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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에 대한 짧지만 긴 기억

두려운 것을 마주보기

by 월 림

사람마다 한 가지쯤 무서워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 대상이 바로 ‘개’다.

아주 작은 새끼 강아지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개는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개가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은 어린 시절의 어떤 사건 때문이다.

어린 시절...

우리가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 온지 얼마 안 된 시기였을 때니

내가 대여섯살 쯤 되었을 것이다.

문방구 뒷집에 세를 들어 살 때로 기억한다.

우리집에서 돌아나오면 문방구가 있었고

그 문방구 맞은편에 초록대문집이 있었다.

그 당시 흔한 단독 주택이었는데

문이 상당히 낡은 것으로 기억된다.


엄마는 어린 나를 두고 일을 하러 다니셨다.

우리집에서 일분도 채 되지 않은 거리에

이모가 조그마한 슈퍼마켓을 하고 있었는데

지근거리에 믿을만한 사람이 있으니

믿고 그리 다니시지 않았나 싶다.

엄마가 없다고 해서 내가 슬펐거나 주눅이 들진 않았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그 나이또래 아이들은

밥만 먹으면 동네에 우루루 몰려나와

엄마 손 탈 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너댓살만 되어도

근처에 일자리를 찾아 일을 하러 다니는 엄마들이 많았다.


어쨌든 사건이 있던 그 날도

나는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집앞 문방구 근처에서

놀 친구를 찾고 있었다.

문방구 맞은편에 있던 초록 대문집의 대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었으므로

그 집은 당시 동네 아이들이 느끼기에

뭔가 으스스한 유령의 집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독 그 대문은 녹슬고 낡아 있었고

그 집은 늘 우중충하니 그늘이 져 있어서

그림책에 나오는 마녀의 집과 같은 분위기가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나와 노는 아이들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 그 초록 대문집의 대문이

한 뼘이나 되게 열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대문 사이로 뭔가 언뜻

갈색 물체가 어른 거렸다.

아직 무서움이 뭔지 잘 모를 나이였던 나는

호기심에 그 집을 향해 한 발짝 내딛었고

그와 동시에 그 낡은 대문이 열리며

내 키만 한 갈색의 개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마구 짖으며

뛰어 나왔다.

그제서야 두려움에 휩싸인 나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던 이모의 가게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오분이 안 걸려 도착하던 그 곳이

내 키만 한 개한테 쫓기며 뛰어가는 그 상황에서는

세상 어느 곳보다 멀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달려 겨우 이모네 가게 문을 여는 순간

그 개가 내 옷을 물고 늘어진 것 까지가

그 날의 무서웠던 사건의 기억이다.

그 다음 내 기억에 남은 장면은

우리집 방에서 내 입에 청심환 녹인 물을 흘려 넣어주던 엄마의 모습이니

아마도 가게 문을 열고 기절 한 게 아닌가 싶다.

그 날의 그 사건은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이 나이가 되도록 개 공포증을 떠안고 살고 있다.

그러던 내가 요즘은 그 공포증에서 조금 벗어나고 있는 듯 하다.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 내 남편의 고향이

개로 유명한 진도다.

시어머니가 아직 진도에 살고 계시고

당연히 시골집에는 늘 한 두 마리의 진돗개가 살고 있다.

나의 개 공포증을 알고 계시던 시아버지는

내가 시댁에 처음 발을 들이던 그 날부터

내가 도착하기 전에 개 묶어 놓는 일을 도맡아 주셨다.

시골이고 더구나 개로 유명한 고장이니

집개가 웬만큼 사납지 않고서야 풀어놓고 자유롭게 키우는 게 당연한데도

개 공포증 며느리가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 시댁 개는 내가 가는 날이면 자유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서고 닭살이 돋을 만큼

심한 공포증이 있던 나에게

자유를 박탈당하고도 단 한 번도 나를 향해 짖지 않는

시댁의 개 백구가 이제 더 이상은 무섭지 않게 느껴진다.

아마도 작년 명절부터였을 것이다.

마당에서 뭔가 시어머니의 잔심부름을 하던 중에

백구와 나도 모르게 눈이 마주쳐 버렸다.

내 기억 속의 무서운 그 초록 대문집의 개 눈만 기억에 있던 내게

백구의 눈은 한 없이 순하고 인자하게 다가왔다.

결혼하고도 꽤 오랫동안 부러 모른척 고개 돌렸던

그 백구의 눈을 그제야 처음으로 바라본 것이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백구의 머리와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었다.

백구는 순하게 내 손길을 받아주며

눈으로 이제 그만 무서워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백구를 쓰다듬는 것을 본 딸래미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엄마 이제 개 안 무섭냐고 놀리듯 물었다.


그래 적어도 이제 백구는 무섭지 않다.

물론 우리 백구도 집 밖에서 다른 개들과 싸움이 붙으면

사납고 무섭게 달려든다고는 한다.

참으로 듬직하다.

예전에 나에게 달려들었던 그 시커먼 앞집 개도

우리 백구 앞에서는 무서워 꼬리를 내리겠지..

삼십년을 넘게 나를 힘들게 했던 개 공포증은

이렇게 우리 시댁의 진돗개 백구로 인해 싱겁게 치료가 됐다.


두려움은 가끔...

마주할 필요가 있다.

나를 떨게 만들었던 두려움의 원인은 어쩌면

생각보다 별 거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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