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코로나 일지 1

옥수수 장수가 된 우매스 엄마와 아빠

2020. 7. 7


3월 23일 전국 봉쇄가 시작되면서 곧바로 문을 닫았던 모든 학교 중 지금까지 문을 연 학교는 단 하나도 없다.

현재 네팔의 총감염자는 15,946명이고 사망자는 35명이다.

완치자 6,111에 하루 PCR 검사 오륙천 명 정도 수준이라 기다리는 숫자가 더 많을 테니 감염자는 계속 쭉쭉 늘 것이다.

네팔 정부가 조금 긴장하기 시작한 거 같다.

그간 네팔 남쪽 지역 그러니까 인도 접경 지역의 감염자가 많았던 것은

인도에서 이미 감염되어 인접 국경을 걸어 넘어온 네팔 이주노동자들 때문이라고 설명을 해왔는데

며칠 사이 카트만두의 감염자가 팍 늘었기 때문에 아직 지역감염이 없다는 정부의 확신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모든 지역 완전 봉쇄에서 완화된 국가 봉쇄 1단계로

(개인차량의 이부제 운행, 오토바이 운전자 1인만 탑승 가능, 공공버스 및 장거리 버스 운행 불가

외부 지역에서 수도 카트만두로 진입 불가, 학교 대학 극장 쇼핑몰 헬스장 댄스바 축제 전시회 등 25명 이상 모이는 것 금지, 안전수칙 준수 하에 개인 가게 운영 등) 바꾼 게 지난 6월 11일이었다.

3월 23일부터 6월 10일까지 근 80일간 전면 봉쇄였던 네팔엔 자살도 많았고 끼니를 걱정하는 일용직 노동자 가정도 많았다.

우리 동네 청년회인 킹콤클럽에서도 동네 학교를 빌려 매일 이삼백 명을 위해 밥을 짓고 달(콩국으로 네팔 사람들의 끼니때 꼭 필요하다)을 끓였다.

처음엔 사람들이 와서 받아 갔지만 나중엔 감염이 걱정되어 아예 청년회 회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일일이 배달을 다녔다.


전면 봉쇄가 시행되기 전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카트만두 거주자의 1/3이 빠져나갔다는 얘기들이 있을 정도였는데

틀린 계산이 아닐 것 같은 게 한동안 야채 값이나 달걀 값, 닭고기 값이 많이 내려갔다.

시골로 간 사람들이 많으니 공급량에 비해 소비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국가 봉쇄 1단계를 시행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지금은 계란값이 무려 480루피까지 뛰었다.

대개 350 이상 잘 가지 않던 값이었다.

혹시 닭들도 병에 걸려 죽을까 봐 농장주들이 미리미리 닭을 공급하는 바람에 그간 닭고기 값이 내려가기도 했는데 가족들이 모두 집에 있다 보니 먹는 것도 일 나갈 때보다 더 했다고들 했다.

다시 조금이나마 사람들이 활동을 시작하고 PCR테스트 결과를 떼보이면 카트만두 진입이 아예 불가능한 게 아니다 보니 차츰 카트만두 유입 인구가 늘고 있기 때문에 다시 반대현상으로 달걀 값이며 야채 값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물가가 널을 뛴다. 일상이 불안하다.


우매스 엄마인 우르밀라 씨는 이번 완전 봉쇄가 시작되었을 때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옥수수 장사였다.

사월 무렵에 옥수수가 나기 시작했는데 옥수수 네댓 자루에 우리 돈으로 1200원 정도였다.

염 엄마처럼 우르밀라 씨도 새벽 세 시에 일어나 팅꾸네라는 동네에 가서 옥수수를 받아 왔다.

여기는 짐을 머리로 이거나 지게로 지지 않고 넓은 끈을 사용해 이마로 짊어진다. 남로라는 마치 아이스크림 콘처럼 생긴 대바구니에 물건들을 담아 이마로 지고 가는 사람들은 짐의 무게를 견디느라 묵묵하게 걷곤 한다.

짐은 등에 있는데 그 짐의 무게는 이마가 지탱하고 있는 셈이다.

