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멋졌다
12월 20일, 삼성동 코엑스.
스토리 창작자를 위한 다섯 번째 토크 콘서트.
“트렌드를 넘어 장르의 길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온 이메일에 이번에는 어떤 분이 오실까 설레는 마음으로
이메일을 열어보니 이미 제목에서 조금 짐작할 수 있듯 김은희 작가와 장항준 감독이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측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감독의 등장이 새로웠고,
워낙 유명한 듀오지만 함께 출연했던 무한도전 편을 보지 않았기에 무엇보다 부부의 조합이 궁금했다.
김은희 작가
드라마 “시그널” (2016, TVN)
드라마 “쓰리데이즈” (2014, SBS)
드라마 “유령” (2012, SBS)
드라마 “싸인” (2011, SBS)
드라마 “위기일발 풍년빌라” (2010, TVN)
영화 “그해 여름” (2006)
장항준 감독
영화 “끝까지 간다” (2013)
영화 “드라마의 제왕” (2012)
영화 “불어라 봄바람” (2003)
영화 “라이터를 켜라” (2002)
영화 “북경반점” (1999)
드라마 “위기일발 풍년빌라” (2010)
책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장르물과 친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 김은희 작가의 작품 중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작품은 없다.
물론 드라마는 새롭고 낯선 것도 훨씬 편하고 친숙하게 접하게 해주기 때문에
막상 앉아서 봤더라면 재밌게 봤을 거 같다.
그러나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말대로
“SF나 추리 등 장르문학은 매우 전문적인 문학이다. 그 장르의 문법을 모르면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다.”
그래서 나에게는 늘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장르물은 접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메일이 오자마자 또 한 번 신청하고 간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물론 선배 작가와 감독을 만나는 것 자체도 귀한 기회이지만
앞서 말했듯이 작가와 감독 부부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특히나 김은희 작가가 드라마 작가가 된 배경에는 남편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서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도와주고, 함께하는 점이 부러웠다.
또 장르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 부분 부분 재밌게 봤던 “쓰리데이즈”가 생각났고,
“싸인”에서 “유령,” “쓰리데이즈”에서 “시그널”까지 김은희 작가의 작품들은 매번 깊이가 더해졌기 때문에
정말 성실하게 노력하며 쓰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좋았다.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글은 발로 써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작년에 어떤 주제에 대해 쓰기 위해 찾아보고 공부하면서 그 말이 참 와 닿았기 때문에 꼭 만나고 싶었다.
대학로에서 연 강의들은 더 아담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풍겼다면,
코엑스에서 한 강의는 더 세련되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박경림 모더레이터의 진행하에 토크콘서트가 시작되고
김은희 작가와 장항준 감독이 무대에 올라와 인사를 하는데 정말 잘 어울려서 시작부터 부러웠다.
그 짧은 시간 안에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던 건
성격도 말투도 참 다른데 그 다름이 합쳐질 때 균형을 이뤄 좋은 부부이자 친구이자 동료인 거 같았다.
편하게 듣고 오려 했지만 들으면서 새롭거나 공감이 가거나 위로가 된 부분들을 수첩에 적다 보니
어느새 까맣게 꽉 채워져 버려 그중 몇 가지를 나눠보고자 한다.
첫 번째,
“이 얘기를 (꼭) 하고 싶다” (김은희 작가)
김은희 작가가 어떻게, 아니 어쩌다 드라마 작가가 되었는지는 다시 들어도 신기하다.
예전에 장항준 감독은 시나리오를 손으로 썼는데, 제출하기 위해 컴퓨터로 옮겨야 해서
도와주려고 대신 옮겨 치다 너무 재밌길래 자기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
그렇게 이 길로 접어들게 된 김은희 작가는 처음 인사할 때 장항준 감독이
김은희 작가의 남편이라 소개해 다들 웃었던 것처럼,
지금은 장르물에서는 물론이고 전반적으로 제일 잘 나가는 대한민국 드라마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런 김은희 작가를 보며 장항준 감독은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이전에
무엇보다 정말 좋아서 하는, 좋아서 쓰는 작가라 설명한다.
