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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를아는아이 Nov 30. 2020

운악산

나만의 인생 사전

운악산: 낯선 곳에서의 짧은 봄날 하루.


1997년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서 한 번쯤 실직을 해 보는 것은 어느새 사회생활의 일반적인 경험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처음 하는 실직 경험은 아프고, 외롭고, 굴욕적이고, 약간은 자유롭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불안했다.


2013년 이른 봄, 나는 실업 급여 신청과 구직 활동을 하며 집 근처 작고 예쁜 도서관에 다녔다. 책과 자료를 보관하고 빌려 주는 도서관 본래의 기능에 충실한 도서관이어서 학생이나 시험 준비하는 일반인도 드물었고, 무엇보다 도서관 특유의 친숙하고 가끔 그립기는 하지만 너무나 판에 박힌 그 컵라면 국물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아서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격주로 돌아오는 월요일이었다. 도서관이 쉬는 날이면 나는 갑자기 나의 정다운 ‘사무실’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즉흥적으로 혼자서 가평 운악산을 찾은 그날도 아마 그렇게 돌아오는 월요일 중의 하루였다.

내 짧은 경험에 의하면 평소에 이렇게 갑자기 생긴 ‘자유’를 어떻게 보내느냐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법이다. 어떤 이는 평소에 보기 어려운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이는 혼자 책이나 영화를 보고, 또 어떤 이는 여행을 한다. 그날 나는 짧은 여행을 하기로 했다.

무작정 나는 도서관 바로 옆에 있는 버스 종점에서 82번 버스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갔다. 그야말로 당일치기 여행이라 어차피 먼 곳으로 가기는 힘들 터였다. 눈에 들어오는 대로 버스 운행표를 보던 내게 먼저 같은 경기도 지역인 성남이나 수원 쪽이 짚였다.

그런데 그 두 도시는 편안한 만큼 또 그만큼 새로운 곳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낯선 곳에서의 아침'을 맞은 변화의 시기에는 그보다 조금 더 새로운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가평이었다.

물론 가평이라고 해서 처음 가 본 곳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가평은, 대학생들의 모꼬지 장소로 유명한 대성리나 강촌이 있고, 직장인들을 위한 그 수많은 연수원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서울 사람들의 놀이터’가 아니던가…. 

개인적으로는 바로 직전까지 다녔던 회사에서, 교과서 집필자 선생님 한 분의 학교가 가평에 있어서 업무차 찾아가서 1박 2일씩 같이 작업을 했던 곳이다. 거의 처음 해 보는 교과서 개발 작업 초기의 어느 봄날, 막막한 상황에서 한 줄기 길을 더듬어 찾는 느낌으로 청평호 옆 수덕원이라는 교사 연수 시설을 빌려 함께 보냈던 추억이 있었다. 호수를 끼고 있었던지라 그렇게 몇 차례 가평을 갈 때마다 그리 즐기지도 않는 무슨무슨 매운탕을 하루에도 몇 번씩 먹고는 했던 ‘칼칼한’ 기억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벌써 5, 6년 전이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매번 단체로 갔었지 혼자 오롯이 가평을 찾은 적은 없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방문’이지 ‘여행’은 아니었다. 마침 산을 좋아했던 가평의 그 선생님이 ‘연인산’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산에 대해 이야기했던 기억도 났다. 그래서 처음에는 막연히 연인산을 목적지로 정했다.

1시간 반 정도 버스를 타고 가평 읍내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내렸다. 평일이지만 터미널은 크지는 않았으나 서울이나 부근에서 즐겨 찾는 곳답게 차도 사람도 꽤 많이 오갔다.

그런데 처음 마음에 두었던 연인산이 아니라 운악산에 가게 된 것은 순전히 버스 상황이나 즉흥적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능숙한 여행자라면 결코 이런 식으로는 여행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여행 자체가 시작부터 자유롭고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아, 자유의 바람!

운악산은 시골길을 이리저리 한참을 달려서야 나오는 버스 종점에 있었다. 꽤 넓은 개울을 건너면 펼쳐지는 주차장은 평일이라 넓다 못해 광활하게까지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애매한 월요일에도 나처럼 목적이 모호한 방문객들이 있어서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눈에 띄기는 했지만, 그 전날만 해도 상춘객으로 북적였을 음식점들은 곧 빗방울이라도 떨어질 듯 헤식은 하늘 아래 조금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눈과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운악산은 눈을 부릅뜬 금강역사가 내려다보는 듯 그야말로 가파르고 짱짱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하지만 한눈에 잘 안 들어와서 다시 좌우로 천천히 걸으며 본 봉우리들은 하나하나 섬세한 절경이었다. 특별히 더 갈 곳도 더 볼 곳도 없어서 나는 드넓은 주차장을 전망대 삼아 느긋이 걸으며 이 당당하고도 정겨운 그 산의 정취를 천천히 호흡했다….


언젠가 다시 혼자서 이른 봄날에 운악산을 찾을 날이 있을까? 그날의 불안스러우면서도 자유롭고, 우울하면서도 어떤 의욕으로 핏줄이 파르르 떨리던 그 느낌이 되살아나는 순간이….

분명한 것은, 내게도 누구에게도, 치열한 삶의 전쟁터에서 보이지 않는 차가운 손에 의해 한순간에 ‘후방’으로 떨어져 나가는 그런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늘 기억하리라. 이 세상에는, 그런 아픈 시절을 견디는 어느 쓸쓸하고 쌀쌀한 봄날에도 끝내 스스로 무너지지 않고 ‘마음속의 운악산’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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