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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내게, 사진 속 브레히트의 눈빛은 우리 시대의 진보적 지식인이자 논객으로 널리 알려진 진중권 씨를 떠올리게 했다.
TV 토론에서 그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반짝이는 눈빛과 날카로운 논리로 상대방을 코너로 몰 때면 통쾌하면서도 또한 저 상대방은 얼마나 쓰리고 답답하고 아플까 하는 생각이 함께 들고는 했다.
브레히트가 토론을 잘했는지 어땠는지 잘 모르지만 그의 많은 시를 보면 논객의 비수 같은 것이 번득인다. 게다가 그 비수가 적어도 겉으로는 부드러운 서정시라는 옷을 입고 있어서 그 날카로움은 더욱 서늘하고 놀랍다.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김광규 옮김
*히틀러를 지칭
이 시는 마치 다음 유명한 말을 시로 쓴 것 같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두 사람은 비슷한 시대에 함께 살았기 때문에 누가 먼저 이런 비극적인 생각을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역사상 유례가 없는 야만과 비극 앞에서 인간적인 감수성을 지닌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철학자 아도르노(1903~1969)의 저 말을 참고하면 짐작할 수 있듯이 브레히트가 서정시를 쓰기 힘든 까닭은 시인이 살고 있는 사회나 시대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을 사랑하고, 보기 싫게 구부러진 나무에 대해서 불평하지만, 왜 세상에는 불행한 사람이 그토록 많으며 나무가 저렇게 보기 싫게 휘었는지는 잘 묻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에는 시인과 예술가들이 있다.
눈에 보이는 거짓과 보이지 않는 진실의 대비는 ‘초록빛 보트나 즐거운 돛단배 vs.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망’, ‘처녀들의 젖가슴 vs. 사십줄 아낙네의 구부정한 모습’ 등으로 계속 변주된다. 하지만 결국 정작 시를 쓰면서도 아무래도 ‘운을 맞추는 것은 사치스럽다’는 쓰디 쓴 회의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논란이 될 수 있는 구절이지만, 결국 자연에 대한 감동이 아니라 참혹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놀람 때문에 시를 쓴다는 놀라운 선언으로 시를 마무리한다.
물론 브레히트와 아도르노 이후에도 ‘꽃피는 사과나무’를 노래하는 서정시는 줄기차게 쓰이고 있다. 왜냐하면 불의와 야만의 시대일지라도 자연과 인간에 대한 믿음까지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브레히트의 이 시가 가치 있는 것은, 누구나 침묵할 수밖에 없는 가혹한 현실 앞에서 시인이나 예술가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어떻게 분노해야 하는지 깊은 성찰이 담긴 목소리로 우리에게 들려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푸르렀던 9월의 어느 날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나는
말없이 그녀를, 그 조용하고 창백한 사랑을
우아한 꿈을 꾸듯 품에 안았다.
우리 머리 위로 아름다운 여름 하늘에는
오랫동안 보아 온 구름 한 점 떠 있었다.
아득히 높은 곳의 새하얀 구름은
내가 올려다보았을 때,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날 이후 많은 세월이
소리 없이 흘러가 버렸다.
자두나무들은 베어져 없어졌을 것이다.
그 사랑이 어떻게 되었냐고 너는 나에게 묻는가?
나는 기억할 수 없다고 말하련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정말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얼굴에 키스한 적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구름이 거기 떠 있지 않았더라면
그 키스마저 오래 전에 잊어버렸을 것이다.
새하얗고 높은 데서 흘러온 그 구름은
지금도 생각나고 앞으로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자두나무에는 변함없이 꽃 피고
아마 그 여자는 이제 일곱 번째 아이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 구름은 잠깐 동안만 피어 올랐다가
내가 올려다 보았을 때, 이미 바람에 실려가 사라졌다.
▪김광규 옮김
이 시를 다시 읽을 때마다 이 작품을 두고 독일의 대표적 평론가였던 라이히라니츠키(1920~2013)가 남긴 다음 말이 함께 떠오른다.
“놀랍도록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웠으며, 동시에 기막히게 시적이었다.”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나 역시 오랫동안 이 시에 대하여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시는 시인이 흘러간 옛사랑에 대한 기억을 노래한 시이다. 이처럼 단순하고도 영원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가 어려울 까닭이 없다.
시인은 ‘자두나무’와 ‘아름다운 여름 하늘’과 ‘구름’에 대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끝내 정작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한 여인의 모습에 대해 친절하게 그려 주지는 않는다. 그저 그녀에게 키스한 적이 있다는 말로 퉁치고(?) 넘어간다. 마치 누군가에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대해 소개하면서 쓸데없는(?) 배경에 대해서만 잔뜩 이야기를 늘어놓고, 정작 얼굴형이나 눈동자, 입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가 ‘마리’를 추억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는 비교적 분명하게 추측할 수 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새하얗고 높은 데서 흘러온 그 구름’이다. 이 구름은 시인의 시적 상상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며 연결하는 존재이다. 아마 갑자기 머릿속에 나타난 그 구름 덕분에 또는 과거의 그 구름을 떠올리게 하는 현재의 실제 구름으로 인해 문득 시인은 오래전에 까맣게 잊었던 그 사랑을 다시 떠올리는 시적인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브레히트가 그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지 않을수록 이 시를 읽는 사람은 그 빈 공간에 자신만의 ‘마리’를 그리게 된다. 우리는 브레히트가 그려 준 ‘존재의 한 순간’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시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타인의 삶>(플로리안 폰 도너스마르크, 2006)의 냉혹한 비밀 경찰(슈타지) 비즐러도 이 시를 읽으며 자신의 잊었던 첫사랑을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1.
