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주룩주룩 온다. 2월 14일날 가방 하나 메고 캐리어 끌고 집 나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내일이 출근이다. 이 비는 봄비겠지? 기분 좋은 울림. 비 오는 날을 다시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이 봄비를 맞고 새순들이 통통해졌으면 좋겠다. 출근 전 일주일을 알차게 보낸 것 같아서 기분 좋다. 딸도 보고 친구도 보고. 평온한 시간들이었다. 급격한 변화에 심하게 앓을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가벼운 감기로 지나간 것도 다행이다. 오늘도 엘비스 프레슬리로 시작했다. 첫 담배를 피우며 내리는 비를 멍하니 쳐다보는데, 뿌연 하늘이 예뻐보였다. 빗줄기가 굵다. 오늘은 아무런 약속도 없고, 집에서 조용히 향초를 켜놓고 쉴 것이다. 아침에 엄마한테 전화를 했는데 이모들이랑 온천에 다녀오셨다고 했다. 엄마는 이모들에게 내 독립 사실을 말했다고 했다. 잘됐다고 격려가 돌아왔단다. 엄마랑 사이가 편해지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가출했을 때 나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도와주셨던 그 언니가 그랬다. 당신은 스스로 해낸 거니 걱정 말라고. 나는 혼자서 이 많은 걸 감행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생각한다. 엄마, 아빠, 아는 지인들, 그리고 내 딸. 나를 지지해 주던 사람들. 나는 그냥 지금부터는 버티기 모드로 들어가려고 한다. 새로운 직장이 어떤 환경인지 전혀 모르는 지금 상황에서 나는 그저 잘 버티고 싶다는 생각밖엔 없다. 이번 주 토요일에 병원에 상담하러 간다. 첫 출근 주를 잘 보내고 가는 첫 상담이라 의미가 깊을 것 같다. 세상 저편에서는 전쟁이 났다는데 나는 이렇게 평온할 수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의미도 없이 그저 개죽음으로. 숙연하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물론 난 알고 있다, 단지 운이 좋아서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을. 그런데 오늘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날 두고 하는 말을 들었다. “더 강한 자들이 살아남는다.”
그러자 내가 미웠다.
나는 더 강하지도 못하고, 그저 생이, 시간이 허락한 구간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다. 단지 운이 좋아서 그렇다. 내가 내 의지대로 아무리 살아보려고 발버둥쳐도, 죽음이 내 목숨을 거둬가려고 마음을 먹어 버리면 난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 난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좀 더 정신 차리고 살려고 하는 거다. 내게 허락된 시간에 감사하며, 오늘도 살아갈 수 있음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 단 번에 끝날 수 있는 파리 목숨이라는 거 안다. 그러기에 치밀하게, 치열하게, 하루 하루 새 아침에 기뻐하며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이다. 내가 쉬는 숨, 내가 보는 광경들,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하는 일, 모든 것을 사랑해도 부족한 시간. 시간. 소리없는 살인마.
가끔은 이 시간이 영원할 것 같아서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을 때도 있다. 웃기다. 세상에 던져진 이상 영원한 건 없는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겸허하고, 좀 더 낮은 자리에서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인생의 유한함을 깨닫고,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찰나를 영원처럼 살아가는 것. 잘 곳이 있고, 일할 곳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인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 만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것. 그것밖에 없는 것 같다.
매시브 어택이 그랬다. 사랑은 '행동하는' 단어라고. 말뿐인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내 모든 사랑을 가진 내 딸을 향해 나는 행동한다.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나에게 남은 마지막 순수한 사랑. 내 딸을 향한 사랑. 그것을 지키려 나는 행동한다. 물론 나는 살기 위해 돈을 벌지만, 이 하찮고 볼품없는 몸뚱이를 죽게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지만, 나는 확고하고 분명한 사랑이 이 세상에 단 한 명 존재한다. 한없이 바라봐도 좋을 내 단 하나의 빛나는 별, 내 딸. 가끔 내 스스로 살기 싫어질 때 나는 내 딸을 생각하고 행동하겠다. 좀 더 굳세지겠다. 나는 이미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 별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사는 내가,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으리.
가끔은 몸서리쳐지게 무서운 삶. 도저히 살아낼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 검은 한숨이 입에서 뿜어져 나온다. 걷히지 않을 것 같은 장막,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늪에 빠진 기분. 주변엔 안개가 자욱하고 하늘은 시커멓다. 당장에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구름은 잔뜩 화가 나 있다. 아무것도 없는 대지 위에 나 혼자 우뚝 서 있다. 스산하고, 춥고, 곧 쓰러질 것 같다. 그런 메마른 대지를 나는 터벅터벅 걸어간다. 가다 보면 푸른 초목이 있겠지. 시냇물이 있겠지. 내가... 내가. 내가 머무를 곳이 있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간다. 이제는 조금 의연해질 때도 되었다. 인생이란 놈에게. 내 맘대로 되는 건 거의 없다. 모든 것은 인연 법칙에 의해 흘러간다. 인과에 의해 흘러간다. 있을 법하니 있고, 없을 법하니 없다. 나는 오늘도 희망을 품는다. 간다. 걷는다. 산다.
점심으로 채끝스테이크를 먹었다. 먹고 나니 살 것 같다. 혼자 살아보니 먹고 싸고 자고가 진짜 인간의 기본이라는 생각이 확실히 든다. 그거 세 개만 제대로 해도 삶은 그런대로 굴러가는 것 같다. 출근하면 점심저녁을 모두 직장에서 먹을 것 같은데, 꼭꼭 챙겨먹으리라 다짐한다. 약도 잘 챙겨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출근 전 마지막 하루, 잘 보내봐야겠다. 전남편에게 딸이 집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오자마자 전화를 할 것이다. 그것만 기다린다. 엄마 내일 첫 출근이야, 딸. 열심히 돈 벌어서 우리 딸 맛난 거 사줄게. 사랑해.
살아남은 자의 슬픔.
살아남은 자의 기쁨.
나는 살아남은 자.
고로 이 생의 가치를 통렬히 깨달아야 하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