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공평한가? 츠바이크는 왜 발자크를 선택했을까?
발자크라는 희대의 천재였다는 소설가를 평전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이 어떤 작품으로 유명한지, 왜 그 시대에 그토록 위대한 작가로 알려지게 되었는지, 시대가 지나고 난 이후 그의 작품들은 어느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의 소설 같은 삶은 나의 인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이끈다.
발자크 평전을 읽고 난 이후 기억에 남는 한 문장은 "영원한 채무자, 발자크"라는 말이다. 발자크의 어린 시절은 특별할 것이 없는 숨어서 독서하는 학생으로 보인다. 그런 그가 짧은 50년의 생애동안 네이버에 표시된 640편의 저작을 보면서, 내가 10여 년 동안 읽은 책 보다 더 많은 책을 30여년 만에 쓸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열을 저작에 바쳤는지, 놀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츠바이크는 발자크를 당대 최고의 작가, 최고의 천재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모든 저작들 중에서 실질적인 예술적 소설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몇 권 정도가 될지는 또한 다 읽어보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초창기의 발자크의 소설은 돈을 위한 양판형 소설이었던 것으로 쓰여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발자크는 예술가로서 각성을 하고, 그의 삶을 글쓰기에 갈아 넣은 것으로 보인다. 발자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 평전에서 그려지는 발자크는 쉴 새 없이 쓸 수 있는 상상력, 창조력과 세심한 관찰력에서 독보적인 능력을 가졌고, 건강한 농부의 자식으로 타고난 체력이 강력한 무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보면서 말콤 글래드웰이 유행시킨 '일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과연, 발자크는 많은 글을 쓰면서 능력이 개화한 것일지, 숨겨진 재능이 많은 글쓰기를 통해서 피어난 것인지? 재능이 먼저일지 노력이 먼저일지? 노력과 투여된 시간이 재능을 능가하는 작품을 만들게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발자크의 다작을 보면서 다시 떠올려지는 의문이다. 발자크의 재능이 폭발하게 된 것은 초창기의 양판형 소설의 다작을 통해서였던 것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쪽으로 기운다.
본인의 성공의 원인은 노력으로 귀인하고, 타인의 성공의 원인은 재능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결론은 항상 적절한 재능에 따른 끊임없는 노력이라는 방향으로 향할 것이다. 하지만, 이백과 두보를 비교해 보듯이 끊임없이 되새김질해서 고쳐나가는 노력도 재능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나의 문장을 다듬고 다듬어서 더하고 빼면서 가장 최적의 단어와 문장을 찾아나가는 노력도 또한 끈기라는 재능의 영역인 듯하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발자크의 행동은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나왔다는 문장이었다. 주변의 불행과 고통과는 동떨어진 작품을 쓰는 시간과 공간이 별개의 공간과 정신세계로 나눠져 있는 것 같다는 발자크의 작품활동에 대한 묘사는 그렇게 쓰인 발자크의 작품을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한 가지, 놀라웠던 문장은 발자크의 수정과 퇴고에 관한 글이었다. 한 권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한 퇴고의 과정이 최소 4~5번의 초고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작업을 진행한다는 글에서 다작과 함께 한 작품에 대한 노력은 발자크라는 작가에 빠져들게 만드는 순간 중 하나였다.
발자크가 글을 쓴다는 것은 초창기에는 생활비를 벌고, 빚을 갚기 위한 수단에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하고는 명성을 높이는 목적으로 변해갔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자기의 모든 작품을 아우르는 전집인 '인간희극'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자신의 인생의 소명을 생각했던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나는 왜 글을 쓰는 것일까? 내 글은 몇몇 읽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더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어떤 목적으로 어떤 글을 더 잘 쓰고 싶은지에 대한 목표의식은 명확하지 않다. 발자크 평전에서 나의 글쓰기에 대한 점검을 하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소설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어떻게 글을 퇴고해야 할까? 글쓰기에서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발자크 평전을 읽으면서 한 가지 궁금점은 '왜 발자크의 사업은 왜 계속 실패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이 질문과 함께 바로 떠오르는 답은 조급함이었다. 조직의 혁신을 예를 들더라도 현재의 상황보다 더 떨어지는 시점이 있고,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수행능력이 상승한다. 하지만, 발자크의 사업시도는 항상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준비 기간없이 바로 시행하고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 여유 없음은 소설을 쓸 때의 전능감과도 연결될 것 같다. 소설에서는 1년을 한 줄로 쓸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결과에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발자크는 그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경제적 여력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또한, 발자크에게는 사업의 실패 시에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의 사업이 실패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바로 다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의 재능과 장점이 사업에서는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글쓰기라는 뒷배로 인해서 그의 낭비도 촉발되었을 것 같다.
발자크의 생을 둘러보다 보면 인간사회가 엄청나게 불공평한듯해도 장기적으로는 꽤 평등하게 흘러간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의 강력한 재능이 그 사람이 다른 활동에서는 더 강력한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와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이룬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갖게 되는 상실의 크기에서도 공평함은 연속되는 것 같다. 결국, 모든 사람의 삶이 죽음이라는 공통의 끝을 향해서 가고 있다면,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다양한 삶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또 다른 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책 속의 발자크가 자기 인생의 실패를 예상하면서 결혼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640페이지의 한 사람의 인생을 따라서 살아본 듯한 느낌이 들면서, 내 삶의 방향에 대해서, 내 글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게 되는 계기가 된다.
발자크의 어머니와의 관계, 여성들과의 관계 등에 대한 이해는 크게 공감 가는 부분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 살짝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