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소설을 낯설게 만들어 주는 모임
르네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은 읽으면서 즐거웠고, 독서모임에서는 또다른 새로운 관점들로 책을 되짚어볼수 있어서 더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책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분의 발제는 넓은 배경지식에서 나오는 관점의 확대에서 부러움을 느끼면서 감탄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모임은 저자인 츠바이크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작가가 쓴 여러가지 작품에 대한 비교 설명을 통해서 '발자크 평전'에 대한 인상이 조금은 달라졌던 것 같습니다. 츠바이크가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1900년 초반의 황금기의 빈에서 성장하면서 광범위한 인문적 지식을 가졌던 유럽 코스모폴리탄이라는 설명에서 츠바이크에 대한 대략적인 인상이 그려져서 좋았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망명했다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전쟁 이전의 유럽의 황금기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인식으로 잃어버린 세계를 그리워하며 현 세계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별을 고했다는 얘기, 소장했던 책을 유럽에 두고 와서 기억에만 의존해서 썼던 작품들의 얘기에서 츠바이크라는 또다른 천재의 일면을 알 수도 있었던 것이 재밌었습니다. 또한, 츠바이크가 썼던 '마리 앙투아네트',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어제의 세계' 등의 작품들에 대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이번의 발자크 평전에 이어서 츠바이크가 썼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츠바이크 평전의 특징으로 시대 순의 얘기가 아닌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중심으로 한 예리한 심리분석과 인물의 결정적 순간을 확대해서 보여줌으로써 그 인물에 대한 입체적인 특성들을 드러내 주는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관심을 갖게 합니다.
2시간 동안의 얘기들은 주제별로 완결성이 있는 토론이었다기 보다는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이라는 책을 통해서 츠바이크와 발자크라는 두 천재를 이해하는 각자의 생각을 공유하는 방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첫번째 주제가 발자크란 어떤 인물인가? 였습니다.
발자크를 떠올리면, 부모 사랑을 못받았고, 수없이 많은 사업실패를 했고, 자기애는 강한 모습에서 기초가 없고, 답답했다는 인상으로 얘기는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분은 그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시대 상황을 알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산업혁명 부흥기, 사회적 동요, 격변기를 주목해서 발자크의 욕구와 욕망이 사회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작품세계에 대한 발자크의 열정과 원하는 데로 살아본 '혁명가'라는 판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극강의 낙천주의자이면서 천재라는 인상과 함께, 작품의 동인이 결핍, 실패와 열등감이라는 말과 극강의 'F'라는 평가, 타인을 도구화하고 이용하려다가 이용당하는 모습을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김영하 작가가 평가한 발자크는 '조증'이라는 말에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작가라서 낯설었고, 심리적/시대적/환경적 문제를 포함하고 있고, 속물인 듯 하지만 내적 갈등이 높은 사람처럼 느껴졌고, 2개의 본성을 가진 듯하고, 사실은 생각도 많고, 갈등도 많은 사람 같았고, 휴식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고, 돈과 귀족을 쫓는 사람이라는 말씀 등을 해주셨습니다.
두번째 주제는 츠바이크의 서술 방식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인물의 복잡성을 살폈다는 말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파리에서 받았던 평가와 그림/사진에 대한 오해를 개선시키는 방식으로 평전이 소설처럼 쓰였다는 말을 했습니다. 역사적 사실도 선택하는 것이고, 작가는 개인적인 '호오'를 자신의 작품에 쓸 수 있는 것이라는 부분에 공감합니다. 작가의 평가가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어야 할 것 같고, 자기 생각을 가미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던 것 같습니다. 자기 투사가 반영되지 않은 서사는 맞지 않다는 의견과 함께, 츠바이크만큼 발자크에 대한 연구를 한 사람이 하는 말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제목에서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이라고 썼다는 부분에서 저자의 주관적 의견이 많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해석은 설득력을 더했던 것 같습니다.
