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by 최미야

지난 5년 동안, 엄청나게 방황했더랬다. 엄청나게 고통당했더랬다. 가족들과는 수천 번 싸우고, 딸은 방치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방치해 놓았었다. 이혼 후 5년, 이제 6년차. 긴긴 방황을 끝내고 난 이 자리에 되돌아왔다. 이제서야 비로소 내가 다시 만난 세계. 이 자리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그 얼마나 숱한 모진 고문같은 시간들을 겪어냈었는지. 내 사고는 이제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사유를 하고, 사색을 하고, 메타인지를 해본다. 이혼이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는지, 그 이후 살아갔던 내가,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그 얼마나 지난한 시공간을 뚫고 여기까지 온 건지. 나는 5년 동안 정신병원에 몇 번이나 입원했고, 집에 있을 때도 제정신으로 산 세월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나는 내가 내 손으로 키우던 딸을 전남편에게 보내야 했으며, 숱한 퇴사와 거절과 무심함과 무정함과 싸늘함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이 자리에 내가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 나는 이제야 제 기능을 하는 로봇처럼 움직인다. 드디어, 내가 내 영혼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지금 수중에 무일푼이다. 내가 가진 돈을 모두 엄마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돈을 통제할 수 없음에 엄마에게 내 돈을 내가 타서 쓴다. 나이 마흔둘에 할 짓은 못 되지만, 통제되지 않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기에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약을 먹는다. 양극성 정동장애 약을. 하루 세 알을. 디아제팜, 솔리안, 아빌리파이를 먹는다. 나는 가끔 저녁을 먹지 않는다. 아빌리파이 때문에 찐 살을 그나마 빼기 위해서다. 나는 아침에 무슨 일이 있어도 눈을 뜬다. 정량의 잠을 자고 일어나 활동하기 위해서다. 나는 부정적 사고를 피하고 되도록이면 입밖으로 내뱉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들은 내 영혼에 상처를 내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를 한다. 책을 읽는다. 글을 쓴다. 드라마나 영화를 본다. 그것들이 내 영혼을 살찌우게 해 주기 때문이다. 더 이상 바깥을 싸돌아다니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 걸지 않는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시시콜콜한 농담 따먹기도 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내 영혼을 단도리하고 잘 다져나가야만 한다. 조울증과, 이 양극성 정동장애라는 놈과 같이 살려면, 굉장한 통제가 필요하다. 물론 후회나 미련은 많지만 굳이 쓴웃음 지으며 그것들을 회고해 보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이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한가. 이미 지나온 시간인데. 나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내 남은 시간이 이렇게나 귀중한데. 너무나... 귀중한데.


아주 느리게도, 아주 빠르게도 가지 않고, 적당한 속도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이 느낌이 나는 너무 좋다. 집에서 밥을 해먹고, 가끔은 나가서 기분을 내기도 하고, 쓰디쓴 블랙커피를 옆에 한잔 두고, 글을 쓴다. 담배는 이제 내 곁에 없다. 금연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내 친구였던 담배 안녕. 내가 하루에 커피를 물처럼 마시는 걸 보고 내 딸이 "엄마, 커피는 하루에 세 잔 이상 마시지 않기로 해!"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그것도 지키려고 한다. 눈이 온다. 계절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그래, 겨울은 이랬지. 봄이 오면 신록의 푸르름을 맛볼 테고, 여름이 오면 내가 좋아하는 예쁜 옷들을 입을 테고, 가을이 오면 딸의 생일을 맞아 파티를 이어갈 테고, 또다시 겨울. 한 해의 시작은 겨울이었다. 차디찬 겨울이었다. 모든 것들이 생명력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이 계절, 나는 조용히 타오르고 있다. 매일의 루틴을 지켜가면서, 때로는 게으름도 피우면서, 그렇게, 그렇게. 난 살아가고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면 어쩔 수야 없겠지만, 죽음이 날 아직 거두어가지 않음에 감사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살아나가고 있다. 감사함으로. 감사함으로. 이 생을, 감사함으로.


