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상처들. 방황들. 이혼. 이혼 후의 나. '그'가 나에게 알려준 담배. 말보로 블랙후레쉬. 섹스의 기억. 웃음. 다정함. 이별. 또 만남. 그리고 또 이별. 실직과 재취업, 이직. 다툼. 불화. 목이 터져라 울었던 것. 모든 것들은 내 마음에 새겨져 있다. 난 몸에 타투는 없지만 마음의 타투가 많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다 내 자양분이 될 수 있었던 것들. 정신병동에서 입원했던 것. 꽃을 들고 찾아온 '그'. 딸과의 이별. 그 애의 성장을 멀리서 지켜보던 나. 밤새 그 애의 사진을 보면서 울었던 것. 마흔둘이 되니 마음속에 새겨진 아픔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난 무너지지 않았다. 망가지지 않았다. 다시 일어서서 걷고 있다. 그래, 걷고 있다.
매순간 마지막인 것처럼 살 것. 이 순간이 찰나라는 것을 인식하고 살 것. 다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할 것.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철저히 깨닫고 살아갈 것. 내가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후회일랑 접어두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만 생각할 것. 그래야 한다. 20대에 철모르게 결혼했고, 30대에 아이를 낳고 또 철모르게 이혼했다.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난 그래야만 했다. 운명은 믿지 않지만, 난 내 선택을 믿는다. 내 경험을 믿는다. 난 결혼하고 행복했던가? 9년에 육박하는 생활 동안, 나는 전남편과 많이도 싸웠다. 더이상 서로의 망가지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이혼하자고 했고, 결국 나는 혼자가 되었다. 이 모든 스토리가 어딘가에 쓰여져 있는 것이고, 사실 정해진 거라면, 그랬다면 마음이 더 편해질까? 난 결코 운명을 믿지 않는다. 내 찰나의 선택에 바뀌어지는 것이라 믿는다. 난 아직도 이혼이 아픈가.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전남편에 대한 사랑은 없는데도. 난 아직도 방황하는가. 독립까지 한 마당에, 아직도 방황하는가.
아니, 나는 더이상 아프지 않다. 방황하지도 않는다. 내가 내린 결정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아픔, 그 방황들은 내 마음속에 타투처럼 새겨져 있다. 마음에 바람이 불 때면 그것들이 좀 시리겠지만, 괜찮다. 괜찮다, 내 이 모습. 내 꼴. 내 사는 모양이 괜찮다. 이 정도면 만족한다. 더 바랄 것도 없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세상 고민 혼자 짊어지고 사는 사람처럼 고민하기도 싫다. 난 항상 명랑하고 싶다. 항상 밝게 지내고 싶다. 희망을 보고, 낙관하고, 긍정적인 부분을 발견하고 싶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폄하하고 싶지 않다. 다 이유가 있어서 사랑했고, 이유가 있어서 헤어졌다. 그들을 깎아내리고 싶지도, 올려치고 싶지도 않다. 사랑했다. 후회 없다. 후련하다. 이제야 마음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엔 상처받은 기억 때문에 애써 사랑했던 것 자체를 부정하려고도 해봤다. 근데 그게 더 아팠다. 사랑했는데 어쩌겠어. 사랑했는데. 이전 사람들을 다 사랑했어. 후회 없어. 다 시절인연이었고, 이젠 난 뒤돌아보지 않을 거야. 그냥 내 마음에 담아두겠다. 내 마음에 각인해 놓겠다. 좋았던 기억들, 아팠던 기억들, 상처받고 상처 준 기억들. 다 전부 담아둬야지. 없애려고도 하지 말고, 애써 잊으려고도 하지 말고. 어느날 문득 떠올렸을 때 희미한 미소만 지을 수 있다면 만족한다.
'그'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좋은 기억만 남기자고. 정말 마지막 메시지다. 최종의 최종. 최최종. 끝. 내일은 만우절, 내 첫 출근날. 기념비적인 날이다. 내일은 내 첫 출근이자, '그'에게서 벗어난 첫날이자, 내가 원하던 과에 출근하는 첫날이자, 내가 좋아하는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의 생일이다. 여러모로 특별한 날인 내일을 축하하며 나는 내일 7시 퇴근 이후 맛있는 걸 먹을 예정이다. (9시 30분 출근, 7시 퇴근이다) 이번에 10일 정도 쉬면서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더니 정말 답답했다. 차라리 일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뭔가 사유하고 사색할 시간도 없었다. 출근 전날이 되니 좀 각성이 되는 것 같다.
내가 했던 모든 것에 걱정하지 말 것. 매순간을 마지막처럼 살 것. 대신 잊지 말 것. 내가 아파하고 방황했던 시기가 있었음을, 그걸 견뎌낼 강한 힘을 가졌다는 걸. 잊지 말 것. 난 기어코 일어나는, 기어코 이겨내는, 기어코 치유해 내는 힘을 가졌음을, 잊지 말 것.
안다, 세상 녹록치 않은 거.
안다, 세상 쉽지 않은 거.
안다, 세상 험난한 거.
하지만 내가 더 강하다.
난 보기보다 체급이 남달라.
그 지난한 고통도 견뎌왔어.
난 할 수 있어.
나는 나 자신을 믿는다.
마음의 타투에 숨 한번 불어넣고, 보듬어 본다.
가는 거다, 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