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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y Oct 20. 2024

독서모임 소유냐 존재냐 (Erich Fromme)

나는 언제 존재론적 실존양식을 따르는가?

추천자, 발제자, 진행자 : 아이스크림(추천자, 발제자)

토론도서 : 소유냐 존재냐 _ Erich Fromme

참석자 :  아이스크림, moooony, 미써니, 박선희, 수빈, 자유영혼, 들꽃향기 7명


이 책은 대학 때 읽은 이후로 한참이 지나서 다시 읽게 된 책입니다. 독서모임을 위해서 책을 다시 읽으면서, 대학생 당시에 내가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문맥으로 다가오는 책을 보면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달라져 있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독서모임을 통해서 사랑의 기술을 읽게 되었고,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까지 읽게 된다면 저자의 3대 대표 서적을 다 읽게 될 것 같습니다. 올해 이 3가지 책 읽기를 목표로 세웠다는 분의 얘기를 들으면서 좋은 생각이라는 올해가 가기 전에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에 대한 초반 서문을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과 사상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뻗어있는지를 다시 한번 느끼면서, 1976년의 시대에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사회학적 측면과 심리학적 측면을 통해서 소유와 존재라는 실존양식에서 찾았고, 그 해결책으로 개인과 사회의 실존양식의 변화를 제안했다는 부분에서 감탄했습니다. 50년이 지나가는 현시점에서도 여전히 나는 소유적 실존양식에 치우쳐서 살아가고 있고, 내가 속한 사회는 여전히 브레이크 없는 전차처럼 각자의 소유적 실존양식에 매몰되어 기쁨(Joy)이 아닌 쾌락(Pleasure)의 추구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의 변화도 과감한 경제적, 사회적 변혁이 일어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이 외부의 변화가 인간 자체에 변화할 기회를 주며, 변화를 이루는 데에 필요한 용기와 상상력을 부여할 것이다. (P27)

총평을 통해서 책에 대한 간략한 인상을 얘기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내가 읽었던 소유와 존재의 이분법이 너무 작가 작위적(소유는 나쁘고, 존재는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그 구분법을 세세하게 구분하고 싶지 않았던 점을 얘기했었는데, 전혀 다른 독법을 보여준 총평에 마음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눈앞에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조건의 위협이 있지만, 급박한 위험으로 느끼지 않고, 우선순위에서 미뤄두고 지금 당장 눈앞의 생활만 중요시하게 생각한다는 부분과 모든 행위에서 나의 존재론적 실존양식에 맞춰서 행동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자기 성찰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원하는 지점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유를 제외하고 나를 드러내는 것이 어렵다'라는 말에서 현재의 나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나의 삶을 다른 사람의 삶과 비교하고 그로 인해서 열등감 또는 우월감을 느끼는 모습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열등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 자신감 있고, 더 자기 삶을 생각하는 데로 살아가는 사람들, 삶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언행에서 일치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지지 못한 당당함을 부러워하고 열등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전형적으로 내가 가진 것과 타인의 가진 것을 비교하고 우월감은 안도로, 열등감은 불안으로 표현되는 소유적 존재양식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탐욕이 소유적 실존양식의 필연적 결과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책에서 소유와 존재를 구분하고 삶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살펴보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고, 모든 사람은 소유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소유가 비천하고 좋지 않기만 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소유라는 것을 먹는다는 것에서 그 원천을 찾는다는 말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소유와 존재가 모든 사람들에게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게 사실이겠지만, 어떤 존재양식에 더 무게를 실어 줄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이고, 그 개인의 선택이 만들어내는 사회의 기준과 규범일 것입니다. 또는 선후가 그 반대일 수도 있게ㅛ습니다.


농경사회, 계급사회, 경쟁사회를 거치면서 인류의 생존은 소유를 더 많이 하는 것에 무게를 싣는 사회기준과 규범을 가져왔다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에 소유로 인한 더 많이 갖고자 하는 노력은 탐욕이라는 욕망을 만들어냈고, 그 욕망은 경쟁적 사회발전의 추동력이 되어왔다는 것도 대화를 통해서 이해하게 된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대화 속에서 탐욕을 제거한다면 인류는 나태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조금 대립적인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지금까지의 경쟁적 사회발전은 소유라는 실존양식에 무게추를 더 실리게 됨으로 나타나게 되는 자본주의적 사회체계에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라는 방식의 새로운 시도를 진행했고, 기존의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은 성공했지만, 새로운 실존양식을 구축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 공산주의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해석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설명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소유에서 나오는 끝없는 탐욕의 심층에는 불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에 발생할 어떤 일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소유적 욕구가 발생하고 그 욕구는 또다른 불안에 의해서 추가적으로 촉발되고 상호작용을 이어나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도록 사회적 성격을 형성한다는 부분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소유적인 방식과 존재적인 방식을 얘기하신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많은 것을 읽고 지식을 얻기 위한 책 읽기가 아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나가는 것과의 대비에 공감 가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세대들 간의 House Poor VS Car Poor의 논쟁에서 카푸어를 과시로 소유론의 예시로 든 것도 신선하고 재밌었던 것 같습니다.


부지런함이 자본주의의 세뇌에 기반했다. 사람은 생래적으로 이기적이다에 반하는 예시가 어머니의 아이에 대한 헌신과 경쟁상대가 아닌 아이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은 친절하다는 예시를 들었습니다. 유튜브에서 화장품의 기호가 21호(가장 밝은 톤)에서 새로운 스타들의 피부톤에 따라서 다른 라인들이 더 팔리게 되는 것들은 개인이 사회에 의해서 영향받고,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가 사회의 기준과 규범에 의해서 선택되는 예시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적극 공감되는 지점이었습니다.


루틴에서 벗어나는 불안에 대해서 얘기했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책 읽기를 과도하게 모든 추천책을 읽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책 읽기의 강박까지 느꼈다는 부분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틀림없이 소유론적 독서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도 소유론적 존재양식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칠지에 대한 신경과 고민을 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실질적으로 내가 사회에서 잘 어울리기 위한 중요한 생존방식이기도 합니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내 삶에 대한 통제권을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자신감 없는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훨씬 많은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소유한 것에 대한 불만족과 그로 인한 미래의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책을 읽고 토론을 진행하다 보면, 사회의 부조리, 잘못된 방향에 대해서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식 이후의 행동으로 가는 과정은 더 긴 고민이 필요합니다. 나는 현재의 나의 삶에서 편안함과 안락을 찾고 있습니다. 그 안락과 편안함의 일부분 또는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사회의 올바른 방향으로의 사회적 활동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정치에도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타인의 안일함에 대해서도 경종을 울리고 이 방향이 맞다고 주장하고 이끌어야 할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고 현재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강합니다. 이런 나와 다르게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과 그 언행일치에서 오는 당당함이 부럽기도 하고, 내가 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위축감과 자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이번 독서모임 뒤풀이에서 들었던 위안은 수없이 많은 고민을 통해서 진실을 찾고자 노력했고,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내가 알게 된 것을 실천하기 위한 결정을 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이고, 각 개인의 결정에 대해서는 존중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은 조그마한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열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갖고 폐쇄적이 아닌, 열린 시각을 갖는 것에서 나의 존재론적 행동양식을 찾아가는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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