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간호조무사.

by 최미야

9시에 퇴근하고 집에 와서 담배를 연거푸 세 대나 피웠다. 내일은 쉬는 날, 주 4일이라 좋은 점도 있다. 나는 주중에는 9-9 일하고 주말에는 9-5 일한다. 다음 주에는 정말 퐁당퐁당으로 쉰다. 주말이 연달아 있는 것도 좋지만 아직 일이 익숙지 않은 내게는 하루 일하고 바로 쉬는 이 패턴이 맞는 것 같다. 한의원 치료실에서 일하는데, 내원 환자 수가 하루에 거의 100명에 육박한다. 발침을 하고, 물리치료 기계를 빼고, 핫팩을 대주고, 청소를 하는 일이 주업무다. 종일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어다녔다. 그래도 근로계약서를 쓸 때는 기분이 좋았다. 월급날은 7일, 그냥저냥 살 만한 월급이 들어온다. 내가 살았던 중소도시보다는 큰 도시라 다들 내게 무관심인 것도 좋았다. 어쩌면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고 정말이지 진짜 진짜 정식으로 출근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더욱 특별한 건 내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날이라는 것이다.


어제는 전남편의 메시지를 받고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내용인 즉, 내가 가까이 와서 불편하고 당황스럽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갑자기 내린 건지 모르겠다, 허락 없이 찾아오면 물리적 차단을 하겠다, 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가 갑자기 자기 영역을 침범당했다고 생각했기에 그냥 그 메시지에 '알겠습니다' 딱 한 마디만 했다. 뭐래, 내가 낳은 딸인데, 하고 처음에는 심술이 났지만 전남편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당황스러울 것도 같았다. 이해하기로 했다. 일단 친권자이자 양육권자인 그 사람의 의견에 따르기로. 난 지금 바짝 엎드려서 살아도 모자를 판이니까. 속상해도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넘겼다.


일하는 행위, 노동은 정말 경이로운 것이다. 신성하다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만 정말 숭고한 것 같다. 내 발로 뛰어서, 내 손으로 만져서, 내가 내 몸을 움직여서 일해 번 돈. 정말 가치 있는 것. 생각보다 담담했고, 생각보다 별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 그저 하루 열심히 살았다, 그 정도의 감각이다. 작년에 한의원에 취업했을 때는 직종 바꾸고 첫 취업이라는 기쁨에 도취되어 단약하고 하루하루 살았던 것 같다. 내가 노동을 하다니, 내가, 이 내가 노동을 하다니, 이러면서 엄청나게 뽕이 차 있던 것 같다. 하지만 하루이틀 겪어보면 노동은 정말 힘들고, 고되고, 어쩔 땐 버티기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노동을 하고 산다. 나도 그 대열에 이번에 한몫 끼게 되었다. 그래도 뽕이 차는 건 어쩔 수가 없는지, 아침에 출근할 때 나 스스로 '아침부터 출근하는 나, 너무나 멋지잖아?' 하고 생각해 버렸다. 일하는 나. 개멋진 나. 대단한 나. 오늘 하루쯤은 좀 도취되어도 괜찮을 듯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가 집을 나와 독립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 낡고 좁은 원룸에 혼자라는 사실도 익숙지 않는다. 집에 오면 언제나 엄마 아빠 눈치 보기 바쁘고, 언제나 취업할까 마음 졸이며 살던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난 만나는 사람들과, 머물 곳과, 하는 일을 단 한 방에 바꿔 버렸다. 첫 월급을 타면 정말 기분 좋을 것 같다. 제일 먼저 딸에게 맛있는 걸 사줄 거다. 엄마는 지금 전남편이 나를 많이 경계하고 있으니 돈도 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러지 뭐. 대신 만나면 이것저것 사줄 거다. 딸, 엄마가 열심히 정정당당히 번 돈으로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그 생각밖에 없다. 돈 벌어서 딸에게 쓸 생각밖에. 제일 가치있는 일이다. 그게.


다들 이러고 사는 거겠지. 노동을 하고, 돈을 벌고, 돈을 쓰고, 삶을 영위하고, 또다시 노동하고. 이 감각, 너무 오랜만이다. 나는 1년 이상 근속한 회사가 평생 살면서 딱 한 군데밖에 없다. 오랫동안 노동하고 돈 버는 감각을 잊고 살아서, 모든 게 새롭다. 내가 사회의 한 일원이 되어 무언가로라도 기능할 수 있다는 게 참 자랑스럽다. 난 내 직업이 맘에 든다. 비록 고된 일이지만 값지다. 세상에, 한평생 글만 만지다가 죽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중년에 직종을 이렇게 바꾼다고? 나조차도 새삼스럽다. 난 간호조무사이지만 글을 쓴다. 내 기원이 글이고, 나의 소중한 샘이 문장이다. 그건 바뀔 수 없는 사실이다. 앞으로 계속 노동하며 샘솟는 내 안의 문장들을 여기에다 마음껏 펼쳐볼 것이다.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진실된 그 노동하는 마음. 깨끗한 정신. 사특한 생각이 들어올 틈조차 없는 성실한 생활들. 그렇게 살 것이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커피와 디저트를 시켰다. (웃음) 첫 출근날인데 뭐라도 축하하고 싶어서. 통밀카야버터토스트를 야무지게 씹어먹고 지금은 뜨거운 블랙커피를 마시는 중이다. 글을 쓰는 도중에 회사 과장님한테 메시지가 왔다. 미야쌤, 오늘 첫날인데 고생 많았어요. 내일 푹 쉬고 앞으로 잘 부탁해요. 감사했다. 서툴렀을 텐데도 그래도 잘 이끌어주신 덕에 첫날을 잘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전입신고를 한 첫날에 온 문자를 여러 번 들여다 본다. 최미야 님, 경기도 모 시로의 전입을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그렇다. 난 이제 어느 곳에든 소속된 인간이다. 더이상 떠돌아다니며 붕붕 방황하던 그 내가 아니다. 가슴은 자유롭되, 두 발은 땅에 굳건히 처박고 있어야 한다.


최미야, 잘했다.

너 잘했어.

힘들었지?

많이 힘들었지?

그래도 살아왔잖아.

너 그거 다 견뎌왔잖아.

그런 널 사랑해.

정말, 다시 만난 세계야,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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