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멋졌다
어제 나는 3주에 한 번씩 책을 반납하고 빌리러 들리는 도서관에 갔다.
개강해서 그런지, 또 아직은 본격적인 과제와 시험이 닥치기 전이라 그런지
풋풋하고 상큼해 보이는 학생들이 캠퍼스를 온통 수놓은 풍경이었다.
근데 걸어가던 중에 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우산이 없던 내게 옷과 가방이 물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저녁에 돌아가서는 슬픈 이야기를 써야겠노라고.
그래서 오늘은 너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너와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네가 잠깐 들렀다 떠난 흔적을 흡수하기 위하여.
너의 얘기를 처음 들었던 게 봄이었다. 그 날을 또렷이도 기억한다.
그날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온 가장 오래된 친구 중 한 명을 만나
늦은 나의 생일과 늦은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점심과 오후를 함께 한 날이었다.
사실 내가 몇 달 사라지는 바람에,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만나 덕분에 캠퍼스 구경도 하고, 덕분에 속마음도 솔직하게 쏟아놓은 날이었다.
그날 나는 내가 입었던 옷마저 기억한다. 까만 민소매에 까만 긴 바지.
그래, 그 날은 한 편으로는 설레면서도
한 편으로는 내 옷만큼이나 마음이 어두웠던 날이었다.
오래된 친구의 가장 큰 장점은 서로 지나온 모든 흔적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로 그녀는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얼마나 아끼고 얼마나 마음을 내주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나 다음으로 제일 잘 안다.
여전히 따끔거리고, 쓰라린 그 상처에 대해 그녀는 이미 모든 이해과정을 거친 후이다.
그날 그녀를 만나고 돌아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네 생각과 네 추억에 더 무거워져 버린 마음을 어찌 달래 볼까 싶어 싱크대 앞으로 다가가 물을 틀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도 또 오늘의 주어진 양만큼 너를 흘려보낼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마음 대신 그릇을 하나하나 씻고, 거품을 묻히고, 다시 씻어가고 있던 찰나였다.
그때 네 얘기를 처음 들었다.
그렇게 네가 내게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너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아마 나는 그때, 하필 그날 쏟아내었던 마음의 분량이 감당하기 버거웠는지,
흐르는 물 따라 그 사람 생각만 빼고 모든 걸 흘려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내게는 좋은 사람이라는 도장이 별로 중요하지 않던 때였다.
여전히 나는, 내 곁을 다녀갔던 사람에게서 마음을 다시 충분히 거두지 못한 때였으니
그렇게 4월 즈음, 혹은 5월 즈음,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던 예쁜 봄날
너는 그렇게 내게 찾아왔고, 또 그렇게 스쳐 갔다.
그러다 또 시간이 흘러, 아마 한 한 달 후 즈음이 되지 않았나 싶다.
6월이었을까, 조금씩 공기가 더워지던 시점이었는데,
그 사이 너의 이야기가 몇 번 또 나왔을 때는 그저 흘려 넘기고는 하다가
그 날 또 한 번 나온 너의 이름에 네가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너를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마음속 어딘가에 네 이름 석 자를 적고, 그저 없던 일처럼 덮었을 뿐
손을 내밀면 닿을 만큼 가까울법한 거리에 네 이름은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 날 네 이름 석 자가 다시 공기 속에 올려졌을 때에는, 네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너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 틈을 내주기 시작했던 것일까.
그렇게 너를 만나보겠다고 했다. 너와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 했다.
그것이 두 번째 시작이었다. 그렇게 네가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마음을 먹는다고 모든 것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너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서 우리의 만남은 자연스레 미뤄졌고, 너에 대한 걱정이 조금 자라났다.
너와 그분 사이의 관계가, 정이, 또 추억들이 어떠한지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곁을 지키지 못한 채 멀리서 보내드려야 했던 내 기억이 떠올라 나도 함께 괴로웠다.
너 역시 옆에서 지킬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래서 내 마음도 덩달아 무거웠다.
그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너와 네 마음에 대한 걱정이자 연민이었다.
곁에서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함께 한 마지막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나의 죄책감이 너무 커서 그랬을지 몰라도,
그렇게 너는 만나기도 전에 내 마음에 다녀갔다. 너에 대한 정이 내 마음을 조금 더 물들였다.
그러고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너는 그분을 떠나보내드렸다.
나는 그 작별의 공간에 가지 않았다. 너를 만난 적이 없으니, 내가 갈 곳은 아니었다.