정말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순진하게 말하면 어리석은 사람으로, 이마에
주름살이 없으면 감각이 무딘 사람으로 여겨진다.
웃고 있으면
끔찍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나무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곧
참담한 현실에 대한 침묵을 뜻하여
범뵈시될 정도이니, 도체 어떻게 된 시대란 말인가!
저기 평화롭게 길을 건너는 사람을
어려움에 처한 친구들이
만나볼 수도 없단 말인가?
내가 아직 벌어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다만 우연일 뿐이라는 말을 믿어 다오.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 역시 배불리 살 수는 없다.
살아남은 것은 우연일 따름이다.(운이 다하면, 나도 끝장이다.)
먹고 마시라고, 그럴 수 있음을 기뻐하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내가 먹은 음식이 굶주린 자에게 빼앗은 것이고,
내가 마시는 한 잔의 물이 목 마른 자에게 없는 것이라면
어찌 내가 먹고 마실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먹고 마신다.
나 역시 현명해지고 싶다.
옛날 책에 씌어진 현명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아귀다툼에서 벗어나 짧은 인생
마음 편히 지내고
힘이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고
악을 선으로 갚고
욕망을 채우기보다 마음을 비우는 것
바로 이런 것이 현명함이라 했다.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니
정말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2.
모두 다 굶주리던
혼란한 시대에 나는 도시로 왔다.
폭동이 일어나던 시대에 사람들 틈에 끼어
그들과 함께 나도 격분했었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싸움터에서 밥을 먹고
살인자들 틈에 끼어 잠을 자고
아무렇게나 사랑을 하고
인내심 없이 자연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우리 시대에는 길들이 모두 늪으로 나 있었다.
살인마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보고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지배자들은
내가 없어야 발 뻗고 잘 수 있었고, 나 역시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힘은 없었고, 갈 길은
너무도 멀었다.
또렷이 보였지만, 닿을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3.
우린 홍수에 휩쓸렸지만
거기서부터 떠오를 너희들,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말할 때면
너희들이 겪지 않은 이 암울한 시대를
부디 생각해 다오.
불의가 판치는데도 분노가 없어서 절망하면서
신발보다 더 자주 망명지를 바꾸어 가면서
우린 계급의 전쟁을 겪으며 살아 오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우린 알게 되었다.
천박한 것을 증오해도
얼굴이 일그러지고,
불의를 보고 분노해도
목소리가 쉬게 된다는 사실을. 아,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한 사회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지만
막상 우리 자신은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너희들, 인간이 인간을 도와 줄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거든
부디 관대한 마음으로
우릴 생각해 다오.
▪서경하 옮김
이른바 ‘촛불 혁명’(2016) 이후 적어도 정치나 이념 영역에서는 우리 사회의 주류가 보수에서 진보로 바뀐 듯하다. 일반적으로 보수 진영이 오래 권력을 가질 경우 부패가, 반대로 진보 진영의 경우 분열이 문제가 된다고 한다. 아마 전자가 주로 현실적인 권력을 추구하고, 후자가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인 듯하다.
보수의 실패는 우리 사회에 그동안 숱하게 목격해 와서 새로울 것이 없는데, 진보의 시행착오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조금은 새롭고 또 낯설다.
진보의 무기는 말과 글이다. 그래서 진보 중의 진보라고 할 마르크스주의자 브레히트는 자신의 글로 현실을 바꾸기를 꿈꾸었다. 하지만 그런 목표를 위해 예술적 가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처럼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에 예술적으로 더욱 정교하고 세련되게 표현해야 하지 않았을까? 진보야말로 ‘후지면 지는 거’니까.
삐딱하게 읽으면 이 시는 어느 한물간 진보주의자가 ‘라떼는 말이야… .’ 하고 아무도 안 궁금한(?) 자신의 후일담이나 자기 작품에 대한 변명을 길게 늘어놓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진보주의자가 ‘신발보다 더 자주 망명지를 바꾸어 가면서’ 나치와 전체주의에 저항한 브레히트라면 마냥 삐딱한 자세로 들을 수는 없을 듯하다.
언젠가 우리나라의 진보 진영의 한 인물이 인용하기도 했지만, 특히 다음 구절은 경박한(?) 진보주의자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가끔씩 떠오르는 구절이다.
“천박한 것을 증오해도
얼굴이 일그러지고,
불의를 보고 분노해도
목소리가 쉬게 된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면 자기 ‘얼굴’보다 ‘생각’에 더 책임을 질 일이다.
처음 브레히트를 읽고 나서, 필자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진실 없이 막연한 아름다움만 달콤하게 노래하는 거짓 시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끝까지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세상에 대한 ‘경악’ 때문에 어둠의 핵심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시만이 참된 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럴듯하게 덧칠된 ‘아름다움’ 뒤에 숨어서 세상을 속이고 스스로도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거짓 언어들’이, 지금도 여전히 또 얼마나 많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