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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지윤 Jun 01. 2022

어느 방랑자의 여행법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의 거리도 누군가가 에게는 여행지가 된다

"여행은 돌아오는 거야.

떠나는 게 아니라 돌아오는 거. 여행을 한다는 것은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거야.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다시 너의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거야."


나는 다시 돌아갈 나의 일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나의 침대와 일정분의 물을 머금은 화초들과 내가 없어도 약속대로 와 있는 나의 택배들을.


"나는 늘 여행 실패자였어. 여행을 마칠 때쯤이면 늘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지. 어릴 때 여행을 참 많이 다녔어. 여름이면 캠핑을 가고 겨울에는 스키장이나 펜션을 가고 해외를 오고 가거나 산들을 오르고 내렸지. 그때는 숙소를 알아보거나 티켓 따위를 예매하거나 짐을 쌀 필요도 없었는데. 그런 건 항상 누군가가 했으니까. 어린이의 삶은 그런 게 좋아. 그런데 난 여행을 가는 것 따위에 별 감흥이 없었어. 돌아오는 게 힘들었거든. 나는 늘 돌아오는 길에 애를 먹었지. 집으로 돌아가는 게 끔찍하게 불편했어. 이유모를 우울감 낯섦 공허함 따위. 그땐 그게 뭔지 몰랐어. 나는 돌아오는 법을 몰랐던거야. 다시 일상으로 다시 생활로 다시 내가 떠나온 고민과 걱정으로."


우리는 두오모 성당 앞 계단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내 생활을 벗어나 여기 앉아 있듯 저들도 돌아갈 집이 있고 관계가 있고 돌봐야 할 식물이 있겠지. 모두 어디로 돌아갈까? 모두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그 노래 기억하니? 나는 어릴 때 그 노래를 부르며 늘 생각했어. 지금 여기를 떠나 앞으로만 나아가는 거야.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떠나는 거.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라는 가사. 나는 늘 그걸 꿈꿨어. 결심을 하고 짐을 싸서 무작정 앞으로만 가는 거지. 돌아가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어느 지점에서는 잠시 머물 수도 있지만 정착하진 않아. 그렇게 온 세상 어린이가 늙어 죽을 때까지 나는 매일 새로운 땅을 밟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곳에서 잠을 자고 새로운 삶만 사는 거지. 결코 오래된 것이 없고 소유한 것이 없고 돌아갈 곳이나 책임이 없는 삶. 앞으로 가야 할 곳만 있는 삶. 어때?"


나는 생각했다. 작년에 새로 산 전자제품들과 고액을 치르고 바꾼 매트리스와 내가 물을 주지 않으면 말라죽을 나의 식물들을. 내가 말도 없이 결근을 하면 나의 업무를 갑자기 뒤집어쓰고 허둥댈 직장의 동료 들을. 무엇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주문한 택배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마치고 우리 집 앞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앞으로 떠나는 사람은 여행자가 아니야. 그건 부랑 자나 방랑자지. 나는 부랑자가 되어 보고 싶었어. 나는 이상하게 유명 관광지나 명소라고 해서 갔던 곳들이 기억이 안 나. 너무 많은 사람들, 인구의 밀도가 빼곡한 지점에서 나는 답답함을 느껴. 내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뒤통수들을 바라봐야 했는지. 내 기억 속 모나리자는 이제부터 그 뒤통수들과 하나인 거야."


나는 모마에서 보았던 고흐의 그림이 생각났다. 그림 속 반짝이는 별보다 무수했던 관광객의 뒤통수와 그 뒤통수에 가로놓여 실제의 별보다도 더 멀게 느껴졌던 그림을. 남이 본 것을 봐야 하고 남이 먹은걸 먹어야 하며 남이 간 곳을 가야 하는 개성 없는 관광객들. 그 속에 나.