허나 내 마음은 그곳에 다녀갔다.
그래도 너는 마지막을 함께 했다는 것이 위로가 되길 바라며, 나는 그곳에 들러서 내 마음속 너를 위로했다.
그렇게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이루 설명할 수 없는 연민과 걱정, 무거움 같은 것들로 조금 더 물들어갔다.
그렇게 네가 내게 물들여졌다.
그러다 시간이 또 흘렀다. 그사이 또 한 번의 연락이 오간 거 같았다.
어찌할까 여쭤보시길래, 너의 번호를 내게 전해주거나 나의 번호를 전해주면 연락해서 만나겠다고 했다.
이제 너를 만나게 되나 싶었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사정들로 인하여, 너에게 전달될지 안 될지 모르는 내 연락처만 건넨 채
그렇게 너는 다시 잠잠해졌다.
그로부터 한 한 달쯤 후였을까.
여전히 너의 이름 석 자 외에는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내게
여느 일요일 아침, 누군가 나의 연락처를 추가했다는 알림이 떴다.
누구지, 새로 만난 사람이 없는데, 하고 확인해보니 생각도 못 하고 있던 때에 네 이름 석 자가 떴다.
잠도 덜 깬 상태에서 조금 놀랐지만, 여전히 너의 이름 석 자만 뜰뿐
너에 대한 다른 그 어떤 정보도, 그리고 너의 연락도 없었다.
나는 원래도 그래 왔지만, 또 마지막 연이 정리된 후로 투명한 상태에서 지내고 있었으므로
네가 내 번호를 받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나 연락은 없었다고.
일단은 기다려보라 하셨다. 그래서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이미 나는 더는 나를 믿지 않기로 한 상황이었으므로, 그 말에 그러하겠다 하였다.
그 후로 몇 번 연락이 왔느냐고 묻는 말에, 나의 답은 늘 같았다.
아니, 아직 오지 않았다고. 그러고 기다리겠다고.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너를 만나겠노라 마음을 열기에도 시간이 걸렸건만, 어떻게 할 수 있기도 전에 순식간에 진행된 일이었다.
내가 원치 않는다 하였을 때 이미 모든 준비는 마친 상태였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하겠다 하는 것 말고는.
그렇게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만남은 역시나 아무런 의미도 띄지 못한 채 끝이 났다.
나는 가서 나의 역할을 다 하고 돌아왔고, 집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힘이 다 빠진 상태였다.
아닌 줄 알았던 인연이었지만, 생각과 행동의 차이로 여러모로 닫혀 있었던 마음이 더 닫혔다.
이상하게 그래서 네 생각이 더 났다.
기다리다 자꾸 거쳐 가야 하는 정류장만 많아질 거라면, 차라리 먼저 손을 내미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너에게 연락을 하게 되었다.
네가 처음 찾아오고부터 한 서너 달이 흐른 후 즈음이었다.
너는 반갑게 나의 연락을 받아 주었다.
그러고 내가 살아온 배경이나 과정을 훑지 않았고, 친구나 다름없으니 말을 편하게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전에는 그러한 적이 없었는데, 네가 친구처럼 다가왔기에 그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네가 한층 편해졌다.
그리고 드디어 만나자는 약속을 정하였다.
허나 또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사정들로 인해 약속은 밀리고, 또 밀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의 반복이었지만, 어쩌면 너에 대한 나의 기다림은 길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피어오르기 시작한 걱정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이 만남은 너 또한 처음에는 원치 않았고 여전히 불편한 만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만나지 않고도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바쁜 시기가 지나고 나서 다시 연락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질문을 건넸다.
헌데 너는 아니라고 하였다. 만나자고 하였다.
나의 질문에 그러하자고 답할 줄 알았기에, 다시 조금씩 닫히던 마음이 그대로 멈추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로부터 일주일 후,
그렇게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어색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친구를 만났다는 듯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는 웃어주는 네가 고마웠다.
네 웃음이 따뜻하게 다가왔기에, 나도 너를 보고선 웃어 보였다.
우리는 고맙게 네가 찾아놓은 식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근데 왜였을까, 자리를 잡고 앉으니 얼굴이 조금씩 물드는 것이 느껴졌다.