옥수수 백개를 그렇게 짊어지고 우매스 엄마는 우리 동네 사거리인 밀란쪽으로 간다.

나는 여섯 시경에 집을 나서 동네를 한 바퀴 돌곤 했는데 밀란쪽에 도착할 즈음이면 항상 우매스 엄마가 옥수수를 막 펼치고 있곤 했다.

남의 집 빨래나 설거지 청소를 업으로 삼았던 우매스 엄마 인생에서 장사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이번 사태로 사람들이 집안에 들어앉기 시작하면서

굳이 청소할 사람을 부를 필요도 없었고 외부인들이 드나드는 걸 조심스러워했기 때문에

우매스 엄마의 일감이 확 줄어버렸다.

방세도 내야 하고 왕성하게 먹는 중학생 아들의 간식도 사다 날라야 했던 우매스 엄마는

달리 도리가 없다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옥수수 장수가 되었다.

일용직으로 건설 쪽 일을 했던 우매스 아빠도 일을 잃긴 마찬가지여서 부부가 좀 떨어진 곳에서 옥수수를 팔곤 했다.

둘이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아침 열 시까지 일해서 손에 쥐는 하루 벌이는 500루피, 약 6천 원 정도이다.

옥수수 하나에 많이 남기면 5루피고 한 달 방값이 6천 루피니 옥수수 천이백 개를 팔아야 한 달 방세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셈이다.

12일간 일한 돈이 꼬박 한 달 방세로 나가게 될 것이다.


가까운 이웃인 우매스 네의 사정은 그래도 좀 낫다.

우매스 엄마 아빠가 뭐라도 해서 돈을 마련해 방값을 내고 킹콤 클럽에서 가져다준 밥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


너무너무 힘든 나머지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최후의 보루였을- 금을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긴 아직 금은붙이를 소중한 재산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어쩌면 현금이 없는 사정에서 천만다행이기도 하다.


네팔에 사는 한국 교민은 오고 가는 관광객까지 포함하면 보통 천명 정도로 보고 있다.

그중 지금은 6백 여명이 남았다고 한다. 어차피 방학인 데다 안전도 생각할 겸 일찌감치 5월에 전세기를 타고 떠난 가족들도 있고 더러 지병이 있거나 나이가 있는 분들도 미리 가셨다고들 한다.

지난 사월부터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전세기가 뜨고 있다.

이번 칠월에도 두 번 있다고 하는데 여기도 물론 외국인 입국이 전혀 안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오는 대한항공은 빈 비행기로 왔다가 여기 있는 한국인들과 네팔인들--EPS로 한국에서 일하다가 휴가차 왔던 사람들이나 학생들-을 태우고 다시 한국으로 갔다.

또 한동안 이권을 조율하지 못해 어떤 비행기가 가니 마니, 송환을 하니 마니 하던 이주노동자 송환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지난 6월부터였다.

쿠웨이트 등 주로 아랍권에서 일을 하던 네팔인들이 일자리를 잃어 살기 곤란해지자 자국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그 덕에 최근 며칠 동안 오래간만에 비행기 소리를 자주 들었다.

약 2만 명 정도가 네팔로 왔고 그들도 역시 14일간 격리를 한 후 검사를 받고 집으로 가거나 수용시설로 가고 있다고 한다.

열악한 치료 현장과 수용시설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한 번 쓰려고 한다.


여기도 아이들이 온라인이나 라디오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라디오로 듣는 공부는 아마 시골 인터넷이 안 되는 지역을 위한 것일 게다.

공부야 일이 년 덜 하면 어떻고 좀 늦으면 어떠랴만 아이들이 못 뛰어놀고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게 더 고역이다.

널찍한 집을 가진 곳이면 좀 나으련만 자그마한 방 하나에 서너 식구가 살고 거기에 부엌까지 같이 차려진 집이라면 아이들이 어찌 거리로 안 나오고 배길까.

가난한 삶이 이 코로나바이러스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으니 엎친 데 덮쳤다.



이젠 옥수수도 끝물에 이르렀다.


우매스 부모님은 요새 무슨 다른 수를 찾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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