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속 알싸한 무 냄새와 마른 풀 냄새와 비 냄새를 다시 맡다.
소나기 속의 소년은 소녀의 죽음을 어떻게 견뎌낼까
이 나이가 되도록 소나기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소녀의 죽음'을 감당해야 할 남겨진 소년이 너무 불쌍해서였을 것이다.
죽음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한다.
그러나 소년은 이제 겨우 열두어살일 뿐이다. 그 소년의 기억속에 각인된 소녀와의 기억은
사는 내내 소년의 마음을 할퀼지도 모른다.
알싸한 무의 맛을 보다가도 향긋한 들풀 향기를 맡다가도
하다못해 여름 장마철이면 주구장창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닥뜨릴 때마다도
소년의 마음은 소녀와의 추억으로 헤집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내 소년이 마음에 걸렸었다.
소년이 제발 그 슬픔을 잘 극복해 내고 소녀와의 기억을 잘 감싸안아
너무 아프지 않은 추억으로 가슴 한 켠에 묻어 두었다가
살면서 어쩌다 한 번씩만 꺼내어 보길 간절히 바랐다.
'헤살'은 황순원 작가의 소설 '소나기'의 뒷 이야기를 쓴 구병모 작가의 단편소설이다.
소녀의 죽음을 맞딱드린 소년이 그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며칠을 앓아 누우면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소년의 부모는 뜻밖의 소년의 병이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한다.
소년의 마음이 무엇때문에 그렇게 무너져 내려 몸으로 나타나는지 소년조차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채 며칠을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소년은 몸살을 앓는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소년은 알싸한 무 냄새와 마른 꽃 냄새와 쏟아져 내리는 비 냄새를 맡는다. 이승을 떠나야 하는 소녀의 보라빛 물이 든 치마자락을 소년은 그렇게나마 붙잡고 있다.
소년이 마주해야 하는 슬픔은 그를 아껴 주던 조부모의 죽음이나 혹은 세상의 수많은 고아들이 감당해내야 하는 부모의 죽음 같은 것과는 결이 다르다. 누구나 슬픔을 인정해줄, 자신의 슬픔과 한을 마음껏 내비쳐도 괜찮을 슬픔이 아닌 것이다.
소년의 슬픔은 오롯이 소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 둘의 추억은 오로지 그 둘 만의 것이었으므로 소년은 혼자서 그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학교로 가보려 해도 소녀의 고운 손이 헤살짓던 개울가에서 소년의 슬픔은 소년의 앞길을 막는다. 너는 아직 괜찮아지지 않았다고, 너는 아직 이 개울을 건너지 못한다고. 너는 아직 소녀의 부재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그러니 어서 가서 더 크게 앓기라도 하라고.
개울가에서 마주한 소녀의 부재는 소년이 마주해야 할 슬픔의 무게를 체감하게 했다. 어쩌면 소년은 소녀의 죽음이 헛소문이길 마음 어느 한 켠에서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개울가에 나가면 아무일 없다는 듯 고 하얀 손을 개울에 넣고 장난하며 내가 며칠 앓아 누웠더니 사람들이 내가 죽었다고 하더라 아무렇지도 않게 깔깔 웃고 있을 거라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소년은 소녀의 환영을 본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소녀 역시 소년이 그러쥔 치맛자락을 차마 빼내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소녀와의 추억을 고운 보라빛 보자기에 싸 매서 슬픔이 너무 많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갈무리 해야 하는 것은 이승에 남은 소년의 몫이었다.
소년은 소녀의 치맛자락을 놓아주기로 한다. 소년은 둘만의 소중한 기억들이 담겨 있는 물건들을 가지고 다시 개울가에 선다. 소년의 눈은 소녀가 앉아 있던 개울가의 징검다리를 가만히 어루만진다. 부연 안개가 서린 저 곳에서 소녀가 어쩌면 웃고 있을것도 같았다. 한 개, 두 개, 징검다리의 돌들을 건너 마침내 소녀가 앉았던 그곳에 다다랐다. 소년은 소녀와의 기억이 스민 것들을 차례차례 개울에 떠내려 보낸다. 소녀를 다시 만나면 주려고 주머니에 넣어 다녔던 다 부스러져 버린 호두 조각들, 소녀가 건냈던 이제는 말라비틀어져 버린 대추 몇알, 그리고 소녀가 소년에게 던져 주었던 뽀얀 조약돌까지 개울 위로 흩뿌렸다. 화장한 뼈가루를 강으로 바다로 흘려보내듯 누가 알려주었을리도 없건만 소년은 그렇게 스스로 소녀의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가녀린 소녀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주었던 소녀의 저고리... 흙물이 묻어 가뭇해진 저고리에는 아직 소녀의 채취가 남아 있는 듯 했다. 소년은 마침내 그 저고리마저 개울에 던져 넣는다. 소녀의 보랏빛 지맛자락을 이제야 놓아주기라도 하듯 소년은 저고리를 흘려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고리는 쉬이 떠내려 가지 못한다. 아직은 봉오리도 채 맺지 못한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차마 이렇게는 흘려보낼 수 없다는 듯 자꾸만 걸그치는 소년의 저고리를 이제는 마음에 슬픔의 자리를 찾아 준 듯한 소년이 조심조심 떠밀어 낸다.
소년은 그렇게 성숙해졌다. 아마도 소년은 슬픔을 견뎌 소년의 인생을 살아가리라.
소녀는 영원히 소녀로 남을 것이다. 분홍 스웨터를 입고 가녀린 하얀 목살을 드러내며 개울가 징검다리에서 영원히 헤살젓고 있을 것이다. 아주 먼 훗날 소년이 소녀를 만나러 다시 개울가로 돌아오길 기다리며 하얀 조약돌을 다시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소나기의 여운은 헤살로 이어져 '그래서 둘은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와는 다른 안도감을 주었다.
살면서 맞닥뜨릴 다양한 모습의 이별들에 그렇게 호들갑 떨지 않아도 된다고...
살다보면 헤어질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고.... 그 모든 아픔들의 자리가 결국 인생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돼 줄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