때로는 감정과 상관없이도 물드는 두 뺨이라, 나는 급히 손을 씻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러고 그때부터 나의 온 신경은 긴장한 터라 점점 나답지 않아져 가는 모습에
미안함과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안한 마음에 마음이 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정작 너를 만나면 네게 먼저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네 마음은 괜찮은지, 이제는 좀 괜찮은지 물어보지를 못했다.
어쩌면 그날, 내가 너에게 가장 궁금했던 건 마음이 조금은 아물었는지, 이제는 버틸 만 한지였는데
나는 그날, 쓸데없는 질문들로 둘러싸인 채 정작 네 마음의 안부는 묻지 못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밥을 먹고, 대화하고, 장소를 옮겨 또 대화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치고는 무난하였는데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흐르면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점점 죄어왔다.
무엇으로든 그 공백을 채우려 했지만, 채우는 것은 그저 내 앞에 놓인 잔만 바라보던 내 두 눈동자였다.
너도 불편했는지 조금씩 핸드폰을 손에 잡기 시작했고,
깜빡이는 네 화면에 대해 양해를 구하듯 연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설명하였지만
나는 사람을 만날 때에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놓고 그 사람에게 집중하기 때문에
네가 화면으로 두 손을 가져갈 때면 혹여나 이 자리가 따분한 것은 아닌지 시원한 밤공기가 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침묵을 채우려 몇 마디 던져보아도, 왠지 이미 끊긴 대화에 겨우 목을 축이는 거 같았다.
마음이 점점 더 불편해져 갔다. 조금 속상하기도 했다.
그러다 네가 생각지 못한 질문을 던졌는데, 무얼 할 때 진정한 쉼을 느끼냐는 물음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지난번에 만났던 사람은 꿈이 뭐냐는 질문을 하였는데,
차라리 꿈이 뭐냐는 질문은 어찌 보면 클리셰같이 흔해진 질문이기라도 했지,
뭐라고 대답할지 예상했던 수비를 보여줄 수 있는 동작이기라도 했지,
무엇을 할 때 진정한 쉼을 느끼냐는 네 질문은 순간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글쎄, 무엇을 할 때 나는 진정한 쉼을 느꼈는가. 심지어 너는 “글 쓰는 거 말고”라는 추가 항목을 더했다.
회사 면접에서도 그렇게 턱 하고 막혔던 질문은 없었던 거 같은데,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답을 몰라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어쩌면 그것은, 그 사람이 떠난 이후로는 진정한 쉼이 없었기 때문일까.
그날 너와 헤어지고 마음이 답답해 산책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맞다, 나에게는 산책이 그러한데” 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그 사람과 이별한 후로는 좋아했던 산책을 더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잊은듯하였다.
두 시간 반 즈음이 흐른 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섬과 동시에 밀려오는 해일처럼 그 사람의 기억이 나를 휩쓸었다.
그날의 첫 만남과 우리의 첫 만남이 자꾸 겹치면서, 그때의 기억이 무겁게 나를 누르기 시작했다.
자꾸 마주치게 되는 인연에 기대했던 만남인데, 계속 나에게 되돌아온 걸 보면 뭔가 특별한 듯 느껴졌는데,
그렇게 너도 한 번만 스칠 사람인듯 하였다. 또 연락하자는 네 말은 나의 대답과 같이 빈 말인듯 하였다.
이 사람도 아니구나, 속상했다.
너이기를 바랐는데, 소중한 친구 하나를 얻고 가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너와 나는 원래의 자리로 다시 멀어져 갔다.
집에 돌아와 어떠하였냐는 질문에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답을 했다.
맞을 거 같다는 그런 특별함이 없었다.
우리는 기다림만 길었을 뿐, 결국에는 여느 스쳐 가는 인연과 다를 것 없이 작별하였다.
연락이 오면 또 만날 것이냐는 질문에 글쎄, 라고 답을 했다. 연락이 오기는 할까, 그조차도 몰랐다.
그렇게 또 하루를, 길었던 기다림을 마감했다.
헌데, 네가 다시 떠올랐다.
틈틈이 나를 찾아왔다.
분명 헤어지고 돌아와서는 이도 아닌 것 같다는 확신에 차 있었는데,
그런데 네가 다시 떠올랐다. 그렇게 며칠을 떠올렸다.
무슨 이유에서 네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다.
조급함이었을까, 불안함이었을까. 아니면 미안함이었을까, 아쉬움이었을까.
무슨 이유에서 네가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기에 마음을 덮기로 하였다. 인연이면 만나겠거니 하고서는.
