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푸레나무 식탁 Aug 05. 2022

chapter 02. 편지를 보내요

열한 번째 편지 - 여행, 후유증

“ 이렇게 여름휴가가 끝나다니! 당장 다음 여행을 계획하지 않으면 뭘 기대하며 살지?!”     


모처럼 만의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어요. 지난 일주일은 아무 걱정 없이, 오로지 오늘 무엇을 먹을까만 걱정하는 날들이었습니다. 세 식구가 머리를 맞대고 넘쳐나는 맛집 중에 진짜 맛집을 찾고, 대기 없이 입장할 시간을 고민하는 시기였지요. 성수기 여행은 사람에 치여 집 떠나면 고생이란 말을 몸소 실천하게 될 것이란 것을 알았지만 극성수기의 여행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딸 때문이었어요. 중학생의 삶이란 그런 것, 시험 기간과 수행 평가 기간, 성적 정정 기간을 제외하고 나면 여행이 가능한 시기는 극성수기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올해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지각도 결석도 하지 않고 학교와 학원을 다니느라(저는 또 운전하느라) 고생한 우리 가족에게 주는 선물 같은 휴가를 계획했습니다. 저를 뺀 식구들의 희망 사항에 따라 절이나 박물관, 둘레길 같은 데는 모두 패스하고 그저 물놀이나 하고 숙소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휴가를 보내기로 했어요. 쉬다가 자다가, 먹고, 또 꿈뻑꿈뻑 조는 그런 여행 말이에요. 지난 일주일간은 정말 그랬어요. 


하지만 현관을 열자마자 맞닥뜨릴 현실은 지난 휴가를 그리워할 틈도 없게될 거라는 것을 잊고 있었어요. 튜브의 바람을 빼고, 모래를 털고, 트렁크를 열고, 빨래를 분류하고, 자잘한 짐들을 화장대, 욕실, 제가 방과 방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정리하는 사이 딸의 한숨 소리가 삐집고 들립니다.    

  

“아, 오늘은 진짜 학원 가야해?! 선생님 개학하자마자, 왜 계속 카톡으로 숙제를 더 보내시는 거야... 학원 가기 전까지 다 못할 거 같은데... 다 외우지도 못했는데 재시험 보면 어떡해....”


분명 여행 가기 전에 숙제를 다 하고 간다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본 것 같은데, 그것은 엄마의 희망 사항이었나 봅니다. 여행 끝! 일상 시작!은 말이 쉽지 사춘기 학생에겐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오후 1시에 집에 도착한 순간부터 학원에 가는 저녁 7시까지 입이 댓 발은 나와서 숙제를 해치우는 딸애를 보면서 일상이 시작됐음을 몸소 실감했어요. ‘그렇게 가기 싫으면 가지마’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어요. ‘이왕 갈 거면 기분 좋게 가’라고도 하고 싶었지만 그 말도 하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말들은 많았지만 저는 그저 빨래나 했어요. 여행 내내 밀린 빨랫감들이 많아 세탁기를 세 번이나 돌리고, 손빨래 거리도 꽤 있어서 시간이 금방 갔지요. 기운이 빠져서 축 쳐진 발걸음으로 학원을 가는 딸의 마음을 모른 척했어요. 어쩔 땐 아는 척하기보다 모르는 척하기가 더 어렵다는 걸 사춘기를 겪어본 부모들은 이해하시려나요?     


밀린 빨래와 청소가 고단했는지 그날 밤 저도 딸애를 기다리며 소파에 누워만 있었어요. 다행히 재시험 없이 무사히 학원을 다녀온 딸에게 이제 좀 쉬자! 고 했지만, 딸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내일은 원래 수업에 방학 특강까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지요. 왜 숙제를 여행 전에 다 하지 못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묻지는 않았어요. 이제 와서 그걸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수학 문제를 대신 풀어줄 수도 없는 엄마는 그저 딸을 기다리며 책을 읽다 졸다를 반복할 수밖에요.      


졸다 깨다 보니 어느덧 아침이 되었습니다. 조용한 딸애 방에 들어가 보니 아직도 수학 문제를 풀고 있어요. 대체 수학 숙제는 몇 장이었던 걸까요? 풀어도 풀어도 끝나지 않는 수학 문제를 쌓아 두고 휴가를 다녀와, 또 풀고 푸는 딸이 제게 한마디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아무 데도 못 가겠어”     


아니, 이건 최악의 시나리오였어요. 아직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겠다니요.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음 여행을 기약할 줄 알았던 우리의 여행이 ‘즐거웠으나 다시는 못 가겠다’고 마무리되다니요. 이것은 제가 상상한 결말이 아니었습니다. 딸에게 일상과 현실이 이런 것이란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일상과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 그저 달려야 하는 것, 하루라도 쉬면 뒤처지고 마는 것, 하루를 쉬면 두 배는 더 고생해야 하는 것. 그런 딸에게 ‘놀 땐 놀고, 쉴 땐 쉬자’는 말도 배부른 소리라는 것을 말이죠. 즐겁게 살자고 하루하루를 착실하게 보내는 거라고 저는 생각하지만, 딸에게 삶은 하루도 착실하지 않으면 떨어지는 벼랑 끝 같아 보였어요.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라고, 대학이라도 가려면, 남들 하는 만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저 중학교 2학년인 딸이 일주일 공백에 이렇게나 안달복달하는 게 맞는 건가 싶었어요. 공부란 무엇인가 정답도 해답도 없는 믿도 끝도 없는 심연에 가닿아 우울해질 즈음에 “오 마이 갓!”하는 딸애의 외마디 비명이 들립니다!       


“헉 숙제가 또 있었어!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저녁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빈 두 시간 동안 저녁도 먹고, 좀 쉬었다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숙제를 기억하고 있었으나 늘 그렇듯 깜빡한 딸은 수업 시간 전에 비로소 숙제를 생각해낸 것이었죠. 차라리 생각이 안 나면 좋았을 텐데, 왜 생각이 나서는 전 그냥 모른 척하고 다음 시간까지 해도 될 거라 생각했지만 딸은 또 “어떡해, 어떡해”를 주문처럼 외며 문제집을 폈어요. 두 시간 동안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먹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딸을 보며, 저 또한 입맛이 딱 떨어졌어요. 아 그냥, 숙제고 뭐고, 학원에 갔으면 좋겠다. 숙제를 안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못 하고 혼나면 안 되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며 저는 좀 혼자 있고 싶어 졌어요. 포커페이스 용으로 한 손에 책을 들고, 딸의 숙제 요동에 휘말리지 않기로, 딸이 6시 30분에 땡, 하고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저는 냉장고에 시원하게 칠링 해둔 화이트 와인을 따야겠다. 냉장고에 있는 화이트 와인에 집중하기로 다짐했어요.      


기적적으로 딸은 숙제를 다 했지만 (표정이 한결 나아졌어요) 

떳떳하게 학원에 갔으나 선생님은 숙제 검사를 다 하지 않았고 (엄만 이럴 줄 좀 알았다...)

안 해온 애들도 너무 많았고 (그러니까!)

다음 시간까지 했어도 됐다고 하는 얘기를 전해 들으며 휴가 후유증은 언제나 잠잠해질는지 , 내일이면 과연 괜찮아질 건지 궁금해집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시원한 와인 한 잔 하며, 휴가 후유증을 달래 봐야겠어요. 

                                             

                                                                                                                22년 8월 4일 목요일. 

매거진의 이전글 chapter 02. 편지를 보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