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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hayn May 09. 2022

못자리

세상을 보는 방법


세계의 기운이 모이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등장한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 세운상가는 70년대 고급주거아파트와 함께 각종 전자 제품의 메카로 알려지며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었다. 이후 서울의 발전과 함께 고급 유통업체와 주거단지가 들어서며 세운상가는 화려한 과거를 뒤로하고 쇠락의 길을 걸었다. 청계천을 걷다보면 자연스레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세운상가를 나는 ‘본다’.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저층에 위치한 조명가게의 화려한 불빛을 보는 것, 약간 남루한 외관의 페인트 조각을 보는 것, 상가 안의 사람을 보는 것, 주변 상가들과의 관계를 보는 것, 흥망성쇠의 역사를 보는 것, 도시 재생 프로젝트의 흔적을 보는 것, 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는 것. 봄으로써 세운상가는 새롭게 쓰인다.


세운상가 2015
못자리: 못 추적 지도, 개발된 초록 들판 위 2015


<못자리> 프로젝트는 누군가에 의해 언젠가 박힌 ‘못 Nail’을 통해 세운상가를 보는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못자리>는 익명의 못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세운상가 2층 테라스를 찬찬히 보면 제 역할을 잃은 못들을 여럿 볼 수 있다. 난간 귀퉁이, 손이 안 닿는 높이의 기둥 가운데, 바닥의 모서리 부분에 말없이 녹슨 머리를 내밀고 있다. 마치 묫자리 주인의 비석처럼 언젠가의 쓸모를 기억하며 그 자리를 지킨다. 못들은 세운상가의 건물 구석구석을 보게 한다. 못은 또한 그들을 그곳에 위치하게 한 사람들과 상황을 보게 한다. 현재의 나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어느 순간을 그리고, 본다. 세계 속의 나는 못을 통해 세운상가를 보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못자리: 못 추적 지도, 개발된 초록 들판 위 2015


<못지도>는 ‘못 Nail’과 지도를 합친 말로, 지도의 형식을 빌려 못의 위치를 표시했다. 지도는 약속된 기호와 문자로 평면에 그린 정보 이미지로 주위에 어떤 건물이 있는지, 산은 얼마나 높은지, 공원은 어디에 있는지 등을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못지도>는 세운상가의 쓸모없어진 못이 위치한 곳을 표시함으로써 그것을 기준으로 한 정보이미지를 그려낸다. 거대한 세운상가 중 2층 테라스 공간을 지도 영역으로 한정했는데, 그곳에 칠해진 초록 방수페인트가 과거의 숲과 들판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흙 위에 옹기종기 지어진 옛 가옥을 밀어냈던 이들은 개발된 푸른 들판 위에서 미래 서울의 청사진을 그렸을 것이다. 희망과 애환이 담긴 못의 이야기들은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고 나는 그 속에 담긴 무한한 세계를 추적해나간다. 못지도의 이야기 방식은 세운상가를 다시 보게 만든다. 점으로 응축된 이야기를 단조로운 풍경에 펼쳐 풍성한 층을 쌓는다. 기존 지도의 규칙을 해체하고 못으로부터 시작되는 세계를 구축한다.


못자리: 차이나타운 2016


이후 <못자리> 프로젝트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다시 한 번 진행된다. 당시 열린 2인전 <Unpackaged Garden>의 일환으로 전시에 관심 있는 현지인들과 함께 못지도를 그렸다. 밴쿠버의 역사와 현지 사정에 무지했던 나는 전시를 준비하며 ‘캐나다 스러운’ ‘전통’ 음식을 찾았으나 그런 것은 없었고, 당황한 동료들이 데려간 곳은 차이나타운의 콘지(Congee; 중국이나 홍콩에서 아침 식사로 즐겨 먹는 걸쭉한 죽)집이었다. 그만큼 낯설었던 그 곳, 밴쿠버 차이나타운은 <못지도>로 읽히고 새롭게 그려졌다. 갤러리에 모인 참가자들에게 영역이 표시된 지도와 분필을 주고, 지도 내에서 자유롭게 못을 찾도록 했다. 이후 찾은 못의 흔적들을 합쳐 하나의 못지도로 만들어 공유하는 자리를 가졌다. 차이나타운의 <못자리>는 참가자들의 시선으로 인해 더욱 복잡한 축을 갖게 되고, 겹겹의 층위를 만들어냈다. 낯선 이의 시각과 현지인들의 시각이 뒤엉킨 차이나타운의 못지도는 그렇게 <못자리: 차이나타운>으로 완성되었다.


새로운 봄의 방법은 세계를 확장시키고 세계 내의 나의 존재를 드러낸다. <못지도>는 ‘본다’는 것을 단순히 시각의 역할을 넘어 보고, 읽고 쓰는 그 행위에 참여하게 한다. 적극적으로 이미지에 관여하여 표상에 자신을 포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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