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박연선, 박해영 작가와

그들은 멋졌다

by 일요일은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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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일정을 마무리할 즈음에 메일 한 통을 받았다. 그다음 주에 있을 토크콘서트 초청 이메일.

선배 작가들이 후배 작가들을 만나 이야기도 들려주고 질문도 답해주는 시간인데

지난번 노희경 작가에 이어 이번에 초청한 작가는 “청춘시대”의 박연선 작가와 “또 오해영”의 박해영 작가.

돌아가면 꼭 가야겠다 생각했는데, 그 날이 되어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서니 춥지도 않고 딱 좋은 날이다.


지난번에 한 번 온 적이 있는 대학로 근처 건물에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이미 방은 반 이상이 강의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차 있다.

뒤쪽에 자리를 잡고 받은 팸플릿을 하나씩 찬찬히 보니 최근작 외에 히스토리가 꽤 길다.

“청춘시대”를 쓴 박연선 작가는 “연애시대”를 쓴 작가이기도 하면서 그 외에 방송, 영화 활동이 다양하며

박해영 작가는 “청담동 살아요” 등 시트콤을 쓰며 활동해온 작가이다.

한층 친숙해진 마음으로 기다리니 무대 쪽 스크린에는 “청춘시대”와 “또 오해영”의 장면들이 재생된다.

사실“청춘시대”는 금토 드라마가 익숙지 않아서 다 보지는 못하고 부분 부분만 봤고,

“또 오해영”은 5화, 6화 정도까지 봤으나 뭔가 마음이 어려워 그 후로 더 보지 않았다.

재밌는 건, 얼마 후 나를 잘 알고 내 글 또한 잘 아는 친구가 “또 오해영”을 보냐며

서현진을 보면 내 생각이 난다고 좋아할 거 같다며 연락이 왔었다. 닮은 부분이 있어 보기 어려웠던 걸까?

어쨌든, 두 드라마 다 인기도 있었고 평도 좋았고,

또 드라마를 떠나서 작품의 작가를 만난다는 건 언제나 그렇듯 정말 설레는 일이기에

나눠준 팸플릿을 다시 찬찬히 읽어본다.


팸플릿을 다 읽었을 즈음에 토크콘서트가 시작한다는 안내와 함께 두 작가분이 무대에 올라오신다.

동갑내기 작가로 두 분 다 나이가 꽤 있으셔서 깜짝 놀란다. (그렇게 보이지 않으셔서 더 깜짝 놀란다).

그런데도 젊은 감성을 잘 읽고 녹여내시니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밖에 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굉장히 부럽고 멋지다 느껴진다.

원래는 가서 편안히 듣기만 하고 오려 했는데, 공감 가는 말들도, 도움되는 말들도 많이 해주셔서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펜을 쥐고 끄적끄적 적어본다.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캐릭터를 구상하는 방법, 캐릭터를 설정하는 방법.

박해영 작가는 자기가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세 부류가 있는데 본 사람, 느낀 사람, 겪은 사람이라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만나본 사람이어야 다시 재구성할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무엇이든 자기가 겪어본 것이, 그와 더불어 취재하고 공부한 것이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탄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공감 가는 캐릭터, 혹은 애정이 붙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박연선 작가는 내가 되고 싶은 면을 넣거나, 정말 나 같은 면을 넣고

박해영 작가는 안쓰러운가, 안아주고 싶나, 응원하고 싶나 이 세 가지를 고려한다고 한다.

답을 듣고 보니 각각 “청춘시대”와 “또 오해영”의 캐릭터들이 한층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추가로 그럼 주인공 외에 다른 캐릭터들 각각의 특징을 어떻게 잡아내느냐는 질문에

나는 박연선 작가의 답이 도움이 많이 됐는데,

캐릭터들을 같은 한 상황에 넣어놓고 각각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면 캐릭터가 잡히고 구분된다고 했다.

주인공은 잡혀도 그 외에 캐릭터들이 특징 없이 무채색인 거 같아 늘 답답한 느낌이 있었는데

더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연상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청춘시대”에 나오는 5명의 여자 캐릭터들을 각각 개성 있게, 사연 있게 잘 살려내신 거 같다.


계속해서 박해영 작가는 드라마를 쓰기 시작할 때 한 줄, 한 줄로 시작한다 한다.

드라마에 대한 한 줄이 나오면, 그 후에 그럼 인물들이 어떤 처지여야 하고, 어떤 상처가 있어야 하는지 등

그림이 조금씩 잡힌다 한다.

특히 박해영 작가의 드라마에는 상처나 트라우마가 꼭 들어가는데,

어떤 상처를 어떤 방식으로 폭발하여 치유하며 살아가는지를 고민한다 한다.

인물의 상처에 집중하는 건 어려서부터 여러 고민을 할 때 무얼 얻어서 행복한 게 아니라

무얼 놓아서 행복해진다는 깨달음이 있었기에 각각 인물의 사연을 만들어내는데 정성을 들인다 한다.

