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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hayn Jan 06. 2024

떠다니는 영토 – 이 배, 저 배, 그 배

전소정 작가의 ‹광인들의 배›를 보고

첫 번째 배 This ship

지난 크루즈 여행을 기억한다. 알래스카로 향하던 크루즈는 마치 크리스마스 같았다. 황홀한 선내와 넘치도록 풍족한 술과 음식, 24시간 즐길 수 있는 카지노와 지루할 틈 없이 제공되는 각종 프로그램, 테라스에서 보이는 환상적인 풍경과 매일 다른 기항지가 주는 새로움까지. 세계 곳곳에서 모인 항해자들은 날짜와 시간을 잊고 행복을 만끽했다. 크루즈의 이름, Bliss(행복)에 걸맞은 여정이었다. 


두 번째 배 That ship

크루즈 여행이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2020년, 아시아 그랜드 투어를 떠났던 크루즈는 한순간에 축제의 열기를 잃고 말았다. 코로나19의 창궐 초기, 요코하마로 돌아오던 프린세스 호에서 바이러스 확진자가 발견되고, 이후 집단 감염이 확인되자 육지의 비감염자-정상인들은 승무원을 포함한 탑승객들의 하선을 거부하였고, 이에 일본 정부는 확진자와 유증상자를 제외한 모든 승객을 객실 내에서 대기하도록 조치했다. 승객들이 누리던 호사스러운 크루즈는 한순간에 자유가 삭제된 감옥이 되었고, 그들은 격리된 채 한 달여간 육지에 발을 딛을 수 없었다. 


세 번째 배 The ship of fools

르네상스 시대에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건조한 ‘광인들의 배’①가 있었다. 광인들의 배는 사회로부터 추방된 온갖 종류의 광인들–나병 환자부터 매춘부, 사기꾼, 마녀, 정신병자에 이르는–을 싣고 정처 없는 항해를 계속했다.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이들의 수용소였던 이 배는 당시 ‘광인들을 싣고 라인란트의 잔잔한 강들과 플랑드르 지방을 따라 떠다니는 기이한 취선이 있었다’라는 단 하나의 사실로부터 창작되어② 유럽의 수많은 항구를 거쳐 갔다. 세 번째 배의 발명은 사회의 불안으로부터 기인한다. 한 사회 내 ‘나’의 안정적인 배치를 위해서는 내 이웃을 가장자리로 몰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계속해서 광인을 만들어내고, 그들이 나의 확신을 무너뜨릴 수 없도록 사회 바깥에 감금한다.


이 배, 저 배, 그 배

두 번째 배는 첫 번째 배와 마찬가지로 호화로운 시설을 갖추고 수준급의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하루 만에 광인들을 태운 배가 되고 말았다. 아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행복감을 안겨주었던 크루즈가 세 번째 배로 몰락한 이유는 승객들이 전염병에 걸리거나, 감염될 가능성이 있어서–다시 말해, 그들의 신분이 ‘광인’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배일지라도 승선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이 배’가 되거나 ‘저 배’가 되어 배는 그 정의를 달리한다. 마찬가지로 ‘광인’의 본질을 규정하는 ‘보편적 상수 universal constant’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 시대와 지역의 광기에 대한 인식을 구성하는 역사적 변수들 historical variables만이 있을 뿐이다.③ 즉, 보편적 광인은 없고 이 광인, 저 광인이 있을 뿐이다. 


유구한 항해의 역사에서 광인으로 분류된 자들은 어떤 병적 증상이 아니라 ‘정상인’이 존재한다는 신화로부터 비롯된 ‘비정상인’의 특성을 공유한다. 동시적・상관적으로 탄생한 정상인-비정상인 쌍둥이④는 치료자와 환자가 되어 서로를 응시하며 광인을 탄생시킨다. 두 번째 배를 광인들의 배로 만든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은 광기를 만들어내는 역사적 변수들의 단편적인 증거가 된다. 알래스카에서 즐거운 여행을 마친 첫 번째 크루즈와 아시아 투어 중 사회로부터 배척당한 두 번째 크루즈, 두 대의 크루즈 사이 차이점은 2019년 말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바이러스에 대한 인식과 위험성에 대한 기준이 정립되었다는 사실 뿐이다. 사회의 변화는 광인을 발명하였고, 새로운 ‘광인들의 배’는 항해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광인들의 탄생은 계속된다. 이민자, 난민,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비정규직, 소수민족, 외국인, 유색인종에 이르는 오늘날의 광인들은 다양한 이유로 광기의 오명을 쓴 채 벌거벗겨져 사회 바깥으로 내몰린다. 전쟁과 같이 급박한 상황은 어제 안락한 삶을 영위하던 이들을 바로 다음 날 광인들의 배에 실어 빈곤한 항해를 강제하기도 한다. 마치 파도가 쓸어내리는 무수한 모래 알갱이들처럼 광인들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전소정의 ‹광인들의 배›에 소개되었듯 터키에서 그리스를 향해 떠난 난민 형제 유수프 Youssouf와 유누스 Yunus가 그러했고, 동성애자를 핍박하던 조국 카메룬을 떠나 브라질로 향한 레즈비언 쥐스탱 Justin이 그러했고, 반이민 정서로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 콩고의 건설 노동자 에티엥 Etienne이 그러했다. 이들은 어디에도 속하거나 통합되지 않고 불확실성의 바다를 서성거릴 뿐이다. 스케이트 보더가 도시를 가로지르며 발을 구르는 한 광인의 탄생은 단축될 수 없다. 불안의 무덤 위에 지속되는 보더의 여정은 차가운 파도와 겹치며 미완의 여정을 그려낸다. 넘실대는 파도는 끊임없이 ‘현재’를 만들고, 질주하는 보더는 ‘지금, 이 순간’을 실천한다. 그렇게 나는 존재한다. 




Installation view of In search of Global Poetry: Videos from the Han Nefkens Collection, CAC Centro de Arte Contemporáneo Quito ©전소정 작가 홈페이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2023»에서 전시 중이다.




① 제바스티안 브란트 Sebastian Brandt(1457-1521)의 『광인들의 배 Das Narrenschiff, Stultifera Navis, La Nef des fous』(1494)는 광인들의 배를 다룬 이야기의 결정판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Hieronymus Bosch(1450-1516)의 그림 ‹바보들의 배 Ship of Fools›(1490-1500)는 브란트 책의 앞부분을 직접적으로 풍자했다.

② 허경,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읽기』(서울: 세창미디어, 2018), p. 72.

③ 허경, 앞의 책(2018), p. 153.

④ 허경, 앞의 책(2018), pp. 16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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