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는 멋졌다

by 일요일은 쉽니다




주말에 소개팅을 했어.


일로 만나거나, 학교 선후배거나, 회사 동기라거나

그런저런 다른 이유로 둘러댈 수 있는 포장 없이 정식으로 소개팅이란 명목으로 한 두 번째 소개팅.

아니 뭐, 소개팅을 소개팅이라고 부르는데 대단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난 이런 게 신기하단 말이야. 나 학교 다닐 땐 이런 문화가 없었거든.


이런저런 사정들로 약속이 계속 밀리고 밀려서

사실 마음속으로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라는 결론을 내리기 직전이었어.

그리고 혹시나 또 한 번 무슨 사정이 됐든 만약에 한 번 더 약속이 밀리면

서로 기분 안 상하게 잘 포장해서 그냥 안 만나야지, 하고 있었거든.

근데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약속 전날, 시간과 장소를 잡자고 연락이 온 거야.

그래서 만났어, 드디어.


근데 오히려 지난번에 첫 소개팅을 할 때는 별로 긴장되거나, 걱정되거나 그런 게 전혀 없었는데,

이번에는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갑자기 속도 안 좋고, 입맛도 없고, 할 것도 많고, 되게 긴장되는 거야.

긴장될수록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 수가 없는데… 말투만 퉁명스러워지는데, 얼굴도 못나지고.


근데 어쩌겠어. 약속 시간은 자꾸 가까워져 가고,

“저기… 너무 미안한데, 내가 지금 좀 긴장을 한 거 같아서…” 이러고 미룰 수는 없잖아.

평소에는 처음 만나는 사람이어도 일대일이면 편하게 나가서 얘기 잘하다 오는데,

그날은 나답지 않은 모습에 답답한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지. 나답지 못함에 몹시 불안해하면서.


“5번 출구!”


여기까지 오겠다고 해서 고맙게 우리 집 근처에서 만나기로 하고선,

집에서 나와 역에 거의 도착할 때 즈음 먼저 왔다는 문자가 오더라.

그래서 나도 5번 출구로 걸어가서 둘러봤는데 안 보이는 거야. 누구를 기다리는 거 같은 사람도 없고…

그래서 혹시 위에 있나? 싶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출구를 올라가니

보이더라, 자전거 가게 앞에 서 있던 그 사람의 모습이.


사실 조금 놀랐어. 첫인상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거든.

뭐랄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나는 머릿속에 내 이상형이랑 거리가 멀다 생각하고 나갔는데

실제로 보니까 내 머릿속에 이상형이랑 훨씬 가까운 거야.


근데 문제는 거기서부터였어.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니까 안 그래도 속도 안 좋고 입맛도 없는데 더 긴장하게 되더라고.

기분이 나쁜 게 아니었는데 상당히 딱딱해 보이는 표정으로 걷기 시작했지.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미안했어.

이렇든 저렇든, 멀리 와준 친구에게 내가 너무 다가가기 어렵게 대하는 거 같아서.

그렇다고 뭐라 하겠어, “미안해, 내가 지금 표정이 안 좋아 보여도 사실 안 좋은 게 아니야”라고

마음의 소리 읊어줄 수도 없잖아.

대신 이제까지 나는 첫인상과 말투, 몸짓에서 그 사람을 한 번 보고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믿었는데,

그 생각이 깨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

내가 너무 나답지 않았으니까, 이럴 수도 있구나 싶어서.


나는 항상 가는 데만 가고, 먹는 것만 먹고, 듣는 것만 듣고 어느 정도 취향이 한결같이 정해져 있기에

우리 동네라도 어디를 데려가야 하지, 어디를 가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고맙게 그는 이미 어디로 가는 게 좋을지 찾아놓았더라고.

우리 동네인데 마치 그 사람 동네에 놀러 간 기분이었어. 되게 편하고 좋더라.

난 같이 밥 먹으러 만날 때 상대방이 식당을 추천해주거나 알아서 데려가 주면 좋거든.

그래서 우리는 내가 전에 몇 번 지나친 적 있는 인도 식당으로 갔지.

(다만, 내가 점심에도 카레를 먹었단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어.

평소라면, 혹은 우리가 친했다면 그랬을 수도 있는데, 일단 내가 너무 긴장한 상태였으니까).


