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베르 씨, 시가 왜 이렇게 재미있어요?

본문

by 시를아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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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공부해 보지 않은,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내가 자크 프레베르라는 시인을 알게 된 것은 무엇보다 저 유명한 샹송 <낙엽(고엽)>을 통해서이다.

이 노래를 부른 이브 몽탕(Yves Montand, 1921~1991)은 <마농의 샘>(클로드 베리, 1986) 등 영화배우로도 유명하지만, 처음에는 내게 그저 유명한 샹송을 부른 독특한(?) 이름의 프랑스 가수일 뿐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가 부른 <낙엽>의 매력을 조금은 알게 된 것은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서 독특한 버전으로 그 고전 샹송을 다시 듣게 된 후이다.

아마 작은 식당이나 소극장 같은 곳에서 있었던 공연을 녹화한 것인 듯한데, 트렌치코트 차림의 관객들 탓인지 밖에는 늦가을비라도 내리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이브 몽탕이 부르는 노래의 한 소절 한 소절에 처연함과 페이소스가 짙게 묻어났다. 어쩌면 낡은 흑백 화면과 예전 LP 판에서 들을 수 있었던 예의 잡음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수와 관객 사이 닿을 듯 가까운 숨결 속에서 참혹한 전쟁의 시대를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연민과 연대의 아우라(분위기)였다.

▴자크 프레베르

2

낙엽


오! 네가 기억해 주었으면

우리가 다정했던 행복한 시절을

그때는 지금보다 인생은 더 아름답고

해는 더 뜨거웠지

낙엽은 삽 속에 끌어담기는데…

그것 봐 나는 잊지 않았지

낙엽은 삽 속에 끌어담기는데

추억도 후회도 끌어담기는데

북풍은 망각의 싸늘한 어둠 속으로

그걸 싣고 가 버리는데

그것봐 나는 잊지 않았지

네가 나에게 불러 주던 그 노래를.


그것은 우리를 닮은 어느 노래

너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너를 사랑했지

우리는 둘이서 함께 살았지

나를 사랑하던 너와

너를 사랑하던 나는

그러나 인생은 사랑하던 사람들을

어느샌가 소리 없이

갈라 놓아 버리고

헤어진 사람들의 그 발자국을

바다는 모래 위에서 지워 버리네.


낙엽은 삽 속에 끌어담기는데

추억도 후회도 끌어담기는데

그러나 말 없고 변함 없는 내 사랑은

언제나 웃으며 삶에 감사하네

내 그대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대는 그토록 아름다웠지

내 어찌 그대를 잊어 버리리

그때는 지금보다 인생은 더 아름답고

태양은 더 뜨거웠지

그대는 내 정다운 친구였네…

그러나 후회해 무엇하리

그대가 내게 불러 주던 노래를

나 언제나 언제나 듣고 있으리니

그것은 우리를 닮은 어떤 노래

너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너를 사랑했지

우리는 둘이서 함께 살았지

나를 사랑하던 너와

너를 사랑하던 나는

그러나 인생은 사랑하던 사람들을

어느샌가 소리 없이

갈라 놓아 버리고

헤어진 사람들의 그 발자국을

바다는 모래 위에서 지워 버리네.

▪김화영 옮김


대체로 노래가 된 시들은 시 자체로 읽기가 오히려 어렵다. 어쩌면 시에 붙은 하나의 선율은 해당 작곡가의 음악적 해석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일단 노래가 되면 다른 리듬으로 읽기가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 <낙엽>도 워낙 귀에 익어서 자신만의 리듬으로 읽어 나가기가 어렵다. 반대로 그래서 시와 노래가 더없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애써 음악을 걷어 내고 이 시를 다시 들여다보면, 누구나 노래할 말한 소재(낙엽)를, 속삭이듯이 쓸쓸한 어조로, 누구나 한 번쯤 느낄 법한 그 흔한 분위기와 주제(사랑과 인생)를 풀어 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늦가을비 내리는 거리를 낙엽을 밟으며 걸어가는, 트렌치코트를 입고 우수에 젖은 눈빛의, 프랑스 흑백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뒷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 같다.

이럴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는 ‘신파성’, ‘대중성’, ‘통속성’… 등이다. 맞다. <낙엽>은 지독히 신파적이고, 대중적이고, 통속적이다. 누구나 ‘인생은 더 아름답고 해는 더 뜨거웠’던 시절이 있고, ‘너는 나를 사랑했고/나는 너를 사랑했’던 연인이 하나쯤은 있으며, 인생은 ‘사랑하던 사람들을/어느샌가 소리 없이/갈라’놓는다는 것을 이제 어느 누가 모를까?

이렇게 시 <낙엽>이 노래하는 것은 아름다운 시절을 함께 보냈고 지금은 잃어버린 사랑이다. 그럼에도 이 시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랑이 단순히 한 연인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힘겨운 시대를 살아남기 위한 대가로 잃어버려야 했던 것들을 함께 떠올리게 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브 몽탕

공원


우주 속의 별

지구 속의

파리

파리의 몽수리 공원에서

겨울 햇빛 속 어느 아침

네가 내게 입맞춘

내게 네게 입맞춘

그 영원의 한순간을

다 말하려면

모자라리라

수백만 년 또 수백만 년도.