"여행을 갔다 돌아가서 내가 기억하는 것들은 모두 하찮은 것들이야. 어느 골목 안 오래된 상점의 갈라진 문짝이라던가 그 문짝 위 벗겨진 페인트를 보며 연상했던 아무 이야기들. 아무 곳도 아닌 길바닥 위에 무료하게 앉아 있던 어느 남자의 표정이라던가 잠만 자려고 구한 싸구려 숙박업소의 아침, 그 아침에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 유명 레스토랑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음식을 서빙하던 웨이터의 손등에 새겨진 문신의 모양과 그 모양은 무엇을 의미할까를 생각하다 만들어진 허공의 이야기들, 이 싸구려 모텔에 머물던 여행자들의 사연 따위, 구석진 골목 사람의 발길이 끊긴 오래된 상점과 그 상점을 지키는 노인의 사연 따위. 그런 거. 꼭 관광지가 아닌 곳 에서도 할 수 있는 그런 하찮은 생각 따위를. 나는 아마 이번에도 돌아가면 콜로세움이라던가 우피치 미술관 이라던가 단테의 집 따위는 까맣게 잊을지도 몰라. 우리가 명소에 가기 위해 빠르게 가로지르던 골목과 그 골목에 놓여있던 오래된 패티오와 그 패티오에 앉아 사랑을 속삭였을 하찮은 연인들과 그들이 마시던 에스프레소 코레또의 냄새 등을, 그 술과 커피의 밤 따위가 남긴 잔상들을 기억하겠지. 나는 아마도 그럴 거야."


방구석에 앉아서도, 굳이 여행을 오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추억과 기억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걸 여행지에서 했을 때 더 의미 있어진다니. 그녀의 '하찮은 생각'에 지불되는 값은 결코 하찮지 않았다.


"내 영혼이 그런 것들에 빠져 있느라 내 몸이 미리 예약해둔 비행기표 위의 시간을 따라가지 못해. 비행기는 너무 빠르지 빨라도 너무 빨라. 내 몸이 다시 삶으로 되돌아갔을 때 내 영혼은 아직도 싸구려 숙박업소의 아침 햇살과 패티오 위의 연인들과 밤늦도록 서빙을 하는 웨이터의 손 따위에 계속 머물러 있어. 여행에서 돌아오면 나는 한동안 껍데기만 돌아와 있구나, 생각해. 학교를 가거나 회사를 가거나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만나거나 세수를 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나는 무얼 해도 공허해. 나는 공허하고 우울하고 슬퍼. 내 껍데기는 영혼이 없어서 그렇게 한동안 늘 공허하고 슬퍼."


나는 오늘 저녁 우리가 가기로 한 유명 레스토랑을 예약했어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사진을 찍는 사람 백팩을 멘 사람 지도나 앱을 켜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나도 저들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일까? 반면 그녀는 여유로워 보였다. 그녀는 예약 없이 간 그 레스토랑에 자리가 없다면 도시의 아무 곳이나를 찾아갈 것이다. 앱을 켜지 않고 사람들에게 묻지 않고 화려한 간판에 속지 않고. 훗날 그녀에게 그 레스토랑의 이름을 물으면 그녀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 이름 따위 알려고도 하지 않겠지. 대신 그곳에서 마신 와인의 떫은맛을 느낄 때 떠올렸던 생각이나 느낌 따위가 그 기억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겠지. 그녀는 살면서 가장 설레일 때는 길을 잃을 때라고 했다.


"길을 잃는 건 일부러 안돼. 일부러 잃는 건 일부러 거길 찾는 거야. 길을 잃는 건 우연이야. 우연은 운명과 연관이 있지. 새롭고 아름다운 곳은 늘 길을 잃었을 때 발견되. 길을 잃지 않고서야 도저히 가 볼 일이 없는 곳. 나는 길을 잃으면 그 어딘가에서 꼭 커피라도 한잔 하고 와."


