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학교 다닐 때 누구나 배운 쓸데없는(?) 지식 중 하나가, 칠레가 세계에서 면적 대비 국토의 길이가 제일 긴 나라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또한 그 긴 나라의 등뼈를 이루는 것이 세계에서 제일 긴 안데스 산맥이라는 것도 기억할 것이다.
칠레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그런 기본적인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나라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은 실례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같이 나도 여전히 칠레를 잘 모르지만, 이십대 초반 이후 적어도 내게 칠레는 무엇보다 ‘네루다의 나라’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두드렸어,
열이나 잃어버린 안개,
그리고 내 나름대로 해 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어둠,
화살과 불과 꽃들로
둘쑤셔진 어둠,
소용돌이치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정현종 옮김
네루다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한 시는 바로 이 <시>다. 아마 <문학의 이해>라는 전공 수업을 위해 강의안을 모아 갈색 크라프트지로 묶은 책에서 처음 보았을 것이다.
마침 당시 1990년대 중·후반은 스페인·중남미 문학이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나즉한 사랑의 고백 같은 그 목소리를 따라 가며 나는 비로소 어렴풋이 처음으로 ‘시의 세례’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목소리는 친근하면서도 어떤 거리 감각을 잃지 않았고, 조곤조곤 속삭이면서도 드넓은 세계를 어렵지 않게 노래했다. 얼굴 모르는 이 낯설고 신비로운 시인의 이름과 단 한 편의 시에서 나는 뮤즈의 속삭임 같은 어떤 목소리를 어렴풋이나마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무렵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일 포스티노>(마이클 레드포드, 1996)는 네루다에게 푸근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한 이미지까지 더해서 느끼게 했다.
‘내 인생의 영화’ 중 하나인 이 영화에는 네루다 자체가 아닌 네루다의 삶과 문학에 영향을 받아 변화하는 한 평범한 이탈리아 청년의 삶을 다루고 있다. 젊은 시절의 멋진 네루다가 주인공이 아니어서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소설(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처럼 네루다의 시와 철학을 아름답게 잘 보여 주는 작품도 없을 듯하다. 이 영화의 엔딩 부분에 흐르는 작품이 바로 저 <시>다.
내가 책을 덮을 때
나는 삶을 연다.
나는 듣는다
항구들 사이에서
나다 안 나다 하는 고함 소리를.
구리 잉곳이
사갱을 미끄러져
토코피아로 간다.
밤.
섬들 사이에서
우리의 대양은
물고기로 고동치고,
우리 나라의
발과 넓적다리와,
백악의 갈비뼈를 건드린다.
밤은 내내
그 해변에 매어 달리고, 새벽이 오자
그건 노래하며 눈을 뜬다
마지 그게 기타를 자극한 듯이.
바다의 큰 파도가 부르고 있다.
바람이
나를 부르고
로드리게스가 부르고,
또 호세 안토니오-
나는 광산 노조에서
전보를 받았고
내가 사랑하는 어떤 사람은
(이름은 말하지 않겠다)
부칼레무에서 나를 기다린다.
어떤 책도 나를
종이로 쌀 수 없었고,
인쇄로 나를 채울 수 없었으며,
거룩한 간기로도 채울 수 없었고,
여태껏 내 눈을
덮지도 못했다,
나는 책에서 나와 과수원으로 살러 간다
내 목쉰 노래 일족과 함께,
달아오르는 금속 일을 하고
산속 난롯가에서
훈제 쇠고기를 먹으러 간다.
나는 모험적인
책을
좋아한다.
숲이나 눈에 대한 책
바다와 하늘
그러나
거미 책은
싫어 한다.
생각이
해로운 철망을 쳐서
어리고
선회하는 비상에 올가미를 채우는 그런 책.
책이여, 나를 놓아다오.
나는 여러 권의 책으로
뒤덮이지 않으련다,
나는 작품집에서
나오지 않았고,
내 시들은
시들을 먹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극적인 일들을
삼켰고,
험악한 날씨로 컸으며,
땅과 사람들한테서
음식을 얻었다.
