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잠이 깼다. 너무 피곤하면 잠도 안 오나 보다. 꿈속에서 나는 계속 환자분들의 침을 빼고 있었다. 살 안에 콕콕 박혀 있는 침을 쑥 빼내는 기분은 이상하리만치 좋다. 간혹 가다가 발침을 할 때 아파하는 환자분들이 계신데, 나는 최대한 빨리 안 아프게 빼려고 노력한다. 이제 액팅(발침, 물리치료, 부항 등)은 어느 정도 손에 익어서 혼자 치료실 베드 안에 들어가 하는 것은 익숙해졌다. 환자와 나만의 공간 안에서 짧게나마 인사하고 의료행위를 하는 일은 그닥 나쁜 일은 아니다. 아프다고 호소하시는 분, 발냄새가 진동하는 분, 조용히 상냥하게 치료를 받는 분 등, 환자 유형은 참 다양하다. 바쁠 때는 정말 환자 이름이나 특징까지도 기억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그래도 난 최선을 다해서 환자분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같이 서서 왔다 갔다 하루 종일 붙어 있는 동료들에게도 감사함을 아니 느낄 수 없다. 동료들이 없다면 난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같이 진료 준비를 하고, 마감을 하고, 바쁠 때는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를 돕는 동료들. 그들과 나누는 짧은 대화들. 누군가 그랬다. 나도 별로고 남도 별로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난 그 반대다. 난 언제나 인간의 선함과 다정함을 믿고, 어떻게 해서든 그들에게서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기대하는 게 아니다. 그냥 사람에게서 가장 좋은 면을 바라보려고 하는 게 뭐 나쁜 건가. 너도 좋고 나도 좋아. 우리 모두 좋아. 난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편하다.
문득 나는 작은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인생일지라도, 난 지금 뭔가 써내려가고 있다. 내가 하는 일,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느끼는 감정들 전부에게서 뭔가 작은 의미라도 찾고 싶어 한다. 오늘은 쉬는 날. 퐁당퐁당 쉬니까 평일에 관공서나 병원에서 처리할 일들을 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오늘은 약국에 약을 찾으러 가야 한다. 내가 옮긴 정신과에서 기존에 먹던 약이 내부에 없어서 병원 바로 밑의 약국에 처방전을 들고 가서 받아와야만 한다. 정신과 선생님은 내가 먹는 약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 또 강조하셨다. 5년 만에 병원을 성공적으로 바꾸고 약을 처음으로 일주일 치 타왔다. 대학병원 교수님은 약 타주는 기계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오히려 개인 의원에서는 이것저것 생활도 물어보시고 내 기분도 살피는 것 같아서 좋았다. 나는 전남편 이야기를 오래 했다. 그래요. 직장 생활도 이사도 아무튼 뭐든 새로 시작하는 게 많으니 자기 자신을 살피는 한 주를 보내세요, 하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정기적으로 하자보수가 필요한 인간이다. 병원에는 꾸준히 이주일 간격으로 다니면서 내 상태를 체크해야 한다. 약은 목숨처럼, 생명수처럼 먹는 약. 맞는 약을 찾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다행이다.
오늘 아침에는 앞서 말했듯 약국에 가서 약을 찾아오고, 점심에는 오랜 친구와 밥 약속이 있다. 쉬는 날인데 할 일이 많아서 정신 없을 것 같다. 며칠 전에 동네 산책을 잠깐 다녀왔는데, 이슬람 사원을 보았다. 그리고 다문화 마켓 같은 것들도 보았다. 외국인이 참 많은 동네라는 걸 실감했다. 집 바로 앞에 우즈베키스탄 식당이 있다고 그때 글에도 쓴 것 같은데, 아직 용기내어 들어가보진 못했다. 항상 외국인으로 바글거리는 그 식당에 홀로 들어가기가 뭔가 저어된다. 바로 앞의 세탁소 아저씨와도 안면을 텄다. 아직 도서관에 못 가본 게 조금 마음에 걸리는데, 나는 새로운 동네에 오면 무조건 도서관 등록을 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어서 그렇다. 조금 용기를 내어 걸어가서 얼른 회원증을 만들어야겠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이 원룸에서, 이 시간에 혼자, 담배를 피우고 글을 쓰고 하는 게 너무 평온하고 좋다. 커피를 사와야겠다.
