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히 안착.

by 최미야

정신건강의학과로 이직한 첫 주, 4일차 출근을 마무리하고 주말이 왔다. 나는 월화수금은 오전 10시~오후 7시 일하고 토요일은 오전 10시~오후 1시 이렇게 4.5일 일한다. 며칠 일해보니 알겠다. 여기가 나와 가장 맞는 과라는 것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얼마 되지 않았지만 비행기로 따지면 무사히 이륙한 듯한 느낌이다. 이제 여정이 시작되었으니 열심히 날아오를 차례다. 나 역시 마음의 병을 앓고 있으므로 환자들이 대충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갔다. 울면서 나오는 환자, 약에 까다로운 환자, 과도하게 긴장하고 있는 환자 등, 나는 새삼 마음 아픈 사람들이 참 많다고 느꼈다. 어제는 3일 연속으로 일해서 그런가 많이 피곤했는지 9시 30분에 곯아떨어졌다. 다음 주부터는 월화수 일하고 목요일 하루 쉬고 금토 일하니까 더 나을 것 같다.


참, 오늘은 이스라엘에서 온 환자분이 오셨는데, 직원들 중 유일하게 내가 영어를 할 줄 알아서 안내를 도와드렸다. 별거 아니었지만 동료들은 칭찬해 주었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영어로 안내를 도와드려야 할 환자분이 오실 때를 대비해서 회화 연습을 좀 더 해야겠다. 출퇴근 시간도 이해할 만한 거리라 좋다. 차라리 지하철로 이동하니까 출퇴근하는 것도 실감도 나고 해서 좋다. 같은 고생을 하는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전장으로 나가는 기분이랄까,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동지애같은 게 느껴진다. 오늘은 환자가 많아서 1시 20분쯤 퇴근했다. 집에 와서 밥을 시켜먹고, 빨래를 개고, 좀 쉬다가 겨우 자리에 앉아서 Tears For Fears를 들으며 글을 쓴다.


이 텐션 그대로 10년이고 일하고 싶다. 나중에 뭐 이직하고 싶어질 때가 오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충분히 경력을 쌓고 더 나은 대우를 해 주는 곳으로 가고 싶다. 당장은 약물 종류를 외우고, 접수하는 것도 배워야 해서 할 게 많다. 다행히 동료분들과 실장님이 잘해 주셔서 한시름 놓았다. 아무래도 마음적으로 힘드신 분들이 오시는 곳이라 다들 차분하다. 차분하고 손이 빠르지 않으면 못한다. 변수가 생겨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는 게 중요한 부분 같았다. 정신건강의학과로 과를 바꾼 건 정말 잘한 것 같다. 나한테 맞다. 이제야 안착한 느낌. 이제야 제 일을 찾은 느낌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처음 집을 나와서 어둡고 춥고 좁은 모텔방에 있던 나를 생각한다. 대책도 없고, 돈도 없고, 직장도 없던 때. 가지고 나온 건 가방 두 개와 캐리어 하나. 몸뚱어리 하나뿐. 그때 생각하면 지금은 정말 많이 나아졌다. 집도 직장도 돈도 없는 상황에서, 집도 생기고 직장도 다니고, 돈도 들어오고 하니까 정말 살 것 같다. 내일은 소개팅 가는 날. 주문했던 옷이 다 왔다. 신발은 배송이 늦어져서 어제 동네 옷가게에 가서 노란색 로퍼를 하나 샀다. 연두색 치마와 흰색 반팔 니트, 연보라색 가디건, 노란색 로퍼를 신고, 미용실에 가서 드라이를 하고, 화장도 하고 갈 것이다. 내일 저녁 일정이라 좀 피곤할 것 같긴 한데, 시간이 그래서 어쩔 수가 없다. (로테이션 소개팅에 참가하는 여자들 중에 내가 유일하게 80년대 생이다) 세상에, 집 나와서 방황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소개팅까지 나가는 여유라니, 이것 무엇? 푸하하.


다행히 나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고 있고, 잘 견뎌내고 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좀 외롭고 심심해도 버티는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음악 들으면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글을 쓰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마냥 쉴 때는 몰랐었는데 순간순간이 정말 피같은 시간이었다. 요즘 밀도 있는 글을 못 쓰는 것 같아서 좀 아쉽긴 한데, 그래도 삶의 기록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문장이 소중하다. 좀 어설프고 그래도 지우지 않을 거다. 엊그제 이직 첫 날 퇴근하고 오는데 엄청 외롭고 심심하고 힘들었다. 아는 언니에게 물어봤더니 버티기도 하고 즐기기도 하라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떤 언니는 시간이 자기를 집어삼키는 느낌이라고 했는데, 아직 그런 생각은 안 든다. 그냥 마냥 혼자 사는 이 시간이 즐겁고 그렇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 만하다고 느낀다.


오늘은 출근하면서 즐겁다는 생각을 했다. 돈 버는 데 무슨 재미를 찾냐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적성은 맞아야 뭘 할 것 아닌가. 난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일하는 게 즐겁다. 나와 같은 환우들을 대하는 것도 좋다. 나부터가 환우니까, 그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 벌써 정신과 다닌 지 11년차, 왠만한 곳은 다 가봤다. 개인의원부터 시작해서 심리상담 치료, 대학병원, 입원까지 안 해 본 게 없다. (우리 병원 원장님이 너무 좋으셔서 우리 병원에 다니고 싶은데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환우의 입장에서 정신과를 겪고, 또 간호조무사의 입장에서 정신과를 겪으니 또 새롭게 보인다. 다들 간절한 것이다. 약 먹고 얼른 나아지시길. 세상의 모든 정신과 환우들이 약 먹고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좋겠다.


아직도 네 시 반이다. 너무 좋다, 이 여유가. 토요일 일요일 흠뻑 즐기고 또 열심히 일하러 월요일에 출근해야지. 뭐 때문에 열심히 사는 건지 나도 모른다. 돈 때문도 아니고 딸 때문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나 자신을 위해. 나의 이 끓어넘치는 생명력이 나를 움직인다. 희망이 나를 움직인다.


요즘 사는 게 재밌다.

이럴 때도 되었다.

재밌어.

사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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