신발에서는 먼지가 낀 채
나는 가는 중이다
신화에서 자유롭게:
책들을 서가로 보내자,
나는 거리로 나가련다.
나는 삶 자체에서
삶을 배웠고,
단 한 번의 키스에서 사랑을 배웠으며
사람들과 함께 싸우고
그들의 말을 내 노래 속에서 말하며
그들과 더불어 산 거 말고는
누구한테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었다.
▪정현종 옮김
이 시는 물론 무슨 기발한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독서 권장 공익 광고 같은 시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줄기차게 들어서 어느덧 누구나 믿게 된 사실, 즉 책이란 좋은 것이고 인간답게 살려면 누구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당연한 상식을 굳이 떠들어 대는 작품도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책은 자연스러운 삶이나 시와 반대편에 있는 어떤 것이다. 생각해 보면 책은 삶이나 시 자체가 아닌, 그 흔적 혹은 기록일 뿐이지 않은가? 그리고 세상에는 싱싱한 생명력과 통찰력이 가득한 작품도 있지만 오히려 뒤틀린 편견과 죽은 고정관념으로 세상에 또다른 어리석음을 더하는 책들도 있다.
그래서 네루다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삶 자체에서
삶을 배웠고
단 한 번의 키스에서 사랑을 배웠으며”
한때 한 시트콤 덕분에 ‘사랑(연애)을 책으로 배웠어요.’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물론 여기에는 ‘사랑’ 대신 다양한 말들이 패러디되어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사랑을 책으로 배울 수 있을까? 자유를, 진실을, 정의를… 무엇보다 삶 자체를?
시인이 옳다. 삶은 삶 자체에서, 사랑은 사랑으로 배울 수밖에 없다. 머리만이 아닌 온 존재 전체로 부딪히고 깨지며 배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삶과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예를 찾자면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 같은 사람이 아닐까. 놀랍게도 다음 조르바의 말은 네루다의 시를 단 한 마디로 요약한 느낌마저 든다.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니코스 카잔차키스(이윤기 옮김), 《그리스인 조르바》
니콜라스 기옌이 당신 편지를 내게 가져왔어.
그의 옷, 그의 눈에 보이지 않게 쓰여 있는 걸 말야.
당신 얼마나 행복해, 미겔, 우리 둘 다 말야!
곪고 아픈 데 투성이인 이 세상에서
턱없이 행복한 건 우리 말고 아무도 없어.
나는 까마귀가 지나가는 걸 보고 있어; 그가 내게 해를 입힐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당신은 전갈을 보고, 당신 기타를 닦지.
시를 쓰며 우리는 맹수들 속에 살고 있어,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우리가 믿었던 어떤 사람의 내용물을 건드리면,
썩은 파이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려,
당신은 베네수엘라에서, 구제받을 수 있는 건 무엇이나
긁어모아 지니라고, 나는 내 두 손으로
타오르는 삶의 석탄을 감쌀 테니.
참 행복하지 않은가, 미겔!
내가 어디 있는지 궁금한가? 말해 주지―
정부에 유익한 건 자세하게―
거친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이 해변에서는
바다와 들이 합치고, 파도와 소나무 숲이 어울리며
바다제비들과 독수리들, 초원과 거품이 어울리지.
당신은 바닷새들 가까이서, 그들이 어떻게 나는지 보며
하루 내내 보내본 적이 있어? 그들은
세계의 편지들을 자기들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옮기고 있는 것 같아.
펠리컨은 바람에 불려 가는 배들 같고
다른 새들은 화살처럼 지나가지.
한 줄의 터키옥과 함께 안데스 산맥 연안에 묻힌
죽은 왕들과 부왕들한테서 무슨 전갈을 가져 오듯이,
그리고 그다지도 장려하게 흰 갈매기들은
그게 무슨 전갈인지 자꾸 잊어버리고 있지.
삶은 얼마나 푸르른지, 미겔, 우리가 사랑하며
그 속에서 싸울 때, 말(言語)은 빵과 포도주이고,
그 말을 그들은 지금까지도 끌어내리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총과 노래를 가지고 거리로 나갔기 때문이야.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미겔.