실제로 그랬다. 한 번은 고속도로에서 exit을 잘못 빠져나가 생전 가본 적도 없고 가볼 일도 없는 로컬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집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였지만 우연히라도 갈 일이 없고 일부러는 더더욱 갈 일이 없는 동네였다. 그녀는 되려 즐거워 했다. 그 동네의 그림 같은 집들에 나도 마음을 빼앗겼다. 우리는 거기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절대로 가 볼 일이 없는 그 허름한 식당에서. 그날 우리는 쇼핑몰을 향해가고 있었다. 쇼핑을 했다면 남지 않을 기억과 추억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고 생각한 순간 발생했다. 인생은 우리를 한 번도 잘못된 길로 데려다 놓은 적이 없는 게 아닐까? 길을 잃었다는 것은 단지 우리의 착각인 것이 아닐까? 허름한 식당의 음식은 맛있었다.


"어떤 작가가 그러더라. 여행을 갈 때는 내 생활을 모두 두고 가야 한다고. 일을 가져가서도 안되고 너무 많은 짐을 가져가서도 안되고 근심이나 걱정 따위도 안된데 모두 내 삶의 터전에 두고 가야 한다는 거야. 근데 나는 여행에서 돌아올때가 되면 좀처럼 몸을 따라오지 못하는 영혼을 다독여 끌고 오면서 생각했어. 왜 이렇게 돌아오는 것이 힘들까? 자유로운 영혼인데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가야 하는 영혼인데 돌아가라니. 내 영혼은 절대로 가기 싫은 거야 내가 두고온 일과 생활과 짐과 걱정이 있는 그곳으로. 나의 영혼은 부표처럼 부유하고 싶은 거야. 나는 단 한 번도 완벽히 여행을 성공한 적이 없지. 여행은 돌아오는 것인데. 나는 돌아가는 것에 늘 애를 먹었어. 몸이 먼저 도착한 생활에 나는 그저 멍 한 기분으로 몇 날 며칠을 보내는 수밖에. 부레옥잠 같은 영혼인데 정원에 심켜 있는 기분이 들어. 답답해."


우리는 내일 아침 비행기로 각자의 생활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질 예정이었다. 여행을 마친 그녀의 몸이 그녀의 생활안에 안전하게 도착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래 숨어 여기에 남을 그녀의 고집스러운 영혼을 생각해 보았다. 몸도 없이 골목길 어귀에, 여행자의 흔적이 정리된 싸구려 모텔방 안에, 우리가 밥을 먹은 어느 이름 모를 식당 테이블 위에 남아 부표처럼 부유하고 있을 너의 영혼을. 그녀의 몸이 미처 따라오지 못한 영혼을 기다리며 공허하고 우울한 시간을 보낼 때 그 영혼은 여기 남아 어떤 시간을 보낼까? 하고.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어 짐과 가구와 가전제품이 있는 생활로 돌아간 못나빠진 몸을 탓하며 비척비척 느리게 한참 뒤에나 겨우 생활로 되돌아올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이 가여웠다.


"어쩌면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너무 하찮아서일지도 몰라."


그래, 사랑을 하면 달라질지도. 아마 몸보다 앞서 영혼이 먼저 돌아가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대답했다. 어쩌면 사랑은 모든 걸 이겨 버리니까. 사랑은 모든 걸 잊어버리니까. 마음이 싸구려 모텔방과 웨이터의 손등 위 문신과 골목 위 낡은 패티오, 그 패티오 테이블 위에 남녀 따위를 눌러 담을 여유조차 없이 충만할 테니까. 그렇다면 니 영혼은 돌아가고 싶을 거야. 하루빨리.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뉴욕은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빌딩 숲, 내 생활의 터전. 고민과 걱정이 있는 곳. 지겹고 따분한 생활. 거기를 사람들은 관광했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샌들 아래 종아리까지 양말을 올려 신은 독일인 남자가 보였다. 방금 전 내가 떠나 온 곳에 생활이 있는 사람들. 나에게는 설레고 새롭고 낯선 여행지에 고민과 걱정과 지겨움과 따분함을 두고 온 사람들. 그들이 내 삶을 카메라에 담는다. 나의 지겨움을 일부 편취해 간다.