삶의 푸닥거리들이 참 많다. 사람은 먹고 싸고 자야 하는 존재고, 그에 수반되는 일련의 행위들이 참 많기도 하다. 갈 땐 먼지 한 줌인데 참 살 땐 뭐가 이리 필요한 게 많은지.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들 외에도, 우리의 취향과 우리의 기호를 맞추기 위해 구입해대는 물품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커피와 담배를 제외한 일체의 물품들을 사는 걸 제한하고 있다. 커피와 담배는 무제한 제공(웃음)이지만, 사사로이 쓰는 돈은 절제하고 있다. (퇴근하고 와서 급히 먹는 야식은 제외-웃음) 부디 이 생활이 항상성을 띠어서,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할 땐 정말 기계처럼 움직이는 나 스스로를 본다. 신기할 정도로 일에 집중한다. 일이 끝나면 완전히 일 모드가 오프되고 일상생활 모드가 온된다. 딱히 후회나 씁쓸함을 남기지 않는,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일이라 다행이다. 내가 일하는 한의원이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나, 언제나 환자가 넘쳐서, 일할 거리가 많아서, 나를 쓸모있게 굴릴 수 있었으면 한다. 이런 바람, 귀엽지 않은가.
내가 써내려가는 이 작은 역사들도 내가 죽고 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이야기들이라는 것을 안다. 이소라가 말했듯 삶이 허무해 울어도 지나면 그뿐, 또 잊혀지고 살아간다. 아직 일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고, 모든 것에 적응해 나가는 시기이지만 이 정도면 독립에 반쯤 성공했다고는 봐야 할 것이다. 난 또 고개를 들어 다른 목표를 찾는다. 이제는 버티고, 떠나보내고, 웃는 것. 그뿐이다. 나대로 가는 것. 나대로 푸는 것. 내 오른손 검지에 끼워진 반지의 의미는 목표와 집중력. 난 언제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한다. 그걸 향해 달려나간다. 그러나 나는 천천히 걷다 지나가는 고양이도 보고, 풀잎도 보고, 구름도 본다. 살랑거리며 부는 바람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다. 계절의 감각을 온전히 몸으로 받고, 느끼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내 속에 모든 게 들어있다. 내 작은 역사도 이 내가 써내려가는 것. 나는 필시 안으로 에너지를 모았다가 한번에 증폭시킬 줄 아는 그런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난, 난, 특별한 존재.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난 유일무이한 존재. 나 자신을 아낄 줄 아는,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수많은 방황과 고통이 짓눌러봤자 나는 다시 튀어오를 수 있는 강한 에너지가 있는 사람. 난 유의미한 존재. 그런 사유를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 그렇다.
일하는데 엄마한테 전화를 했더니 너 담배 때문에 힘들지는 않니, 하고 여쭤보셨다. 문득 걱정이 되셨나 보다. 엄마, 나 일할 때는 담배 아예 안 피워. 하고 거짓말을 했다. 사실 점심 저녁을 빨리 먹어치우고 나가서 연거푸 세 대를 피우고 온다는 말은 못하겠다. 양치를 하고, 핸드크림을 바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복귀한다. 일이 미친듯이 힘들어도 담배는 포기 못하겠다. (웃음) 그래도 버틸 만하다. 엄마는 3월 셋째 주에 내 딸 면접교섭 때 우리집에 올라오는 걸 고대하고 계신다. 고춧가루와 된장, 식재료를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오실 것 같다. 우리 엄마는 어릴 적부터 나에게 엄한 동시에 관대했다. 그녀의 사랑이 어떤 식으로든 내게 축복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이제서야. 나는 그녀의 친딸. 그녀의 아픈 손가락. 세상 누구보다도 더 큰 기쁨을 주는 동시에, 세상 슬픈 일을 떠다넘긴 불효녀. 하지만 그녀는 희망을 노래하는 종달새의 원조. 가끔은 히스테릭하고 가끔은 노이로제 걸릴 것처럼 집착적으로 굴지만, 나란 존재가 대체 어디서 왔겠는가. 나의 본은 그녀. 그녀의 배 안에서 잉태된 존재가 바로 나이기에. 나는 그녀가 무병장수하길 원한다. 멀리서나마 지켜봐줘, 엄마. 사랑해.
한 푸닥거리 잘하고 왔다.
오늘도 한 페이지 썼다, 내 작은 역사를.
앞으로 써내려갈 페이지가 얼마나 남은지는 모르겠지만,
꽉꽉 눌러담아서, 내 진심을 담아 쓸 것.
희망을 노래하는 종달새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