그들이 뭘 할 수 있겠어 우리를 죽이는 것밖에는, 한데 그것조차
좋은 흥정은 못 될 테니―그들은 그저
길 건너에 방을 하나 얻어 드는 수밖에 없을 거야, 그래서
우리를 미행해서 우리처럼 웃고 우는 걸 배울 수 있을 거야.
내가 연애시를 쓰고 있을 때 말야, 그 작품들은 내 몸
사방에서 돋아난 것이고, 그 무렵 나는 의기소침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떠돌이 생활에 자포자기해서, 알파벳을 갉아먹고 있었는데 말이지.
그때 그들은 나에게 말했어: “당신 참 굉장하군요, 테오크리토스!”
나는 테오크리토스가 아니야: 나는 생(生)을 얻었고,
그녀와 대면해, 그녀에게 키스했고,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나 보려고
광산의 갱 속으로 다녔지.
그리고 내가 나왔을 때, 내 손은 쓰레기와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고,
나는 손을 들어 그걸 장군들에게 보여주며
말했지: “나는 이 죄악의 일부가 아니오.”
그들은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고, 인사도 하지 않았고,
나를 테오크리토스라고 부르는 것도 그만두었고, 결국 나를 모욕하기에 이르렀으며
전 경찰력으로 하여금 나를 체포하도록 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주로 형이상학적 주제에 매달리는 걸 계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러나 나는 내 기쁨을 내 옆으로 가져왔어.
그때부터 나는 바닷새들이 먼 데서 가져오는
편지를 읽으려 일어나기 시작했지,
축축하게 젖어서 오는 편지들,
내가 한 구절 한 구절, 천천히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번역하는 메시지들: 나는 꼼꼼해
낯선 의무를 다하고 있는 엔지니어처럼 말이야.
불현듯 하는 창가로 가지, 그건 순수한 빛의
네모이고, 풀과 울퉁불퉁한 바위들의
맑은 지평선이 있고, 나는 일하고 있어 여기
내가 사랑하는 것들 속에서: 파도, 바위, 말벌,
해양적 행복감에 도취해.
그러나 아무도 우리가 행복한 걸 좋아하지 않지, 그래서 그들은 당신을
안락한 역할 속으로 던져 넣지: “인제 허풍 떨지 마, 걱정할 거 없다고.”
하면서 그들은 나를 귀뛰라미장에 가두고 싶어 했어, 눈물이 있을 거기에 말야.
그러면 나는 익사할 거고, 그들은 내 무덤으로 만가(晩歌)를 보낼 수 있었을 거야.
나는 질산염층이 있는
모래땅에서의 어느 날을 기억해; 오백 명이
파업을 하고 있었지. 타는 듯한 오후였어
타라파카에서 말이야. 얼굴들이 온통
사막의 모래와 비정한 태양을 흡수한 뒤,
나는 봤어, 내가 싫어하는 잔처럼,
내 묵은 우울이 내 속으로 들어오는 걸. 이 위기에
소금층이 있는 황량한 곳에서, 싸움의 그
힘없는 순간에, 우리가 패배했을 수도 있는 그때에,
광산에서 나온 작고 파리한 아가씨가
유리와 강철이 들어 있는 용감한 목소리로 당신의 시를 읊는 거야,
내 나라의, 아메리카의 모든 노동자들의
주름 진 눈 주위에 떠도는 당신의 친근한 시 말이지.
그리고 당신의 짧은 시 한 편이 문득
자줏빛 꽃처럼 내 입속에서 타올랐어,
그러고는 내 피 속으로 흘러들었어, 당신 시에서
태어난 넘치는 기쁨으로 그걸 다시 한 번 채우며
나는 당신을 생각했어, 또한 당신의 쓰디쓴 베네수엘라도.
몇 해 전 나는 어떤 장군의 명령으로 채워진 쇠사슬 때문에
발목에 자국이 나 있는 학생 하나를 봤는데,
그는 나한테 쇠사슬에 묶여 길에서 일하는 일단의 사람들에 대해 말했고
사람들이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감옥들에 대해 말하더군. 왜냐하면 그게 우리 아메리카의 현실이었으니까:
탐욕스러운 강들과 나비들의 성좌가 있는 기다란 땅(어떤 곳에서는 에메랄드가 사과만큼 무겁지).