그의 연장선으로 박연선 작가는 악역을 맡은 캐릭터를 그려낼 때 고려하는 것은

멀리 있는 악역이 아니라, 태초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걸, 우리 모두 그럴 수 있다는 걸 생각한다 한다.

두 작가 모두 동의한 것은 진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면 안 되고 희석작용이 필요하기에 유머를 넣는데

박해영 작가는 무서워서 재밌는지, 슬퍼서 재밌는지, 통쾌해서 재밌는지, 웃겨서 재밌는지

이네 가지를 고려한다 한다.


드라마는 소설처럼 직접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묘사와 장면화를 해야 하는데,

고로 작가 혼자의 작품이 아니라 연출 및 배우들과 수많은 스텝의 공동작품이다.

여러 사람들과 일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박연선 작가가

예전에는 정확하게 대본에 나와 있는 대로 해야 하고 대본이 정답이라 생각했는데

경험을 쌓고 일을 하다 보니 드라마는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고 여러 사람의 해석이 들어가기 때문에

대본에서 벗어났다고 틀린 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할 때 그녀의 진심이 담겨있어 정말 멋졌다.

그런 의미에서 박해영 작가 또한 “또 오해영” 초반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리를 건너는 장면에서

원래 대본에는 대낮에 걷는 뒷모습만 보여주는 거로 썼었는데,

감독의 의견에 따라 그 장면을 밤에, 그리고 얼굴을 보여주는 거로 바꾼 것이

결국 그 감정과 느낌을 전달하는데 훨씬 직접적이고 효과적이었다고 말한다.

너무 멋을 부리는 것보다 주인공이 어떤 감정인지 정확하게 알 때까지는

적나라하게, 더 대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걸,

그래서 여러 스텝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반영해야 할 점은 반영하며 작품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한다.

드라마는 박연선 작가 말대로 공동 창작이자 박해영 작가 말대로 대중의 소리이기 때문에.


자주 나오는 단골 질문으로 오늘도 예외 없이 작가는 타고나야 하는지, 노력해서 되는지 질문이 나온다.

박해영 작가의 경우에는 회사를 잘 다니다가 IMF 때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나오게 되었고

그러던 와중에 친구의 추천으로 우연히 드라마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타고나야 한다고 엄격히 단정 짓기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잘 파악하고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으면 되는데 그런 능력은 어느 정도 타고난다 한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고 쓰는 사람의 글은 좋고, 따뜻한 게 느껴지기 때문에 재능중의 재능이라 한다.

그에 이어서 박연선 작가는 그 질문에 간단하게 타고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려버린다.

술렁이던 찰나 답을 이어갔는데 다만 글에 대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상대방이 평가할 수 없다 한다.

그래서 그냥 쓰는 것, 계속 쓰는 것, 그리고 쓰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쓰면 쓸수록 늘기 때문에 많이 쓸수록 이득이라는 것.

단골 질문에 대한 답은 늘 항상 타고나는 것과 노력으로 되는 것 사이 어디 즈음이었는데

쓰고, 계속 쓰고,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괜히 눈치 보고, 소심해지고, 한없이 작아지던 내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된다.


작가의 장단점에 대한 질문에 박연선 작가는 가장 좋은 점은 늦게 일어나도 되는 것이라 한다.

방에 있던 사람들 모두 웃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바로도 정말 가장 큰 장점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단점으로는 혼자 써야 하는 것에서 오는 외로움, 옆에 동료가 없다는 외로움을 꼽는다.

회사에서는 프로젝트가 끝나면 팀끼리 회식을 할 수 있는데

대본을 넘긴 후 홀가분한 마음에 나가고 싶어도 양옆을 보면 아무도 없으니 그런 점이 단점이라 한다.

이 또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

회사 생활할 때는 일이나 사람 때문에 고생한다고 말하듯 사람으로 인해 오는 스트레스가 꽤 컸는데,

또 혼자 작업을 하니 사람에 대한 그리움, 동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마음 맞는 사람들과 일을 할 기회가 있다면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래서 박연선 작가는 같이 일할 수 있는 그룹, 놀 수 있는 그룹을 만드는 게 도움될 거라 한다.

박해영 작가의 경우에는 기다림의 시기를 보내는 게 가장 힘들었다 한다.

더 빨리 뜰 줄 알았는데 동기들, 후배들은 치고 나갈 동안 여전히 기다림 속에 머무는 것이 힘들었다 한다.

이 또한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데,

매일 출근을 하고 매달 월급을 받는 삶과는 달리 여기는 정해진 것 없이 모든 것이 불투명하기에

그 불안함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계속 쓰는 것과 계속 기다리는 것일 때 오는 마음의 어려움이 있다.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두 작가분이 건네주신 말은

본인들이 작가가 되기 위해 연습하던 시절 선배 작가들이 해주었던 말이다.