주문을 하고, 얘기를 하고.

음식이 나오고, 밥을 먹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얘기를 하고.

얘기를 하고, 밥을 먹고.

잠시 조용했다가, 질문을 하고.

그럼 대답을 하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난 원래 말도 많고, 질문도 많이 하고, 대답도 잘하고,

웬만해서는 어색함이 2초 이상 흘러가지 않는 성격인데

진짜 너무 속이 안 좋고 입맛이 없는 거야, 긴장해서.

친했으면 그냥 오늘 입맛이 없다 그러고 편하게 깨작거렸을 텐데,

첫 만남이니까 최대한 열심히 먹고. 근데 속은 안 좋고, 입맛은 없고.

평소처럼 말도 많이 못 하고, 질문도 많이 못 하고, 대답도 잘 못 해주고.

미안했어. 사람 앉혀두고 성의 없어 보이는 거 같아서.

나다움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거 같아서.


근데 사실 말이야, 그러지 못한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는데,

너랑 닮았더라, 네 모습이 계속 보일 만큼.

너랑 닮은 모습이 생각보다 많아서,

그래서 그때의 네가 자꾸 다시 생각났어.


편하게 소파에 앉아서 친구들과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는

정말 별것 아닌, 누구나 좋아할 법한 취미부터

말투, 앉아있는 자세, 질문할 때의 눈빛, 그런 너만의 이름이 새겨진 것들도

너랑 닮은 거야, 네 모습이 계속 보일 만큼.

너랑 닮은 모습이 생각보다 많아서

내 눈앞에 앉은 그 사람의 모습 속에서 그날의 네가 자꾸 다시 생각날 만큼.



분명 다른 사람인데

그리고 같을 만큼 닮은 게 아주 많은 것도 아닌데

아주 조그만 것들에서도

그런 사소한 것들에서도

네가 보이더라.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기도 전에 조금의 틈만 보이면

그 틈을 비집고 너와의 첫 만남이 떠오르더라.

근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사람한테서 처음 네 모습이 계속 보였는데

그날 만남과 우리의 첫 만남은 되게 다르게 다가왔어.

너랑도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이 실현되기까지의 시간은 길었지만,

드디어 우리가 그 밥 한번 먹었을 때 되게 즐거웠거든.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고 있었는데 저녁에 뭐하고 있냐는 네 연락이 왔고,

그래서 잠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그 자리에서 그럼 지금 만나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약속을 잡았고,

어디 갈래? 했는데 마침 떠올린 식당이 둘 다 좋아하는 곳이었기에 결정도 되게 쉬웠고,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 대화가 한순간도 끊기지 않았고,

다들 밥 먹고 커피 마시러 가듯이 카페로 옮기는 게 아니라,

정말 대화가 끊이질 않아서, 얘기할 게 너무 많아서 장소를 옮기고 앉아서 또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대화하다 결국 문 닫을 시간이라고 와서 말을 할 때야 아쉬운 듯 일어섰잖아.


다시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오니, 내 앞에는 네가 아니라 그 사람이 앉아있었어.

그리고 우리는 대화도 중간에 뚝뚝 끊겼고.

난 소개팅이라 해도 형식적인 자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한 명의 사람을 만나는 자리라 생각했는데,

그날은 왠지 되게 형식적인 자리가 되어가는 거 같았어.

질문을 위한 질문, 답을 위한 답, 그런 느낌 있잖아.

궁금해서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는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볼 법한 거니까, 어색하니까, 쉬운 주제니까.


그날 마치 무슨 마법의 주문이라도 외웠던 것처럼 그 날을 재생해보려 아무리 기억 속을 헤집어도

애써 너의 기억을 지우려 했기 때문에 더는 기억이 안 나더라.

그저 참 즐거웠던 것, 또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대화가 이어졌던 것 말고는

우리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느라 그렇게 즐거웠는지, 무슨 얘기를 하느라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는지

기억이 안 나더라구, 그때의 질문들을 다시 할 수도 없게.



그러니까 괜히 더 어딘가 씁쓸하더라.

겹치는 모습들에 계속 네가 떠오르는데, 나와 그 사람의 모습 속에서 그때의 우리가 보이진 않아서.

