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푸레나무 식탁 Jul 11. 2022

chapter 02. 편지를 보내요

아홉 번째 편지 - 다 알고 있다는 착각

믿어지지 않겠지만 저는 지난 일주일 동안 글감을 찾아다녔어요.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우뇌

와 좌뇌 사이 간뇌와 중뇌 사이 신경 스트랩 사이사이를 헤집어 다니며 무엇을 쓸까 고민하며

다녔지요. 아무리 머릿속 안 뇌를 샅샅이 찾아다녀도 번쩍이는 글감은 어디에도 숨어있지 않았어요.      


처음엔 마이클 셀렌버거의 책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읽고, 환경 운동과 관련한 이야기를 써보려 했어요. 지난번 편지에 언급한 저의 기후와 환경 관련 언급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논리인지 확인하며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30 넘게 기후 환경 운동을 해온 저자 마에클 셀렌버거의 요즘 환경 운동에 관한 쓴소리가 담긴  책을 읽고, 지구를 위한다고 행하는 환경 운동의 모순을 읽고 저는 깜짝 놀랐어요. 지난 환경책 읽기 수업 시간에도 아이들과 했던 말들을 떠올랐기 때문이

죠.      


“ 태풍과 홍수, 무더위와 이상 기온은 기후 위기 때문이야.”

“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 때문에 바다거북이 죽어가고 있어”

“ 빙하가 녹아 북극곰이 멸종된대”

“ 빙하가 녹고 있어, 우리는 기후 난민이 될 수도 있어.”

    

이런 극단적인 종말론적 환경 운동 표어들은 애나 어른이나 다 알고 있는 상식이 되었어요.

환경 교육과 미디어에서 장면들을 떠올리며 아이들은 기후 위기와 재난에 관한 명확한 인과관계를 설명할  있게 되었어요. 사실, 우리가 버린 쓰레기가 바다 거북이를 죽인다는  보다 효과적으로 우리를 설득할 표어는 얼마나 있을까요?      


하지만 저자 마이클 셀런버거는 이런 주문과도 같은 잘못된 표어가 환경 운동의 진실을 가리고 있다고 얘기해요. 기후로 인한 종말은 오고 있지 않으며, 자연은 회복하고, 인간은 적응하있다고. 선진국들의 잘못된 환경 운동 표어로 혜택을 받는 것은 지구가 아니며 오히려 저개발 국가들의 피해만 부추기고 있다고요. 환경 재앙은 플라스틱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석유의 발견과 인류의 발전으로 바다 생물들은 자유를 얻었다고 얘기합니다.  

    

언제든 핵폭발이 일어날  같이 무시무시해 보이던 원자력 발전소가 사실 어떤 전기 발전 장치보다 싸고 안전하다는 사실 또한 책을 읽기 전엔 알지 못했지요. 원전 반대! 기후 위기! 외치는 속사정이 사실 정치적인 이슈와 권력자들의 경제논리와 뗴려야   없는 표어였다는 사실도 놀라웠어요. 실체는 없고, 이미지와 마케팅만 남은 가짜 환경 운동이 21세기에는 환경 신으로 둔갑해서 우리를 잘못된 환경 운동 주의자가가 되게 한다는 것을요.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안다는 착각이 진정한 환경에 대한 고민을 막는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하지만 이런 얘기를 쓰기엔  부족하게 느껴졌어요. 이미 각종 서평 블로거들이  빠르게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요약과 정리, 감상까지 많은 글을 남겨놨기 때문이죠. 제가 공효진쯤 

되지 않고서야 이 글을 쓴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인터넷을 활보하며   새로운  없을까 어슬렁어슬렁 합니다. 뉴스는 세상에 이런 일이만큼 충격적이지만 며칠 지나면 세상이  그렇지로 마무리되는 허무개같이 느껴졌어요. 다른 이웃들은 대체  그렇게 매일매일 쓰나 궁금해서 기웃거려 보기도 했어요. 그들이 영화 탑건과 헤어질 결심을 보고, 미용실에 다녀오고, 저녁 반찬과 장마에 쓰는 동안 저는 위의 모든 것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쓰지 못한 것일까 반성

을 했어요.      


작가들은 같은 일을 보고, 겪으면서도 할 말이 누구보다 많은 사람일 거예요. 대수롭지도 않은 일들을 끄집어내 구구절절 이야기를 꿰어내는 작가들을 당해낼 수가 없어요.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하고, 중요한 일들은 지나치지 못하는 통찰력과 서사를 말이지요.      

  

나이가 들어서라고 말하기엔 너무 무책임하지만 언젠가부터 세상일이 너무 심드렁해졌어요.

세상에 절대 그럴 수 없는 일은 없고, 당연한 일은 없고, 원래 그런 일은 없고, 나만 특별한 일은 더더욱 없다는 것. 그럴 일도 있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시점부터였을까요? 경험이 독약이 되는 경우가 있다면 이런 것이겠지요.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처럼 ‘다 알고 있다는 착각’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얼마나 재미가 없고, 진실과 점점 멀어지게 되는지 말입니다.      

   

마흔여섯 해 동안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알고 있고, 알 것 같다는 이유로 들춰보지도 않은 재미와 진실들을 찾아봐야겠어요. 길고 뜨거운 여름을 견디려면 그게 좋겠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chapter 02. 편지를 보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