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많은 돈, 수려한 외모, 넓은 집, 좋은 자동차로 남들을 평가하는 사람을 보면 괜스레 미워진다. 내가 그만큼의 돈과 그 정도의 외모, 넓은 집이나 좋은 자동차를 갖고 있지 않아서일까? 그러나 눈에 보이는 요소로 남들을 평가하는 사람에 대한 미움의 원천은 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 즉 가시적(可視的)인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비가시적(非可視的)인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종종 돈보다는 성품이, 외모보다는 마음이, 집이나 자동차보다는 성격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듣고 자란다. 그러나 어른이 될수록 전자도 후자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돈, 외모, 재산도 비가시적인 것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주객전도다. 돈 때문에, 외모 때문에, 재산 때문에 성품과 마음과 성격을 뒷전에 두는 경우가 주변에서 심심찮게 일어난다. 눈살이 찌푸려지면서도 어느 순간 가시적인 것에 마음을 쏟는 내 자신을 발견하면 한없이 비참해진다.
마음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이 왜 중요한데? 우리는 비가시적인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귀가 마르고 닳도록 듣고 자라왔지만 정작 그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설명은 들은 적이 없다. 들은 적이 없으니 납득하기도 어렵다. 사실은 눈에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 어른들의 경쟁자가 되기 때문에, 일부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친 건 아닐까? 어릴 때부터 진리라고 여겼던 명제에 대한 의구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서양철학의 시초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n)은 우리들의 이러한 의구심에 대해 탁월한 설명을 제공한다. 우리는 운이 좋게도 플라톤이 쓴 모든 책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 플라톤은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25편의 철학적 대화편(대화 형식으로 쓴 책)과 소크라테스(Socrates)의 재판 장면을 기술한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집필했는데 다행히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많은 고대 철학자들의 저서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훼손되고 유실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 우리의 의구심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의 여러 저서 중 『국가』라는 책에 주목해야 한다. 『국가』는 플라톤 철학의 전체적인 맥락을 담고 있어 그의 다른 저서들보다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책이기도 하다.
지금 시대 학자들도 그렇겠지만 특히 고대 철학자들은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진리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우주의 보편적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자연의 질료에 주목했다. 가령 탈레스(Thales)는 물을 우주의 본질이라고 여겼고, 이어서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공기를, 또 데모크리토스(Democritos)는 원자를 우주 원리의 기초라고 생각한 식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자연철학자들이 내세운 자연의 질료들이 비본질적이라고 반박했다. 그가 보기에 자연의 질료들은 자연 현상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본질로서의 자격이 부족했다. 본질이라 함은 변하지 않는 성질인 불변성을 갖는 바, 수증기로 변하는 물이나 이리저리 떠도는 공기는 지극히 불완전한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진짜 중요한 본질은 뭘까? 이 물음의 해답을 도출하기 위해 플라톤은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한다. 그는 『국가』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사실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는 견해를 밝힌다. 그 두 부분이란 바로 눈에 보이는 부분, 즉 가시적인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 다시 말해 비가시적인 세계다. 그리고 플라톤은 두 세계를 각각 현상계와 이데아 세계로 명명한다.
현상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세계를 가리킨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여가를 즐기는 그런 일상세계다. 즉 인간이 감각을 통해 여러 경험을 쌓는 세계가 바로 현상계다. 반면 이데아 세계의 실상은 다소 복잡하다. 이데아 세계는 현상계 너머의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추상적인 세계다. 동시에 이데아 세계는 현상계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이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데아(Idea)를 알아야 한다.
이데아(Idea)란 플라톤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개념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데아는 어떤 것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 본질적 원천이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각각 고유의 이데아를 가지고 있다. 책상은 책상의 이데아를, 스마트폰은 스마트폰의 이데아를, 인간은 인간의 이데아를 지닌다는 말이다.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이데아가 책상으로, 스마트폰으로, 인간으로 형상화되어 비로소 현상계에 등장한다. 사물, 자연, 인간을 포함해 현상계를 이루는 모든 물리적인 것은 이데아라는 씨앗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자. 책상이란 사물은 책상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인 책상의 이데아가 있기 때문에 현상계에 구현된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도 스스로의 가장 본질적이고 이상적인 모습인 이데아를 가진다. 인간의 이데아가 육체를 통해 현상계에 구현되면서 내가 존재하게 된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육체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 육체를 생동하게 하고 작동하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이데아다. 이데아가 결여된 육체는 생명이 아닌 송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데아 세계는 이러한 이데아들로 구성된다. 이데아 세계는 감각으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현상계를 초월한 저 어딘가에 위치한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세계라는 말이 곧 현상계보다 덜 중요한 세계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현상계의 존립은 이데아 세계에 의존하고 있기에 이데아 세계가 현상계보다 훨씬 중요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이데아 세계가 반영된 가짜 세계일 뿐, 실상 진짜 세계는 본질과 원천으로 가득한 이데아 세계다. 결과적으로 진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이 찾은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다.
