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오류

영원의 교환일기 제17편_영에게

by 무늬

영에게…


안녕 영!

그간 잘 지냈어? 어제 나무를 올려다봤는데 겨울눈이 부풀어있더라고. 머지않아 목련도 피고, 산수유도 피고, 개나리도 피겠지? 저만치 보이는 산의 색도 희미하게 연둣빛을 띄고 있어. 이제 곧 봄이 오려나 봐.


지난 일기에서 영이 닉값하려고 '수영'을 배웠다는 걸 보고 피식했어. 그런 이유로 수영을 배웠다니 너무 깜찍한 발상이다. 수영에서 힘 빼기가 중요하듯 삶에서 힘을 빼는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도 자주 느껴. 처음에는 무언가를 잘하고 싶어서 뭐든 꽉꽉 채워 넣으려고 하지. 그런데 어떤 한 일을 오래 지속하다 보면 채워 넣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빼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 같아.


나도 올해 그동안 해오던 것들을 몇 개 내려놓았어. 꽤 오래 해오던 독서모임도 잠깐 쉬기로 했고, 연구모임도 그만뒀어. 비슷한 생각을 비슷한 시기에 하게 된 게 신기하지만 나도 영처럼 올해는 비워내는 한 해로 만들고 싶었거든.

올해 내게는 이사라는 중대한 과제가 놓여있어. 지난주 막 이사를 끝내고 오늘에서야 짐 정리가 대강 끝이 났어. 지금 나는 배송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갈색 가죽 의자에 앉아 짙은 나무 향이 올라오는 새 책상에 노트북을 놓고 영에게 이 글을 쓰고 있지.


영이 나에게 무엇을 버려야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어떤 걸 비우고 싶은지 물어봤었지?

나는 조바심을 버리고 싶어. 덧붙이자면, 내 취향을 완성하고자 하는 조바심 말이야.


올해 많은 것을 비워내겠다고 한 당찬 포부가 무색하게, 나는 지금 새집에 물건을 채워 넣기 바빠. 이 텅 빈 집을 하루빨리 채워 넣어 '나만의 취향'이 담긴 집으로 변신시키고 싶었거든. 물건을 사기 전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SNS로 레퍼런스를 최대한 많이 모으는 일이었어. 내가 원하는 무드의 집을 검색하고, 그 집에 놓여있는 물건을 찾아본 뒤, 그 물건과 비슷한 몇 개의 물건을 꼼꼼히 비교해 가며 물건을 구매했지.


그런데 이사라는 건, 내가 이렇게 찾아봐야 할 물건이 한 두 개가 아니잖아. 냉장고, 소파, 책장, 책상, 작업용 의자, 식탁 의자부터 해서... 앞치마, 슬리퍼, 휴지통, 하다 못해 행주 걸이까지! 이 모든 걸 단번에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 이 아니었어. 더군다나 나는 이 의사결정을 앞으로 내 삶의 동반자가 될 J와 함께 결정해야 했기에 두 배로 더 힘든 일이었지.


소파만해도 온갖 가구거리를 헤매고 다니다 2달 만에 샀어. 그리곤 구매한 소파(영과 만났을 때 내가 말했던 갈색 가죽 소파)를 취소하고 무심코 들어간 쇼룸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앉은 아이보리색 패브릭 소파에 반해 홀린듯이 사버렸지.... (이게 무슨 변덕이람)


모든 물건을 이렇게 한꺼번에 사려고 하다 보니 나중엔 무언가를 구매한다는 행위 자체가 질려버리더라.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선택한 물건들이, 내가 예쁘다고 구매한 물건들이 오롯이 나만의 취향이었을까? SNS의 알고리즘을 통해 끊임없이 노출돼서 예쁘다는 생각이 주입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야.

그 게시물에 찍혀있는 좋아요 수만큼, 댓글의 수만큼 그 취향은 이미 누군가에게 인정받은 취향이고, 나는 다수에게 이미 인정을 받은 취향을 돈 주고 구매하는 거야. 실패할 일이 적으니까.


하지만 결국 취향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시간이야. 그걸 찾기까지 내가 모험한 시간. 열심히 번 돈으로 내가 선택한 물건을 실패한다는 건 꽤나 씁쓸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게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수 있기에 오히려 가치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렇게 나와 맞지 않는 것들을 곁가지 치듯 쳐내면 결국 계속 남아있는 가지가 점점 굵어지고 높이 솟아 나를 이루는 중요한 기둥이 되는 거야. 이렇듯 시간이 축적된 취향은 물건 하나에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보편적인 시각에서 벗어나더라도 충분한 매력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 그래서 난 내 취향을 하루빨리 완성시키고 싶은 이 조바심을 비우고 싶어.


아직도 낯설기만 한 이 방 안에서 가장 내 취향인 물건을 꼽아본다면 그건 내가 플라잉 타이거에서 8년 전에 산 일기장이야.(플라잉 타이거는 알록달록 귀엽고 유쾌한 물건을 주로 파는 잡화점이야.) 이 일기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일단 겉표지의 알록달록한 무늬와 색채감 때문이야. 일기장을 펼치지 않은 않은 상태에서 보았을 때 무늬가 표지와 이어지는 것도 매력적이고. 무엇보다 겉표지가 두껍고 질감이 좋아서 만질 때마다 기분이 좋아. 이렇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이 일기장 덕분에 나는 열심히 하루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어떤 고민들을 거쳐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 남겨놓을 수 있었어.


아직도 사고 싶은 게 너~무나 많지만 이젠 성급하게 사지 않고 천천히 채워보려 해. 길을 걷다 쇼윈도 안쪽에 비친 물건에 우연히 반해서, 골동품 상점을 돌아다니다 문득 내 맘을 설레게 하는 물건을 발견해서 산 진짜 나만의 취향을 내 집에 데려오기 위해서 말이야.


영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아끼는 물건이 뭐야?


그럼 이만 총총.


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