박연선 작가는 처음 글을 배울 때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 중 작가에게는 세 가지가 필요한데

밖에서 할 수 있는 취미, 평생 붙잡을 수 있는 화두, 그리고 규칙적으로 쓰는 것을 말씀하셨다 한다.

박해영 작가는 그에 하나를 추가하기를 마지막 네 번째 조건으로 체력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리고 박수와 함께 그렇게 2시간의 강의는 마무리된다.


마지막으로, “또 오해영”과 “청춘시대” 두 드라마 다 대사로 주목받고 많은 명대사를 남겼기에

대사를 쓸 때 사실 이런지, 이런 말을 정말 하는지, 가장 적확한 단어가 무엇인지 고민한다는

박해영 작가와 박연선 작가의 마음을 담아 몇 가지를 옮겨본다.



“또 오해영”


-

“우리 결혼하지 말자. 미안해. 내가 그 정도로 사랑하진 않는 거 같아.”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네가 밥 먹는 게 꼴 보기 싫어졌어.”


-

“근데 만약에 내가 완전히 사라지고 걔가 된다면,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난 걔가 되기로 선택할까?

안 하겠더라고요. 난 내가 여기서 조금만 더 괜찮아지길 바랐던 거지, 걔가 되길 원한 건 아니었어요.

난 내가 여전히 애틋하고, 잘 되기를 바라요. 여전히.”


-

“별일 아니라는 말보다, 괜찮을 거란 말보다

나랑 똑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게 백배 천배 위로가 된다.”


-

“든든해요. 어딘가 나랑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

나는 내가 못나서 그런 일 당한 줄 알았는데, 잘난 사람들도 나처럼 결혼 전에 차이는구나.

미안해요. 그쪽 상처가 내 위로라고 해서.”


-

“먹는 거 이쁜데?”

“?”

“결혼할뻔한 남자가 그랬다며. 먹는 게 꼴 보기 싫어졌다며.

괜찮다고, 먹는 거.”


-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한 거, 이상하게 그 사람한테만 다 말하게 돼.

한 번 까니까 겁 없이 다 까게 되는 건가?”

“원래 남녀 사이가 그래. 십 년 된 동성 친구한테도 말 못 하는 거,

내가 비벼도 될 구석이다 싶으면 만난 지 1분도 안 된 남자한텐 할 수 있어.”

“왜 그럴까?”

“남녀니까. 남녀 사이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어.”


-

“짠해서 미치겠어요.

내가 던진 돌에 맞아서 날개가 부러졌는데, 바보처럼 내 품으로 날아들어 온 새 같아요.

빨리 나아서 날아갔으면 좋겠는데, 어떻게든 빨리 낫게 해서 날아가게 해주고 싶은데.

그러다가 행여나 좋아질까 봐.”




“청춘시대”


-

“소리 내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군가 내 목소리를 들어줬으면 싶을 때가 있다.

듣고서 ‘괜찮다’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토닥여줬으면 좋겠다.”


-

“그러고 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무례하고, 난폭하고, 무신경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만했다. 나와 같다. 나와 같은 사람이다.

나만큼 불안하고, 나만큼 머뭇대고, 나만큼은 착한 사람.”


-

“그러니까 내 말은 내 얘기가 정답은 아니라도 사람마다 죄다 사정이라는 게 있다는 거야.

그 사정 알기 전까진 이렇다저렇다 말하면 안 된다는 거고.

예은이뿐만아니라 강언니도 그렇고, 윤선배도 그렇고. 너만 해도 그런 거 하나쯤은 있을 거 아니야.

남들은 도저히 이해 못 해도 너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어떤 거.

그러니까 남의 일에 대해선 함부로 이게 옳다 그르다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야.”


-

“저 남자는 좋은 남자가 아니야.

제멋대로고 아무렇지 않게 약속을 어기고 툭하면 화를 내고 거짓말도 했어.

저 남자를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는 수만 가지야.

그중에서도 제일 나쁜 건 내가 원하는 만큼 날 좋아해 주지 않는다는 거.

저 남자를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는 수만 가지. 그 사람을 좋아해도 되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좋아하니까. 좋아하니까. 너무너무 좋아하니까…”


-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힘들다는 거”

“좋아하면 알게 돼요”


-

“나는 보통의 연애를 했어. 보통의 이별을 할 거고.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 잊을 거야. 알아. 언젠가 잊을 거라는 거. 언젠가 잊힐 거라는 거.

그게 위로가 되면서도 또 그게 슬프기도 해.

한 사람을 잊고 다음 사람을 만날 거야.

그때 만나는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날 더 좋아해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누군가를 더 많이 좋아하는 건 충분히 해봤으니까.”



서울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19. 그들은 멋졌다.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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