너랑 비슷한 사람은 또 만나더라도, 그때의 우리랑 비슷한 만남은 또 없을 거 같아서.

계속 너를 그리워하며 지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결국 이렇게 그때의 우리가 신기하고, 그리워지니까.



근데, 너랑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뭐랄까… 궁금하더라, 그 사람의 이야기가.

그때 너는 이미 내가 좋아하던 친구였으니까, 빨리 친해지고 싶은, 친해져야 한다는 마음이 마냥 컸는데

이 사람은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한 거 있잖아.

형식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지는 거 같아 허전하던 와중에,

그 사이로 들려오던 진솔한 이야기에,

그 뒤에 있을 그의 사연이, 그의 마음이 궁금하더라고.

사람은 각자 다 자기만의 이야기와 사연과 추억과 상처가 있기 마련인데,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이 궁금한 거 있잖아. 어떤 마음인지 알겠지?


고등학교 때 되게 달랐었대, 지금의 모습과.

그래서 그 시절의 친구들과는 연락을 잘 안 한대. 아마 그 친구들도 자기를 낯설어할 거라고.

말이 적은 편은 아니었는데, 사실은 굉장히 내성적이래.

그래서 첫 만남에서는 이렇게 저렇게 대화를 이어가도, 친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대.

대신 정말 친해지고 난 다음에는 자기의 모든 모습을 편하게 다 공유하게 된대.

(내가 너랑 친해진 후에야 웃기고, 유치하고, 썰렁한 모습들까지 다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야).

아, 교회에서 고등 담임을 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 꼭 지키려 하는 게 있대.

그 아이들의 한결같은 편이 되어주는 것.

실수하고, 잘못하더라도, 이것저것 따지도 묻기 전에, 전적으로 그 아이들의 편이 되어주는 것.

왜냐하면, 자기가 크면서 그런 존재의 빈자리가 항상 허전하게 다가왔다 하더라고.

세상 그 무슨 일이 있어도, 어느 상황에서도 그 사람 하나만큼은 내 편이 되어줄 사람 있잖아.

그래서 사춘기인 친구들에겐 그런 존재가 더 절실할지 모르니, 꼭 그런 편이 되어주고 싶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모두 겉으로는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다 제각각 자기만의 표정들을 담고 살아가니까.


한편으로는,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이 있나? 다 친해지기까지는 적당히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누구나 한결같은 내 편이 있어 주길 바라지 않나? 하는 괜히 삐딱한 시선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말했잖아, 나 속이 되게 안 좋았거든, 긴장해서 입맛도 없고… 그래서 좀 삐딱해지고 있었나 봐)


그 속에 진심이 마음에 남더라고.

나도 그 마음 아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가던 나의 모습들.

난 적당히 금방 친해지는 거 같아도, 적당히 친해졌을 경우에는 그만큼 쉽게 마음을 닫을 수 있다는 걸.

그래서 정말 깊이 친해진 친구들 앞이어야 웃기도 잘 웃고, 울기도 잘 울고,

슬픈 모습, 화난 모습, 나약한 모습, 인정하기 싫고 감추고 싶은 모습들도 하나둘 꺼내놓을 수 있다는 걸.

또 그래서 그냥 묵묵히 까다롭고 까칠한 내 옆을 지켜준 내 편들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너도 그랬구나. 너도 그렇구나.

아팠겠다. 외로웠겠다. 또 가끔은 지쳤겠다.

궁금하다.

너의 이야기. 너의 삶.



또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어.

살아 보니까 참 사람 인연만큼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건 또 없는 거 같아서.

전에는 인연은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 정해져 있는 거 같거든.

내가 내 손으로 이리저리 맞춰보려고 되게 열심히 노력해도,

그러더라도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고, 또 그러지 않더라도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되더라.


근데 또 만나게 된다면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 오후, 어디 공기 좋고 마음이 탁 트이는데 앉아서

너의 진짜 이야기가 듣고 싶어, 라고 묻고 싶어.


너의 진짜 이야기.

그 속마음, 그 속 얘기들.

나도 나누고 싶거든.

나의 이야기.

그 속마음, 그 속 얘기들.


인연이면 또 만나겠지.


우연이든,

필연이든.


서울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9. 그는 멋졌다.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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