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으로 행복해 지기
값 따위 얼마든 상관없이...
내 마음을 맛으로 대변해 줄 만큼 나와 잘 맞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세상 다 가진 사람마냥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느긋하게 그 맛을 음미해 보고 싶은
그런 날이 있다.
옛날에 처음 커피를 먹기 시작했을 때가 언제였더라...
초딩때는 부모님 무서워
겨우 먹는 게 커피맛 나는 아이스크림 정도였다.
뭐.. 커피 우유도 못 먹게 했었으니까...
그리고 중학교에 들어가니...
오호호... 글쎄 학교에 커피 자판기가 있더란 말이다...
그래서 아~ 나도 이제 커피를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된 거구나.. 오호호호호
이랬었다...
그래도 차마 그 자판기 커피는 못 먹고..
가까이 사는 이모네집에 놀러가면
어쩌다 사촌 언니가 먹고 있는 믹스커피를 한 모금씩 홀짝거리는 정도가 다였다.
그러던 어느날!!! 뚜둥..
시험 공부를 하던 중에 떠오른 생각~
커피를 마시믄 잠이 안 온다더라는 그 사실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커피 믹스를 동네 슈퍼에서 한개씩 팔던 때였다..
뭐 지금도 그리 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정말 큰 용기를 내서...
커피 믹스 하나를 사왔다.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다.
우리 부모님... 커피 마시면 머리 나빠진다라는 터무니 없는 소리를
찰떡같이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커피 마시기는 점점 대담해 져서..
어느날 부모님께 딱 걸리고 말았다.
아무튼 엄마는 어찌 어찌 해서 넘어갔는데..
우리 아바이...
어느날 내가 커피 마시는 걸 목격하신 후
그야말로 노발대발 장난이 아니었다.
누가 얘 커피 마시는 거 갈쳐 놨느냐
**이(사촌언니)가 갈쳤느냐,
저것이 중학교 가더니 못된 것만 배웠다..
으음... 정말 난 커피가 그렇게 나쁜 건지 다시 한 번 고민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굴하지 않고 그냥 마셨다.
아무리 그래도 이젠 나도 어엿한 중학생이었고,
그러므로 나름대로 사춘기였으며,
그것은 일종의 아바이에 대한 나의 반항이었던 것이다..
참 소심하기도 하지...
그렇게 100원짜리 믹스커피에 내 입맛이 물들어갈 즈음...
어느날.. 내 친구중 하나가 블랙커피를 마시는 걸 목격했다.
물론 학교 자판기 커피 메뉴였긴 하지만..
그 친구는 정말 인생의 쓴 맛을 다 겪어 봤다는 표정으로
그 쓰디쓴 자판기표 블랙커피를 음미했었다..
당시 나는 그 친구가 정말 멋있어 보였다.... ㅡㅡ;
.............그래서............
이젠 나도 인생의 쓴 맛을 음미하리라......... 독하게 맘을 먹고
엄마를 조르고 조르고 졸라
슈퍼에서 알갱이로 된 유리병에 들어있는 커피를 드디어!!!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인생을 달관한 달관자의 표정으로 블랙 커피를 마셔댔다.
그때 나를 블랙커피의 길로 이끌었던 친구는
블랙커피도 아메리칸 스따일이라는 게 있다며 이리저리 타 먹는 법을 소상히 지도해 줬다.
그리고 어느덧..
커피를 먹는 게 그리 큰 일도 아닌 게 돼 버린 어느날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고
그 무렵 크게 유행했던 게 바로 커피 전문점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근처에만 해도 원두커피를 파는 몇 개의 커피 전문점이 생겨났고
일반 인스턴트 커피에 익숙하다 못해 식상해져 버린 나에게
원두 커피는 그야말로 새로운 충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홀 전체에 퍼져 있는 그윽한 뭔가 고독하기도 한 그 원두의 향기에
그야말로 나는 포옥 빠져들었다.
세상에 커피라는 게 이런거였다니...
이렇게 향기로 사람을 취하게 하는 향이라는 게 있다니...
아아.. 그리고..
그무렵의 나는 그야말로 이성에 눈뜨기 시작하고 있었다..
고딩이면 늦어도 한참은 늦은 나이에 말이다.
같은 학원을 다니던 윗 학년의 오빠들이 점점 신경 쓰이고
교회에서 몇 번 마주친 훤칠한 남정네에게 푹 빠져 잠도 못자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렇게 뒤늦게 멋모르고 이성과 원두커피에 동시에 눈을 뜬 철없는 기지배는...
원두커피의 향과 함께 대상없는 그리움과 뭔지 모를 우울함에 젖어 들었다.
학원에서도 공부는 뒷전이었고,
학원 끝난 후의 커피 한 잔과 친구들과의 수다가 더 좋았다..
그리고 어느날은...
갑작스런 고백속에서
사귀는 건지.. 그냥 만나는 건지.. 모를 그 애매하고 어설픈 관계를 가지게 된 한 남정네와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때만 해도 세상 끝날 것 같던 고민을 함께 나누며
동네의 커피 전문점을 돌아다니며 데이튼지 뭔지도 모를 만남을 가졌다.
몇 잔의 원두 커피와 몇 번의 식사와 몇 개의 편지들을 끝으로
다시 볼 수는 없었지만
지금 어쩌다 맡게 되는 원두 커피의 향을 맡으며 느껴지는 그리움은
그 시절의 그리움.. 그리고 그 오빠와의 어설프지만 참 따듯했던 만남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아직도 원두 커피의 향을 좋아하고
가끔 몇 천원짜리 커피를 먹고 싶어하고
이제는 커피라는 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돼 버리다 못해 좀 줄이던가 끊던가가 돼버린
직딩이자 아짐이 돼 버린 나이가 돼 버렸으면서도
나는 아직도 가끔은 그립다.
가끔은 원두 커피의 그윽한 향을 맡으며 대상없는 그리움에 푸욱 젖고 싶고,
맛있는 커피 한 잔 들고 거리 거리 쏘다니고 싶다.
늦은 밤에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뭔가를 고민하다 밤을 새고 싶기도 하고
좋은 사람이랑 설레는 맘으로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마주앉고 싶기도 하다.
오늘따라...
유독 향 좋고 맛 좋은 맛있는 커피 한 잔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