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질문이 반가울 수 있도록

슬로리딩 에세이

by 문작

‘시간이 없다’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바빠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 말은 자기 합리화이자 핑계라고 여겼다. 그런데 최근 몇 개월 동안 나도 모르게 시간이 없다는 소리를 자주 했고, 내가 올린 SNS에는 시간이 마치 화살 같다는 둥 올해가 너무 훌쩍 지나갔다는 둥 바쁘다는 말을 대신하는 표현들도 꽤 많았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했던 말인데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다. 따지고 보면 여느 해보다 이슈가 많아서 몸도 마음도 분주했던 건 사실인데, 나는 왜 이런 말들이 후회되는 걸까.


아마도 <소피의 세계>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노르웨이 작가 요슈타인 가아더가 인류의 삶을 관통한 철학에 대해 판타지 형식을 빌려 쓴 소설로 장장 740여 쪽에 달한다. 방대한 분량만큼 등장하는 철학자와 사상도 다양하고, 소설 속에 또 다른 소설이 등장하는 액자식 구성을 취해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한다. 그래도 열다섯 살 소녀 소피와 힐데가 철학 선생님께 강의를 듣는 방식이고,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철학을 설명하니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자연스레 철학적 질문과 마주하게 되고, 나는 누구이며, 이 세계는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게 된다.


그런데 나는 ‘슬로리딩’이라는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읽는 두 달 동안 슬로우와는 정반대의 속도로 책 속의 글자만 후다닥 읽어나갔다. 모임의 특성상 필사 후 단상을 써야 하는데 단상은 거의 없고, 필사조차 밑줄 친 문장을 요약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때만 해도 해야 할 일이 많다 보니 이렇게라도 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내가 놓친 건 필사와 단상보다도 나 자신이었다. 저자는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는데 나는 그 질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또 어떤 철학자를 알아야 하는지에만 치중했다. 질문을 읽으며 사유의 시간을 갖는 것이 나에게 사치처럼 느껴진 결과였다.


‘마음속 깊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계속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겠니?’라고 묻는 소크라테스와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이냐’’라고 말한 버클리. 모두 나라는 존재에 대해 스스로 깨닫도록 해주었거늘 먼 과거의 한 철학자가 내뱉은 명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다 독서모임 회원들과 온라인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괴테의 문장(‘지난 3000년을 설명할 수 없는 이는 하루하루를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되리라.’)처럼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책을 읽기 전과 그 후의 나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듯했다.


다시 책의 앞부분을 펼쳐 밑줄 그었던 부분들을 살펴보았다. 그래도 초심이라는 게 꿈틀거리던 그때, 내 눈에 들어온 문장에는 철학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내용이 꽤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필요한 것,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누구이며 왜 사는지 알아내고자 하는 마음속의 욕구야.’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는 놀라워할 줄 아는 능력이야.’ 작은 순간에도 감탄하며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자 했던 그 마음이 지금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모르겠다. 다만, 모두에게 한정된 시간을 살고 있지만, 이 안에서 진짜 나를 알아가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건 알겠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있었던 일도 떠오른다.

몇몇 사람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3분 정도 갖고 발표를 하라고 하기에 이런저런 말들을 끄적였는데,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아무래도 잘못 쓴 거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대부분 자신의 취미와 성향을 말하며 요즘은 어떤 것에 푹 빠져있는지 관심사로 끝을 맺었으나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자녀들의 사춘기로 어떤 시간을 보냈다는 등 그 안에 ‘나’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이 또한 나를 놓치며 살고 있기 때문 아닐까.


이 글을 쓰며 그동안의 나를 돌아보니 하루하루 정해진 루틴에 익숙해져 나에게는 물론 세상일에도 무관심한 인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감수자의 말을 읽다가 ‘철학이란 모든 것을 몇 푼의 돈을 통해 손쉽게 얻으려는 속물들이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도 진지한 학문’이라는 부분에 마음이 뜨끔한 까닭도 그래서일 거다. 2024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마르크스의 문장(‘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의식을 규정하지만 우리의 의식도 우리가 일하는 방식을 규정한다’)처럼 내년에는 어떤 의식의 흐름으로 나를 만들어갈지 고민해야겠다. 고민이 쌓이다 보면 철학자의 질문이 반가워지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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