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처음으로 딸이 우리집에 왔다. 돼지수육을 삶고, 미역국을 끓이고, 김치와 밥을 준비해서 식탁에 내놓았더니 잘 먹는다. 한 달 만에 처음으로 해 먹는 집밥이었다. 엄마도 오셨다. 엄마는 오자마자 우리집 베란다와 화장실 청소를 거하게 해주셨다. 곰팡이가 이게 뭐니! 하면서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청소하는데, 세상에, 청소요정인 줄. 가져오신 이불을 깔고 셋이서 나란히 누웠는데 마음이 너무나도 평안한 것이다. 이제야 내 독립이 완성된 느낌이었다. 딸은 우리집이 낡고 좁은 원룸인 게 하나도 거슬리지 않는지 우다다다 뛰어다녔다. 쫑알쫑알 말도 잘하고, 엄마 화장실이 왜 이렇게 작아? 이런 말도 했다. (웃음) 딸이 잠들고 엄마랑 한참 대화를 했다. 가운데에 누워서 뒹굴거리며 자는 딸을 서로 쓰다듬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 체력이 받쳐주고, 경제력이 되고 해야 이 모든 생활도 가능한 거라고 했다. 알고 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문득 내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으며, 나는 잘 선택했고, 또 잘 걸어가고 있다는 그런 가지런한 느낌. 무엇보다도 이 낡은 집에 딸이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느꼈던 것 같다. 난 옳았으며, 나중을 위해서도 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앞으로도 무수히 증명해 내야겠지만 당장은 만족감이 크다. 지금 딸은 수영하러 갔고 나는 집에서 청소를 하고 샤워를 하고 글을 쓴다. 점심밥을 먹고 키즈카페에 갈 예정이다. 딸이 이 좁은 집에 오는 바람에 집은 난장판이 되었지만 (웃음) 그래도 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좋다. 우리 딸. 우리 딸은 어쩜 이렇게 아름답고 작은 별일까. 어딜 가든 환하게 날 비춰주는 딸. 그 애로 인해 나는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된다. 밝아진다. 좀 더 부드러워진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몹시도 그 애를 사랑하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 데 5년. 딱 5년이 걸렸다. 일상을 회복하고, 경제력을 회복하고, 체력을 회복하고, 정신을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이 무려 5년. 참 많이도 힘들었다. 많이도 아파했다. 그 시간들도 내 거름이 되겠지만 정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다. 세상에, 아직도 살아남아 여기에 있다니. 신기하다. 아직도 이렇게 살아남아, 살아남은 자의 희노애락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니. 참, 딸이 오고 처음으로 냉장고 전원을 연결했다. (웃음) 냉장고 소리가 이렇게 큰지 몰랐다. 그래도 뭐라도 넣어서 있을 수 있으니 좋은걸. 사람사는 냄새가 좀 폴폴 풍기는걸. 집안에 어제 수육 끓이는 된장 냄새가 팍 퍼졌을 때, 나는 뭔지 모를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아, 여기도 사람이 있어요. 여기도 사람 살아요, 하는 느낌. 여기 사람 있어요! 살고 있다고요.
내가 이번에 가게 될 과는 정신건강의학과다. 내게 정말이지 익숙한 곳. 내가 언제나 가고 싶었던 곳. 내가 간호조무사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처음부터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 나는 단번에 합격한 것이다. 원장님 두 분이서 면접 내내 싱글벙글이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든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나는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게 틀림없다. 기대에 부응해서 열심히 일해야지. 나는 근태가 좋고 뭐든 수용하는 편이니 빨리 배우리라 생각한다. 직장이라는 게 참, 어딜 가나 빌런이 있고 이상한 점들이 있겠지만,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과에, 원하는 곳에 들어가는 것이니 열심히 해보리라 생각한다. 오래 오래,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일하는 양극성 정동장애 환자이자 간호조무사인 나. 좀 특이하지만. 그래도 뭐, 약 열심히 먹고 있는 걸. 목숨처럼 먹는 약. 하루라도 거르면 안 된다. 일단 부딪혀 보는 거지, 뭐.
첫 출근 전에는 친구들도 만나고 여러가지 일들을 하면서 휴식할 거다. 미뤄뒀던 드라마도 다 보고, 책도 다 읽고, 마음껏 좋은 날씨에 산책도 하고. 딸은 또 한 달 뒤에야 만날 수 있겠지만 그 시간을 기다리는 시간조차 즐겁다, 이젠. 가까이에 있으니까. 딸이 내가 가까이에 산다고 좋아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우와, 엄마집 엄청 가깝다! 하고 놀라는 딸의 얼굴. 엄마가 그랬다. 너가 안정적으로만 생활하면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그 말이 좀 무섭긴 하지만, 두렵긴 하지만, 그래도 도전해 봐야 할 것. 노력해 봐야 할 것. 아니, 반드시 이뤄내야 할 것. 이제 차선책은 없다. 무조건 앞으로 달려야 한다. 지금이 그때다. 가장 힘을 내어 달려야 할 구간이다. 얼마 남짓 쌓아왔던 내 경험으로부터의 지혜와 지식과 모든 사유와 사색들과 감정들과 에너지들을 다 끌어다 모아 폭발적인 힘을 내야 할 것이다.
길은 이제 정해졌다. 지금은 그냥 가면 된다. 그냥, 가면 된다. 묵묵히, 뒤돌아볼 것도 없이, 미련도 후회도 없이, 그냥 쭉 가면 된다. 나의 40대는 이렇게 흘러갈 것이다. 어떤 고난이 찾아와도 견딜 것이다. 방향은 잘 잡았다. 정말, 이제, 그냥, 가면 된다. 거리낌이 없다. 마음에 불안한 게 없다, 이제. 곧고 높고 깊고 고독한 이 길을 나는 부단히 걸어가야 할 것이다. 딸의 손을 잡고, 무지갯빛 비를 맞으면서, 때로는 가시덤불도 있고 물웅덩이도 있겠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는 장미 한 송이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걸어가는 고양이의 엉덩이를 바라보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그렇게 걸어가는 거다. 난 지금 웃고 있다. 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