아직 사람들과 오랜 시간 같이 있지 못한다. 오래 서 있거나 직장에 나가서 일할 수도 없는 체력이다. 그래도 나는 뭐라도 한다. 내 나름의 목표를 세워서, 뭐든 한다. 요즘은 영어 공부에 한창 재미를 느끼고 있다. 원서 모임도 나가고, 영어 책을 따로 읽기도 하고, 번역도 조금씩 하고 있다. 또 욕심에 한국어로 된 책을 읽는 것도 포기 못해서 그것도 조금 읽고 있다. 친목 모임에서 열리는 이따금씩의 약속도 나가고, 난 꽤나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놀랍지 않은가. 브런치에 올렸다가 숱하게 지운 내 글 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올렸던 그 수많은 글들을 차라리 지우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이내 그런 후회는 접는다. 난 내 확언된 생각과 사유로 점철되어진 글들만 독자님들이 읽었으면 하니까. 내가 어떤 확신이 있었을 때 글을 쓰면 난 쉴 새 없이 써내려간다. 망설임이 없다. 글의 주제를 계속 떠올릴 새도 없이 글이 써진다. 나는 즐겁다. 글을 쓸 수 있어서. 살아갈 수 있어서. 살아 있는 게 재밌다. 이 여정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 순간 죽음은 날 찾아오겠지만, 난 또 덤덤히 받아들여야겠지. 그래야겠지. 그래서 오늘 하루를 후회없이 살아야만 하는 거다. 뻔하디뻔한 말이지만, 내가 브런치에서 수십 번도 넘게 말했던 거겠지만, 또다시 확언한다. 이 생은 살아볼 만한 거라고.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곧. 난 어느새 학부모가 되었다. 핏덩이 같은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듯 이혼하고 내려와 좁은 투룸에서 울며 잠들던 어느 날을 생각한다. 또 그 핏덩이를 전남편에게 보내고 밤새 울었던 그 날도 떠오른다. 그리고 방황. 끝도 없는 방황 속에 나 자신을 내팽개쳐 두고 돌아다녔던 때를 생각한다. 나는 살아남은 게 다행이다, 라고 여긴다. 죽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줘서 고마웠어, 나. 나. 나. 마흔둘이 될 때까지 이렇게 숨쉬고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웠어, 나. 나. 나. 이토록 독특한 영혼. 이토록 비천한 영혼. 이토록 미혹된 영혼. 이토록 분명한 영혼. 밤새 도스토예프스끼를 읽던 그날을 생각해보렴. 밤새 고통에 울부짖으며 글을 쓰던 그날을 생각해보렴. 나는 살아냈다. 버텼다.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마흔둘, 대한민국 어느 소도시 귀퉁이 집에서, 창문 밖의 눈발 휘날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이 어찌 기적이 아닐 수가. 이 어찌 경탄이 아니 나올 수가.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빼도 박도 못하는 생존자다.


앞으로는 회고의 글보다 현실에 치중하는 글을 많이 쓰고 싶다. 회고는 이만하면 되었다. 병원이 어쩌고 이혼이 어쩌고 주절주절 글을 쓰다보면 또 그런 테마가 나오겠지만, 일단 내 두 다리만큼은 땅에 굳건히 박고 시작하겠다. 다만 인연들, 그 수많은 시절인연들이 가슴 아프다. 내 것이 아니었던 사람들, 그래, 본래부터 인간은 타인을 소유할 수는 없다. 내 마음을 온전히 주지를 못했고, 그 마음을 온전히 받지 못해 슬펐던 그 시간들을 돌이켜본다. 가끔씩 생각은 나겠지. 하지만 울진 않을 테다. 엉엉 울고 나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이젠 울 시간들도 아깝다.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아니, 해야 할 일들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들이다. 그동안 내가 내 정신으로 살지 못해 못했던 일들을, 마음껏 해볼 작정이다. 내가 좋아했던 산책,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 내가 좋아했던 음식들. 내가 좋아했던 특유의 감성들. 난 해독중이다. 내 몸과 마음에서 유해한 것들을 최선을 다해서 뽑아내는 중이다. 해독을 하려면 신선한 물이 끝도 없이 필요하다. 계속해서 이 낡고 지친 몸에 새로운 물을 부어주어야지. 나쁜 것들이, 삿된 것들이 모두 남김없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붓고 또 부어야지. 그래야지.


올해 10월이 되면 양육비가 오른다. 나는 그것을 갚아주어야만 한다. 딸은 무럭무럭 커가고, 나 역시 무럭무럭 늙어가고 있다. 이 세상에 나를 던져놓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그들과 같이 나 역시 이 세상에 한 생명을 던져놓았다. 나는 엄마다. 나는 엄마였다. 아직도 엄마라고 불리는 게 익숙지 않다. 아이가 여덟 살이 되었는데도. 엄마, 라는 호칭은 어색하다. 별다른 방도가 없다. 난 그 아이를 낳았고, 나는 그 아이의 친엄마가 분명없이, 틀림없이, 맞으니까. 내 여기 위치를 알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알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안다면 못할 게 없다. 그리고 다만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나아가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강력한 마법의 주문을 왼다. 죽음은 나의 힘. 나의 선생. 죽음이 나를 저 세상 끝으로 거두어가는 그 순간까지 나는 살아서 이 세상을 휘젓고 돌아다녀야 한다. 우스운 꼴일지라도, 비참한 꼴일지라도, 어쩌면 숭고하기조차까지 한 그 삶의 몸부림을 나는 쳐대야 할 것이다.


나는,

내가,

나임이,

좋은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