그리고 밤과 강의 전장(全長)과 함께
거기에 언제나 피 흘리는 발목이 있지, 어떤 때는 유전(油田) 근처,
또 어떤 때는 피사과(Pisagua)에 있는 질산염 근처에 말야, 거긴 썩은 지도자가
우리 나라 최상의 인간들을 땅속에 생매장하고,
그들의 뼈를 팔어먹는 곳.
그게 당신이 노래를 쓰는 이유지, 그래도 어느 날 욕되고 상처 입은 아메리카가
그 나비들을 파닥이게 하고 무서움에 떨지 않고 그 에메랄드를 캐도록 하며,
사형집행인들과 사업가들의 손을 응고시키도록 말이야.
당신이 오리노코강에서 얼마나 기쁨에 겨워 노래할는지 나는 짐작해 보았어.
필경 집에서 마실 포도주를 사겠지,
싸움과 의기충천하는 일에서 당신의 역할을 하겠지,
넓은 어깨를 가지고, 우리 시대의 시인처럼 말야―
가벼운 옷을 입고 편한 신발을 신고.
그 후 줄곧 나는 당신한테 편지 쓸 생각을 하고 있었고,
길옌이 도착했을 때, 당신 이야기를 끊이지 않고 했는데,
그의 옷 사방에서 온통 그 얘기가 풀려나오더라고
―그 얘기들은 우리 집 밤나무 아래서 흘러나왔지―
나는 혼잣말을 했어: “지금이구나!” 그러고서도 나는 당신한테 보내는 편지를 시작도 하지 못했지.
그런데 오늘은 나로서 감당할 수 없는 날이었어: 한 마리가 아니라,
수천 마리 바닷새가 내 창을 지나갔고,
나는 아무도 읽지 않는 편지들을 집어 올렸지, 새들이
세계의 모든 바닷가에서 가지고 가는 편지들―그들이 그것을 잃어버릴 때까지 가지고 가는 편지들 말야.
그러고는 그 편지 하나하나에서 나는 당신의 말을 읽었는데,
그건 내가 쓰는 말, 내가 꿈꾸는 말, 그리고 시에다 쓰는 말과 닮아 있었어.
그래서 나는 이 편지를 당신한테 보내기로 했는데, 이만 줄이겠어.
창으로 우리 것인 세계를 볼 수 있게 말야.
▪정현종 옮김
이 시는 마치 ‘긴 시로 쓴 짤막한 문학적 자서전’ 같다. 네루다는 처음에 개인적인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를 쓰다가 불합리하고 비참한 현실에 눈을 뜬 후 참여시로 방향을 바꾸었다.
다른 남아메리카(베네수엘라) 시인에게 보내는 친근한 편지 형식으로 쓰인 이 작품 속에서 네루다는, 모순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시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 연대하고 싸워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끊임없이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시인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낙관적이고 희망적이며 때로는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왜 그럴까?
당장은 눈앞에 길이 보이지 않아도 언젠가는 시인이 꿈꾸고 노래하는 세상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자신감 때문이 아닐까. 누가 뭐라고 해도 바르고 옳은 길을 정의롭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손잡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당당함 때문은 아닐까.
그 시절에서 멀리 떠나와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네루다와 같은 존재는 우리 같이 말없고 평범한 소시민들과는 정말 거리가 먼 존재가 아닐까?
거리와 광장에서 고통받는 노동자들과 나란히 서서 그들과 함께 행동하고, 일상의 소금부터 아스라이 먼 별까지 이 세계의 거의 모든 존재를 노래하며, 거침없이 여인들과 사랑에 빠졌던, 뼛속까지 시인이었던 그 네루다와 우리는….
하지만 영화 <일 포스티노> 속의 어리석게 보일 정도로 순박한 청년 마리오는 그저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의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하다가 시와 삶을 사랑하게 되고, 더 나아가 어쩌면 네루다와 닮은 사람이 되어 간다.
어떤 의미로 사랑은 지금의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게 이끄는 힘이라고 한다. 시와 삶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닮아가게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