한 번의 연락이 오갔지만, 예의와 진심 사이에 줄타기하듯 여전히 애매하였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나였다면, 보이는 기회에 손을 좀 더 내밀었을 텐데,
그를 만난 후여서 더는 그러할 수가 없었다. 고로 나도 내 손을 다시 뒤로 숨겼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인연이면 만나겠거니 했거니와
너는 그로부터 다시 내 생각을 찾아와서는 나를 혼란스럽게 하곤 했다.
날이 갈수록 어찌해야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네가 다시 생각나고 생각나는 건 왜였을까. 지금의 나는 알지만,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적지 않은 시간이 또 흐르고, 그저 멍하니 인연이면 만나겠거니 하고 있던 즈음,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이야기를 듣더니 이미 흘러간 인연이라 정의를 하였다.
정말 그런 거냐 물으니, 정말 그런 거라 하였다.
허나 그러기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네가 다시 내 생각을 너무 많이 찾아왔는데.
어찌할까 하니 아쉬울 것 같으면 한 번은 연락을 해보라 하였다.
친구와 헤어지고 저녁 모임을 갔다가, 가서 또 마음을 품은 채 어찌할까 고민을 하다가,
나의 옛 모습이 조금씩 돌아오던 것이었는지 아무래도 연락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의 인연이 아니더라도, 아니라함을 받고 보내야지 이렇게 가끔 떠오르면 마음이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네게 연락을 하였다. 혹여 내일 시간이 있다면, 한 번 더 만나지 않겠냐고.
그러나 연락은 만남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물론, 그럴만한 상황이었고, 그럴만한 이유였지만,
너를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너의 말들은 아니라는 뜻을 친절하게 포장하여 전한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연락하지 말걸 그랬나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니 이렇게 가끔 네가 다시 떠오르느니
차라리 인연이 아니라 정해버리는 법이 편한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긴 기다림과 잠깐의 만남 후, 모래처럼 조용히 스쳐 가 버렸다.
며칠 전, 네가 스쳐 간 후에 왜 네가 그리도 다시 떠올랐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사람을 잊기 위해 너를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 년 반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던 내가 어쩌면 너를 만나 드디어 한 발자국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었다.
그렇게 너를 통해 여전히 아프고 계속 쓰라리던 그 사람을 지워내고 싶었던 일말의 기대였다.
그것은 잠시나마 네가 내 삶에 머물렀을 때, 네가 그 사람의 그림자를 조금 가리며 내게 만들어주었던 그늘이었다.
코끼리를 떠올리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가 떠오르지만,
코끼리가 떠오를 때 사자를 떠올리라고 하면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듯이,
나는 너를 생각함으로써 그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었다, 그 때문이었다. 나는 나중에야 이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네가 잠시 머무르다 떠나간 자리에는, 그 사람의 빈자리가 더욱 깊어져 있었다.
네가 가려주던 그림자가 다시 생기니, 그 무게는 더욱 무거워져 있었다.
결국 나는, 한꺼번에 밀려오는 열병을 앓았고, 겨우 감싸고 있던 마음을 너덜너덜하게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쉽게 지워질 사람이 아니었는데,
나는 왜 너를 통해 이제야 그 사람을 보내줄 수도 있겠다 생각하였을까.
나는 얼마나 힘들었기에, 그렇게라도 그 사람을 잊고 싶었던 걸까.
너는 그러했다.
그렇게 나에게 처음 찾아와서는, 몇 번이고 스쳐 가듯 흘러가다
또 이내 다시 다가와서는, 결국 오랜 기다림으로 머물다가
한낮의 숨결 같이 지나가고, 마음속 더 깊은 흔적을 파고는 떠나갔다.
어찌할 수도 없이 더 덧나버린 상처를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끌어안고 있다가
피식, 웃으며 소심한 주문을 외웠다.
나라 나라, 팍팍 나라.
파무침처럼 내 생각이.
나라 나라, 팍팍 나라.
의도치 않게 네가 남기고 간 그늘에
당분간은 마음을 고이 포개어 감싸고 지내야 할 듯하다.
그러면은 언젠가는 만나겠지.
파무침처럼 내 생각을
팍팍하게 될 사람을.
그래도 나는 너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네가 내게 잠시 머물다간 사이, 내 마음은 조금이나마 진정한 쉼을 얻었으니.
그래서 네게 고맙다, 참으로.
서울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11. 너는 멋졌다.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