도대체 무얼 하려고 저딴걸 찍는 거지? 빌딩 숲 전광판 보도블록 매일 먹어 지겨운 식당의 간판 더럽고 후덥지근한 지하철의 개찰구 따위를. 어쩌면 저 남자는 그녀가 오래 마음을 썼던 이태리 어느 골목 그 낡고 초라한 패티오가 놓인 작은 상점의 주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의미를 궁금하게 했던 손등에 문신을 한 젊은 청년의 아버지가 아닐까? 어쩌면 우리가 묵었던 숙박업소 그 침대에 누워 보았던 사연있는 손님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모두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행은 잘 돌아오는 것이야."


당신들도 돌아가요. 여기 영혼을 두지 말고 모두 잘 들고 돌아 가요. 여기는 당신이 영혼을 놓고 가기에는 이미 너무 숨 막히고 빡빡해. 나는 다시 고민과 걱정을 안고 앞과 뒤와 옆에 둘러싸인 관광객들 사이에 끼어 그 지겨운 거리를 걷고 있었다. 돈을 들이고 떠났던 여행의 종착지가 고작 돌아오는 것 이라니.


나는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물었다. 우리가 굳이 여행을 해야 할까? 결국 다시 일상.

그녀는 갑자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글세 생각해 보니 어쩌면 니 말이 맞을지도 몰라. 사랑을 하면 달라진다는 말. 나는 돌아갈 명분이 없었던 거야. 그동안 내 인생에는 늘 지겹고 지루한 일상 고민 걱정 따위만 있었던 거야. 근데 만약 아주 흥분되는 것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 있다고 생각하면 내 영혼이 몸을 실은 비행기보다 빠르게 왔던 길을 가로질러 가지 않을까? 나는 그걸 경험해 보고 싶어 졌어. 지겹고 지루한 일상 말고 늘 새롭고 흥분되는 것. 이를테면 니가 말 한 사랑 같은 거."


그날 그녀의 표정에 우울함이나 공허함이 없었다. 무언가 설레는 사람처럼 얼굴이 발그레하기까지 했다. 영혼을 체포하기라도 한 걸까? 며칠이 지나고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날 여행을 하기 전 고백을 했던 남자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비행기를 타기 전 그에게서 연락이 왔었어."


그녀는 처음으로 완벽한 여행을 했다고 했다. 몸을 실은 비행기보다 빠르게 되돌아간 그녀의 영혼을 도리어 몸이 급하게 따라가느라 달리기라도 한  뛰던 심장이 그녀의 볼에 피를 뿜어 불게 만들었던 것이다. 싸구려 숙박업소의 아침햇살과 골목길 허름한 상점 앞의 패티오와 그 위에 사랑을 속삭이는 남녀와 늦은 시간까지 서빙을 해야 하는 손등 위에 문신이 있던 웨이터에게 매달리려던 가여운 영혼이 몸보다 먼저 달려가고 싶어진 초유의 사건. 그녀는 처음으로 홀가분한 여행을 했다고 했다.


대신 이번에는 그 햇살과 패티오 위 남녀와 웨이터 곁에 아직 내 영혼이 남아 있었다. 나는 조금 우울하고 쓸쓸한 마음으로 빌딩 숲을 찍고 있는 관광객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갔다. 아직 여행지에서 돌아오지 못한 영혼 없는 몸으로 빠르게 출근하는 나와 그곳을 관광하는 여행자가 떠나온 도시와 또 다른 우주로 여행을 떠났을 그녀와 온 세상 어린이들이 산재된 지구를 여행하는 우리가 언젠가 한번은 스치겠지.


나는 아직 미처 돌아오지 못한 영영혼을 차분히 기다리며 흥얼 거렸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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