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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Jun 27. 2022

chapter 02. 편지를 보내요

여덟 번째 편지 - 지구 편들기

운동을 하고 와서 마신 빈 물병을 정리합니다. 페트병을 줄이기 위해 종이로 만든 물병은 가볍고 사용하기 좋지만 재활용하기는 불편합니다. 네모난 종이팩 입구에 플라스틱 마개와 뚜껑을 따로 제거하고, 팩 모서리에 접힌 부분을 손으로 일일이 따서(종이가 아주 딱딱해서 맨손으로 하면 손톱이 부러질 정도예요) 네모난 모양으로 펼친 후 물기를 제거해 재활용해야 하거든요. 이렇게 처리를 해서 판판하게 말린 종이팩을 매장 수거 박스에 넣으면 개당 20원을 환급해 줍니다. 그깟 20원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딱딱한 마개를 떼어 내고, 가위를 들고 종이팩을 정리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고선 남편이 한 마디 합니다.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열 개 해도 200원밖에 안 되는 걸 말이죠.      


그러게요. 서랍에 굴러다니는 200원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굴러다니게 둘 만큼 악착같지 못한 제가 이 더위에 굳이 재활용 종이팩을 두고 씨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 이십 원씩 열 개면 이백 원, 100개면 이천 원 하고 계산해봐도 종이팩 마개를 뜯고 펴고 말리는 노동력에 비하면 이천 원은 하찮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남편 말처럼 말이죠.      


그러고 보면 제가 악착같이 쓰레기를 줄이고, 환경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하기도 힘듭니다.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기, 카페에는 텀블러 가지고 다니기, 일회용 비닐 대신 시장바구니 갖고 다니기, 일회용 비닐이나 그릇은 세척 후 다회용으로 사용하기 등 일상에서 꼭 지키려 노력하는 것들은 사실 이 정도밖에 안 돼요. 하지만 세 식구가 일주일에 배출하는 일회용 쓰레기 양은 어마어마합니다. 딱히 배달 음식을 즐기지도 않고, 대형 마트 쇼핑도 한 달에 한 번 할까 말까 하지만 세 식구가 먹고살고 배출하는 양은 놀라워요. 그중 제일 죄책감이 드는 부분은 일회용 비닐백과 플라스틱 상자입니다. 새벽 배송을 주문하거나 집 앞에서 과일, 채소를 사면 어김없이 반듯한 플라스틱 상자에 내용물이 담겨 있어요. 흠짐 없이 안전하게 보관하고 상품성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라지만 과일이나 야채를 사며 플라스틱 상자도 함께 얻어 옵니다. 가볍고 탄탄한 플라스틱 상자는 재사용할 요량으로 깨끗하게 씻어 두긴 하지만 막상 쓸 일은 또 잘 없어서 차곡차곡 모아두다가 한꺼번에 버리기가 일쑤예요. 친정 엄마는 저보다도 더 그 플라스틱 상자를 아까워해서 친정에 가면 온갖 모양과 크기의 플라스틱 박스가 차곡차곡 쌓이다 못해 넘쳐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이렇게까지 할 일이냐며 좀 버리라고 남편이 할 법한 말을 엄마한테 하면 이 아까운 걸 어떻게 한 번만 쓰고 버리냐는 대답을 듣곤 하죠.


아이들과 수업을 하다 보면 다양한 환경 관련 책을 읽게 되는데요, 다년간 난이도별 환경책을 백여 권을 넘게 읽고 나니 몰랐으면 몰랐지 점점 알면 알수록 그냥 먹고살기만 하는 행동에도 죄책감이 늘 동반합니다. 걸레 대신 쉽게 뽑아 쓰는 일회용 물티슈나 아침부터 돌아가는 로봇 청소기와 식기세척기와 세탁기와 건조기를 보면서 세상 살기 좋아졌다는 생각과 함께 이래되 되나 하는 생각이 같이 들어요. 그렇다고 이제 와서 청소기도 세탁기도 건조기도 포기할 수 없는 삶이 되어버렸으니 이를 또 어쩌나 싶고 말이죠.    

  

올해는 더위가 일찍 시작되서인지 남편은 6월부터 에어컨을 켜기 시작했습니다. 더위를 체감하는 온도 차가 큰 저희 부부는 여름마다 에어컨 켜고 끄기로 꼭 한 번씩은 싸우는데요, '저는 늘 이 정도면 괜찮고, 남편은 너무 더워서 살 수가 없다'로 귀결되는 레퍼토리입니다. 예전에는 여름 한복판 며칠 정도만 에어컨을 켜면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6월부터 푹푹 찌는 더위와 습도에 벌써 에어컨 작동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조금만 참으면 지구의 온도를 천천히 올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 같은 얘기는 초등학생한테나 통하지 남편에겐 안 먹히기 때문입니다. 에어컨을 켜고 지구의 온도를 높이는 데 일조하느냐, 에어컨을 켜지 않고 남편과 또 싸우고 말 것이냐의 선택에서 나 혼자 지구의 편을 들어주는 건 외롭고 힘든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또, 남편이 생각 없이 사용한 탄소 배출량을 줄여보자는 심정으로 혼자 있을 때는 에어컨도 켜지 않고 꾸역꾸역 불 앞에서 요리하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분리배출을 지켜 재활용할 것들을 정리합니다. 이것은 업보인가요.      


어려서 밥상머리에서 밥을 남기면 엄마는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귀한 음식을 함부로 남기면 나중에 죽어서 평생 남긴 음식을 한꺼번에 먹게 된다’고. 이런 조기교육의 힘으로 음식 남기는 걸 끔찍하게 두려워하던 저는 ‘함부로 쓰레기 버리면 나중에 죽어서 평생 버린 쓰레기를 다 정리할'지도 몰라 재활용 플라스틱을 설거지하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장마의 시작과 함께 아주 습한 날이에요. 하지만 혼자일 땐, 에어컨은 켜지 않습니다. 작은 손선풍기를 탁자에 올려두고 오늘은 신문지 종이 상자를 접어봤어요. 반듯한 신문지 상자에 양파며 감자니 하는 저장 채소를 담아두고 잠깐 뿌듯했어요. 오늘 제가 사용한 탄소 배출량엔 가닿지도 않을 만큼이긴 하지만 하루에 몇 번은 지구의 편을 들어주자고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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