▪김화영 옮김


자크 프레베르의 시를 읽을 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가 시인이기 이전에 20세기 초중반 장 르누아르(Jean Renoir, 1894~1979)나 마르셀 카르네(Marcel Carne, 1906~1996) 등의 영화를 위해 많은 시나리오를 쓴 영화인이라는 점이다. 이 짧은 시도 영화적 기법이 시와 절묘하게 만난 작품 중 하나이다.

특히 시의 초반부(1~5행)는 영화의 촬영 기법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드넓은 우주에서 지구, 다시 파리 그리고 몽수리 공원까지 영화처럼 연속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서로 다른 객관적 장면을 나란히 연결해서 의도하는 의미를 만들어 내는 전형적인 몽타주(montage) 기법이다.

그런데 정말 시적인 부분은 그 다음이다. 사실 이 시가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관객이 보고 있는 것은 그저 남녀 주인공의 짧은 키스 신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는 단지 두 사람이 뜨겁게 혹은 애틋하게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나 운명 혹은 더 나아가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려면 더 긴 이야기(서사)가 필요하다. 그것이 영화의 본질이나 특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와 달리 시는 그 키스(사랑)의 의미를 단 여섯 행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단숨에 압축한다. 그리고 그 키스는 그저 짧은 한 순간이 아니라 시각적 혹은 공간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영원한 한 순간’이라고 선언한다.

이렇게 이 시는 시적인 순간을 단순히 언어로만 풀어 놓은 것이 아니라, 영화적 기법과 결합하여 공간과 시간을 자유롭게 확대·축소함으로써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바르바라


기억하는가 바르바라

그날 브레스트에는 끝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지.

너는 웃음지으며

활짝 피고 유열에 차

빗속에 비에 젖어 걷고 있었지.

기억하는가 바르바라

브레스트에는 끝없이 비가 내리고

나는 너를 시암가에서 마주쳤지.

너는 웃고 있었지.

나도 같이 웃었지.

기억하는가 바르바라

내가 알지 못했던 너는

나를 알지 못했지만,

기억하는가

그날을 그러나 기억하는가

잊지 마라,

어느 집 처마밑에서 비를 피하던 한 남자를.

그는 너의 이름을 불렀다.

바르바라

그래 너는 빗속으로 그에게 달려갔지.

비에 젖어 유열에 차고 활짝 피어서,

그래 너는 그의 품에 안기었지,

기억하는가 바르바라

내가 너에게 반말을 한다고

서운해 말아라.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너라고 부른다.

내가 그들을 오직 한 번 보았다 해도

나는 서로 사랑하는 모든 애인들을

너라고 부른다.

내가 비록 그들을 알지 못한다 해도

기억하는가 바르바라

잊지 마라,

그 얌전하고 행복했던 비를.

너의 행복한 얼굴 위에,

행복한 그 도시 위에 내리던 비를.

바다 위에,

해군 기지 위에

웨상의 배 위에 내리던 비를.

오 바르바라

전쟁은 얼마나 바보짓이냐?

무쇠의 이 빗줄기 속에서

피의 강철의 불비 속에서

이제 너는 어찌 되었느냐?

두 팔로 너를 사랑스레 가슴에 껴안던

그 사람은,

그는 죽었느냐 사라졌느냐 아직 살아 있느냐,

오 바르바라

지금도 브레스트에는

옛날처럼 끝없이 비가 내리지만

그리고 이제는 옛 같지 않고 모두가 부서졌다.

기막히고 참담한 죽음의 바다

피의 강철의 무쇠의 폭풍조차 아니로다,

다만 개처럼 쓰러지는 구름일 뿐.

브레스트의 빗줄기 따라

사라지는 개들

브레스트에서 멀리 멀리 떠나가

죽어 썩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개떼들처럼.

▪김화영 옮김


프랑스 영화 <쉘부르의 우산>(자크 드미, 1964)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예전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 덕분이다. 하지만 글 속에 잠깐 언급된 수준이라 대략적인 내용 정도만 파악하고 넘어갔던 듯하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이국적인 것에 끌리는 성향이 있어서 무언가 세련되고 낭만적인 영화가 아닐까 막연히 상상하고는 했다.

한참 후에 찾아본 이 뮤지컬 영화는 놀랍게도 대사 전체가 음악으로 구성된 진정한 뮤지컬 영화였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대표 곡도 아름다웠지만, 배우의 의상부터 배경 속 벽지에 이르기까지 세련되고 화려한 색감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수필 <인연>이나 영화 제목에서 상상한 것처럼 우산이, 주인공의 어머니가 우산 가게를 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렇게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시 <바르바라>를 소개하다가 왜 갑자기 영화 <쉘부르의 우산>을 이야기하는지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뒤늦게 본 <쉘부르의 우산>은 내게 <바르바라>를 떠올리게 했다.

우선 두 작품 모두 군항이 있는 프랑스의 북서쪽 두 도시를 배경으로, 전쟁으로 인해 엇갈린 사랑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바르바라>가 남자 주인공의 목소리로 노래가 전달되는 비해, <쉘부르의 우산>은 여자 주인공의 시선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

3

20세기 예술 사학자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 1892~1978)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영국의 작가 찰스 디킨스를 가리켜 ‘대중적이기 때문에 위대한 극소수의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참된 의미에서 대중적인 작가나 시인이란 대중 취향에 영합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문학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대중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예술가일 것이다.

자크 프레베르가 다양한 기법과 인간미 넘치는 유머, 신랄한 해학과 풍자를 넘어 결국 도달하고 싶었던 지점도 결국 그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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