얘기를 들으면서 츠바이크는 왜 이 책을 쓰고 싶어했을까?라는 의문이 떠올랐고, 츠바이크는 발자크라는 사람의 천재성에 매혹되었고, 그런 발자크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받았던 불공평한 평가를 뒤짚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츠바이크는 발자크에 대한 깊은 탐구를 통해서 자신이 갖지 못한 발자크의 창조력에 대한 경이가 쌓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경이를 발자크를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발자크의 작품을 다시 읽어보라고 제안하는 방식이 츠바이크식 발자프 평전의 저작의도였을 것이고, 이 책을 읽고 발자크의 작품을 더 읽고 싶어졌다는 것으로 츠바이크는 자신의 목적에 맞는 역할을 다했다라는 결론에 토론 구성원들이 공감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의 맞고, 틀림도 중요하겠지만, 그 사실의 맞고 틀림에 앞서서 그 사람의 작품과 행위를 다시한번 들여다봐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이 이 평전이 독자에게 전하는 메세지인 것 같습니다.
이에 더해서 츠바이크의 다른 평전에서도 인물의 비난받는 측면과 반대되는 위대성을 찾아내는 장면의 서술과 한 인간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작품이었다는 말에서 츠바이크는 오해받는 사람들에 대한 변명과 단편적인 사람들의 시각에 대해서 다른 시각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츠바이크의 훌륭한 필력으로 쓰여진 츠바이크의 다른 책도 읽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두번째 의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번째 주제는 창작자의 삶과 예술가의 인격적 결함, 혹은 도덕적인 실패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였습니다.
예술가의 작품과 윤리는 분리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의견에 한편으로는 동의가 되면서도 미투운동과 학폭과 같은 사례를 들으면서 피해자가 있는 당대에는 작품을 윤리와 분리해서 보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연계해서 학폭에 대한 처벌이 지금처럼 과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엄격한 것은 예방적 측면과 새로운 합의점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이해하자는 말에서 동의했습니다.
당시의 발자크의 상황에서의 불륜, 연상녀 등은 지금 생각보다 비윤리적이지 않았을 수 있다는 의견과 19세기 중반은 사랑해서 결혼하는 낭만이 없던 시기였다는 것과 스탕달의 '적과흑'에서 나오는 야심있는 젊은이의 신분상승의 방법이 재력가 유부녀와의 관계였다는 예시 등을 통해서 윤리라는 것도 시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측면을 다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시기가 되면 학폭이나 미투와 같은 일들이 그다지 비난받지 않을 수 있는 윤리에 포함될 수도 있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한스카 부인과 발자크의 관계를 '서로가 상대를 관계의 악세사리로 여겼다'는 평가는 명쾌하게 그 관계를 설명했던 것 같습니다. 발자크라는 사람이 세상에 두려움없이 하고 싶은 것을 다했다는 얘기에 대해서 내적 불안과 두려움이 심층에 깔려있었다는 주장을 통해서 다시 발자크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로 얘기가 돌아왔습니다.
'우월감을 품은채 폐쇄적이어서 어머니를 화나게 했다.'라는 문장을 찾아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발자크의 어린시절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상황은 심리학에서 얘기하는 '애착불안'의 증세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확실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평생에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면서 온전한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그 증세가 발자크에게 그대로 나타났던 것은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발자크의 애착불안은 타인과의 원활한 유대관계를 어렵게 했고, 그로인해서 생기는 내적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소설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서 그 세상 안에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전능자로서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발자크에게는 어쩌면 현실세계도 스스로가 만든 소설의 세계관 속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츠바이크의 서술을 통해서 표면적인 사람의 결정에 대해서 판단할 때, 한 사람의 복잡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느냐를 배웠다는 말에서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전체 삶을 이해해야만 가능한 것이고, 타인에 대한 끊임없는 오해속에서 고정관념을 고착화한다는 나의 경향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기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