우리는 플라톤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계가 가짜 세계고 감각할 수 없는 이데아 세계가 진짜 세계라면, 가짜 세계에 사는 우리들이 진짜 세계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 중요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플라톤은 우리의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인간의 영혼은 욕구와 용기, 이성이라는 세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간단히 말해 욕구는 돈과 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적인 부분이다. 돈과 이익은 눈에 보이는 가치이기 때문에 가짜 세계인 현상계에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러므로 가짜 세계에 집중하는 욕구는 영혼의 가장 하위 부분에 해당한다. 두 번째로 용기는 승리와 명예를 좇는 성질을 갖는다. 승리와 명예는 돈과 이익에 비하면 확실히 비가시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승리와 명예를 통한 우리의 성취는 현상계 차원에 그친다. 누구를 이기고 이를 통해 내 명예가 고취되는 경험은 현상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용기는 영혼의 두 번째 덕목에 위치한다.
마지막으로 이성은 영혼의 세 부분 중 최상위 덕목이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이다. 이성은 지혜를 사랑하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영혼의 부분으로, 인간은 이를 통해 이데아를 파악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기에 제일 중요한 가치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전체 영혼을 지배하고 통제해야 한다. 우리는 욕구에 휘둘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기 쉽다. 또한 지나친 용기로 인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데아를 파악하는 이성의 능력을 활용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저차원적인 가치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더 중요한 것, 즉 비가시적인 본질적 가치를 성취하는 인간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플라톤이 욕구와 용기를 무조건 배척하고 이성만을 찬양했다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비록 그가 이성을 영혼의 최상위 능력으로 강조했지만 동시에 욕구와 용기의 필요성도 충분히 고려했다. 플라톤은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이성이 영혼의 전체를 지배하되 욕구와 용기를 적절히 이용해 진리를 추구하는 데 활용하는 사람을 제시했다. 우리는 비가시적인 가치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되 가시적인 가치를 무시해서도 안 된다.
비가시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은 예부터 많았지만, 자신만의 철학을 통해 체계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플라톤이 최초일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진리 탐구는 플라톤 이전에도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플라톤만큼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없었다.
플라톤이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양분한 이후, 서양철학 또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에 근간을 두어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을 중요시하는 학파와, 인간이 현상계에서 실제로 느끼는 경험을 중요시하는 학파로 양분된다. 서양철학사는 두 세력 간의 2000년이 넘는 싸움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라톤은 그 싸움의 중심이자 주범인 셈이다. 도대체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가? 무엇이 더 본질적인가? 플라톤 철학이 맞는 것인가 혹은 틀린 것인가? 이 물음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플라톤을 서양철학의 시초로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오죽하면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Whitehead)가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라는 유명한 말까지 남겼을까. 이렇듯 후세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플라톤의 『국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남긴다. 돈, 외모, 재산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좇는 현대사회의 우리들은 왜 허탈함과 허무함을 느끼는가? 플라톤 철학에 따라 사랑, 우정, 지혜, 진리, 본질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행복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플라톤은 기원전 427년,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의 부유한 명문가 자제로 태어난다. 명문가의 자제답게 정계에 입문할 예정이었으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한 아테네에 적국 스파르타가 ‘30인 참주’를 내세워 폭정을 휘두르자 정계에 회의적인 태도를 갖는다. 결국 30인 참주가 축출되고 민주정치가 이루어지는데 이 민주정치 하에서 기원전 399년 스승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사형 당한다. 이 사건으로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을 사형시킨 아테네 정치에 환멸을 느껴 정계 진출의 꿈을 접는다.
이후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에 전념, 수많은 저서를 남기며 서양철학의 시초로 자리 잡는다. 그의 대부분의 저서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대화를 이끄는데, 이는 대화를 통해 진리를 도출하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직접 남긴 저서가 없기 때문에 사실상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구분은 희미하다.
※ 추천도서
플라톤, 『국가』, 도서출판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