 창업자였던 고(故)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인문학을 강조한 시기와 맞물린다.
우리나라의 인문학 열풍은 성공적으로 이어졌을까? 결론적으로 우리나라는 인문학으로 쏠쏠한 재미를 보진 못했다. 당시 신세계 그룹, KB국민은행을 비롯한 많은 대기업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 즉 창의성을 갖춘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채용 프로세스를 개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인문학과 현장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해 이제 취업시장에서 ‘인문학’이라는 단어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업과 개인, 어쩌면 사회 전체가 인문학에 대해 단편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인문학 열풍이 부는 사회 분위기에 맞춰 인문학 강의와 서적을 비롯한 수많은 콘텐츠가 양산되었지만 이것들은 소비자로 하여금 인문학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만을 만족시켰다. 단편적 이해를 넘어선 인문학적 소양에 대한 적극적인 체화까지 이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창의성을 갖춘 인재 또한 등장하기 어려웠고 결국 인문학은 사회에서 활용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치부되었다. 한국 사회에서의 인문학 활용 전략은 실패로 귀결된 셈이다.
이처럼 인문학으로 재미를 보지 못한 근원적인 이유는 인문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인문학에 대한 접근 태도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인문학에 접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현재 우리 주변에서 인문학 콘텐츠와 접촉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언제든지 수강할 수 있는 다양한 인문학 강의와 서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문학 서적이 도처에 널렸다. 시간과 속도가 중요한 현대인에게 이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문학 콘텐츠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어려운 인문고전을 읽으면서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 무궁무진한 것이다.
그러나 쉽고 편하게 접하는 인문학 콘텐츠로는 인문학적 소양을 제대로 함양하기 힘들다. 이 말은 위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물론 개중에는 이해하기 쉽고 내용도 알찬 인문학 콘텐츠도 많다.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려는 지인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해주고 싶은 콘텐츠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콘텐츠들은 말 그대로 인문학 입문에 도움이 될 뿐이다. 인문학을 맛보는 수준에 그칠 뿐 인문학의 풍미를 제대로 발산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인문학적 소양을 제대로 함양하기 위해서는 고전읽기가 필수적이다. 인문고전의 어려운 텍스트 속에서 헤엄치며 얻는 지식과 지혜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길러지는 능력이 바로 인문학적 소양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완독하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도 어려운 인문고전을 읽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될까? 오히려 그것은 시간 낭비가 아닐까? 그리고 인문학 강의 및 도서와 인문고전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결국 하필 왜 고전인가? 이제부터 이러한 의문부호를 하나씩 지워나가자.
인문고전은 정의하기 힘들다. 시간적인 개념과 가치적인 개념이 혼재하기 때문에 “고전은 ~다”라고 정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다. 단지 고전들 간 공통점을 찾을 수는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인문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높은 ‘지밀도(知密度)’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지밀도란 것은 한 권의 책이 내포하는 지식의 밀도를 가리킨다. 고전은 이 지밀도가 일반 서적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으며, 이는 달리 말하면 지식의 압축성이 크다는 것과 같다. 고전 한 권에 들어있는 지식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이러한 고전의 특성은 독자들로 하여금 고전읽기에 고전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고전 한 권을 오래 읽을 시간에 차라리 일반 서적 세 권을 읽는 게 더 경제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는 고전의 지밀도를 고려하지 않은 섣부른 판단이다. 고전만큼 경제적인 텍스트도 없다. 인문학 도서를 포함해 현재 출간되는 수많은 책들은 모두 앞서 고전에서 개시한 지식들의 결합 및 응용이다. 즉 고전은 기하급수적으로 출판되고 있는 근래의 책들이 지닌 지식의 원천인 것이다. 고전 한 권에서 백 권의 책들이 파생되고, 이러한 고전들을 결합하면 천문학적인 수의 책들로 이어진다. 일반 서적 만 권에 맞먹는 독서량이 고전 10권을 읽음으로써 대체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듯 고전 한 권이 지니는 힘은 엄청나다. 달리 표현하자면 고전 10페이지를 읽으면 일반 서적 한 권을 읽는 것과 같다. 고전의 지밀도를 생각하면 당연히 일반 서적을 읽는 것보다 고전을 읽는 게 몇 배나 더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또는 그러므로 고전읽기는 그 어떤 책을 읽는 활동보다 경제적이다.
읽기 힘든 고전을 읽음으로써 우리에게는 사고의 탄력이 붙기 시작한다. 사고의 탄력성은 고전읽기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역량이다. 혹자는 고전에서 얻은 지식은 현실과의 괴리가 크기 때문에 유용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전읽기의 목적은 고전 속의 지식을 암기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오히려 고전읽기의 본래 목적은 한 가지 지식을 도출하기까지의 복잡한 과정을 탐구하는 데 있다. 과거와 달리 현대사회에서의 경쟁력은 머릿속에 암기하고 있는 정보량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미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수많은 지식이 데이터로 변환되어 디지털 세계에 저장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는 편리한 세상에 사는 중이다. 따라서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는 지식을 결합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시된다. 이러한 능력은 탄력적인 사고력을 갖춘 사람에게서 발휘된다. 그리고 사고의 탄력성은 고전읽기를 통해 지식이 도출되는 과정을 탐구함으로써 기를 수 있다. 이는 고전읽기가 현실에서의 응용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고전읽기는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데 적합한 활동이다.
결론적으로 고전을 읽으면 사람이 변한다. 고전을 읽기 전과 후의 사람은 더 이상 같지 않다. 그의 인격과 교양 수준, 특히 인문학적 소양의 함양 수준은 고전읽기를 통해 한층 성숙하고 성장한다. 변화는 고전읽기를 오래할수록 두드러진다.
그러나 고전읽기에 충실했어도 그 성과는 단기적인 기간 내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고전읽기는 자격증 시험이나 외국어 인증 시험 공부처럼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활동이 아니다. 오히려 고전읽기의 성과는 비가시적이다. 그러므로 고전읽기의 효과는 최소한 1년 정도의 시간을 투자할 때 비로소 체감되기 시작한다. 이는 키가 자라는 과정과 같다. 한창 성장기인 어린이들의 키는 분명히 쑥쑥 자라지만 하루, 이틀이라는 단기적인 시간 속에서 체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1년, 2년이 지난 후 과거의 자신과 비교해보면 키가 자란 것이 확연이 느껴진다. 고전읽기도 마찬가지다. 짧은 시간 속에서는 고전읽기를 통한 변화를 느끼기 힘들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고전읽기는 충분히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방향성을 잃어버린 시대다. 현대사회에 혼재하는 다양한 가치관이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비난으로 치닫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문제와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평행선을 달린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말했듯이 인간은 세계 속에서 사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 사는 개인 또한 자신이 영위하는 삶의 방향성을 제대로 설정하기 힘들다.
이러한 실정 속에서 자신만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해주는 나침반에 대한 요구가 절실하다. 그리고 인문학적 소양과 사고의 탄력성을 길러주는 고전읽기는 그 나침반이 될 수 있다. 고전읽기를 통해 스스로의 중심을 잡고 삶의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이제는 고전(古典)으로 고전(苦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