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 스푼의 시간

인간의 시간은 흰 도화지에 찍힌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

by 월 림

구병모 작가의 소설 한 스푼의 시간.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분인 구병모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이 책은 주인공들의 성장기이기도 하고

인간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사람과 똑같이 생긴 로봇이 사람의 감정까지도 학습한다면

그 로봇은 그냥 로봇일 뿐인가

인간성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도 하게 하는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책이다.

책은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지만 생각할 거리는 많은 책,

그래서 읽고 또 읽게 되는 책이다.




<줄거리>

낡은 빌라들이 모여 있는 서울 변두리 조그만 세탁소에

어느 날 사람 키만 한 택배 상자가 도착한다.

발신인은 비행기 사고로 시체도 찾지 못한 세탁소 주인 명정의 아들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뜯어 본 택배 상자 안에는 17~18세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 로봇과 설명서가 들어있었다.

아들이 사고사 하기 전 근무하던 회사에서 아들이 만들었던 샘플 로봇이었는데

아들이 죽은 후 자리를 정리하다 발견하고

유족인 아버지에게 보냈던 것이다.

아내도 일찍 여의고 아들마저 불의의 사고로 잃은 명정은

아들이 남긴 마지막 선물이라 여기며 소년 로봇과 함께 생활하기로 한다.

명정은 로봇에게 둘째가 태어나면 지어주려 했던 이름인 은결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리고 진심으로 은결을 자신의 친아들처럼 대하며 아들을 잃은 슬픔을 달랜다.

작은 동네에 등장한 사람과 똑같이 생긴 로봇은

동네 사람들, 특히 아이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시호와 준교는 거의 매일을 세탁소에 들러 로봇 은결과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런 호기심도 잠시 은결에 대한 호기심은 금세 잦아들고

대신 은결은 이 작은 동네 세탁소집의 일상이 되어간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꼬맹이였던 시호와 준교는 17살이 되었다.

은결을 오빠, 형으로 부르던 그들에게 이제 은결은 친구가 되었다.

가족과 가난이라는 삶의 무게로 힘들어 하던 그들의 곁에서

은결은 묵묵히 힘이 되어주었다.

그러면서 은결은 시호와 준교로 인해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들을 학습하게 된다.

로봇인 은결에게는 흐르지 않는 것만 같은 시간 속에서 명정은 늙어가고

시호와 준교는 아이에서 청소년으로 청년으로 성장해 간다.

어느덧 명정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은결을 준교의 대학교에 기증하기로 한다.

겉으로는 흐르지 않는 은결의 시간은

은결을 이루고 있는 부품 하나하나에 흐르고 있었고

돌봐줄 사람이 없는 은결은 결국 고철 덩어리가 될 것이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은결은 자신의 주인이자 아버지인 명정의 마지막 명령을 스스로의 의지로 어기고 만다.

명정이 마지막 순간까지 덮고 있던 이불과 함께 자신의 기능을 정지시키기 위해

명정이 남겨 놓았던 편지를 찢고 스스로 세탁기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다행히 이를 눈치챈 시호와 준교가 은결을 구해내지만

한쪽 다리와 한쪽 눈에 장애를 가지게 된다.

시호와 준교는 결혼을 하고 은결은 그들의 곁에서 함께 살아간다.

또다시 시간은 흐르고 시호와 준교도 세상을 떠난다.

노후될 때로 노후 된 로봇 은결의 옆에는 이제 시호와 준교의 손녀가 함께하고 있었다.





<기억에 남는 책 속 내용>


//157쪽

[아무리 약품을 집중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오점이 남게 마련이고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또한 내 모습이다. 그것이 싫어서 모른척하거나 스스로를 속이려 드는 순간 내가 나를 부정하게 되고 내 인생의 키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최악의 경우를 맞이할 수도 있다. 설령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이라 하더라도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 하고 그것이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184쪽


[우주의 나이가 137억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며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우주의 시간에 비해 턱없이 짧기만 한 인간의 시간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 찰나의 순간조차 애를 쓰며 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사는 동안 망각하기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찬란해질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주의 모순일지도 모른다.



//237쪽


[마지막으로 반듯하게 개킨 순면 수건에 코를 묻고 부드러우면서도 산뜻한 울샴푸 냄새를 맡았던 적이 언제였는지를 떠올려 본다. 돌이킬 수 없이 얼룩졌으나 어떻게든 입고 걸치고 끌어온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표백하는 불가능한 일에 대해 상상해 본다.. 그리고 낡은 옷가지 속에 파묻었던 때 묻은 기억들을 말갛게 씻어낸 뒤 햇볕에 널고 싶었던 매 순간의 충동들을 돌이켜본다. 지금까지 건조기 안에서 웅크리고 지내온 날들을, 물기 한 점 없이 바싹 말라 바스라지기 직전이었던 최소한의 생활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아이에게 이염되기를 바라는 삶을 응시하는 기본적인 태도와 자존심과 신념 같은 것들을 꼽아본다.]


사람의 인생에는 어떤 식으로든 얼룩이 남게 마련이다. 어떤 얼룩은 지우고 싶은 얼룩으로 어떤 얼룩은 추억이 새겨진 얼룩으로 그 많은 얼룩들은 그만큼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일 테다. 얼룩들은 서서히 바래고 옅어지겠지만 그러나 끝까지 지울 수는 없듯이 우리의 인생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지나고 나면 그저 빛바랜 얼룩일 뿐이지 않을까.



//249쪽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서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인간의 삶은 그렇다. 한 스푼의 세제가 물에 녹는 딱 그만큼의 시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물에 녹아 몽땅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 찰나의 순간순간은 소중하다.

수많은 우연이 겹쳐 하필이면 이 지구라는 행성에 하필이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우주의 시간으로는 하찮은 순간을 살다가 가기 때문에. 어쩌면 한 번뿐일 우연이기 때문에.

이왕이면 미소가 지어지는 빛 바랜 무수히 많은 얼룩들을 남겨 놓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Happy yourse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