결국, 정말 글 쓰는 게 제일 재밌고, 글을 안 쓰면 죽을 거 같은 사람들이 끝까지 쓰게 되기에,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잘하는 것은 당연한 거 같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성공의 비법이다.
모든 작품에 있어 “이 얘기를 (꼭)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다는데
그 마음으로 임하기에 시청자들에게도 진심이 통한 게 아닌가 싶다.
두 번째,
“감이 맞는 파트너” (장항준 감독)
두 시간 강의 내내 여러 차례 언급될 만큼 강조하신 부분이었다.
특히나 이 일에서는 감이 맞는 파트너가 꼭 필요한데, 그 감이 맞는 파트너는 어떤 사람이냐면
내가 재밌다 느끼는 걸 그 사람도 재밌다 느끼는 사람이라 설명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본인과 감이 맞는 파트너, 그렇게 두 명의 관객은 확보한 채로 시작하는 건데
그 존재가 두고두고 굉장히 힘이 된다 한다.
또한, 나와 감이 맞는 사람이 짚어주는 장단점이 가장 정확하기에 제일 좋은 팀을 이룰 수 있다.
이전에 “청춘시대”를 쓴 박연선 작가가 한 말 중 한글을 깨친 사람이라면 꼭 한 마디씩이라도 토를 단다는
말에 웃었었는데, 그렇다면 어떤 지적을 받아들이고 어떤 지적은 걸러내야 하느냐에 있어
여태껏 들은 조언 중 가장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 않았나 싶다.
한 예시로 “시그널”을 구상할 때 이 작품은 안될 거라는 걸 비롯한 여러 지적이 있었는데,
그중 무전기를 빼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한다.
작품이 다 끝난 상황에서 돌아볼 때 어떻게 무전기를 뺀 “시그널”을 상상할 수 있겠냐만,
시작하기 전에는 무전기 때문에 안될 거라는 지적이 있었다니.
그런 식으로 사람마다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이 너무 다르므로
모든 지적을 받아들이면 작품은 작가의 작품도, 그 사람의 작품도, 그 누구의 작품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모니터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을 더 빨리, 잘 갈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이 맞는 파트너가 있어야
가장 정확하게 보완할 부분들은 보완하고 유지할 부분들은 유지하며 깊이를 더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감독에게 좋은 작가가 필요하듯 좋은 작가에게 좋은 감독이 필요하고,
그 합이 맞을 때에는 시너지를 뿜어내게 된다.
세 번째,
“사람 관계”
이전 강의들에서는 작가분들만 모셨던지라 별로 언급되지 않았던 주제인데,
이번에는 작가와 감독 두 분 다 계셨기에 사람 관계와 일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왔다.
무엇보다 특히 지망생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조언은 정확하게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사람과 잘 지내는 것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의견이 다를 경우에는 눈치 보지 말고 분명하게 본인의 생각을 말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정확한 의사전달과 그에 따른 이견조율이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그 외에 김은희 작가가 했던 말 중 몇 가지를 적어보자면,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평상시에 이야기를 잘 캐치(catch)할 수 있는 능력과 훈련이 되어있어야 한다.
주로 일상에서 소재를 많이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관심을 늘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비슷한 문맥에서 독창적인 것과 터무니없는 것의 차이가 뭐냐는 질문에 김은희 작가의 답은
사람이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였다.
또한, 자기가 작품을 쓸 때 꼭 지키려 하는 건 자료조사인데,
머리로 쓰는 것과 발로 쓰는 것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주제에 대해서 공부하고, 인터넷에 찾아보고,
기사를 수집하고, 전문가를 만나보고, 경험을 해보는 등 자료조사는 너무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그 외에 장항준 감독이 했던 말 중 가장 공감이 가고 마음에 남았던 이야기는
본인의 직업을 선택한 이유였다.
“내가 행복하려고 선택한 직업인데, 그러면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라는 말이,
직업의 본질을 생각하라는 말이 정말 핵심 같았다.
옛날에 윗사람이 “공부를 잘했는데 삼성에 가지 않고 SBS에 온 이유를 생각하라”라고 한 적이 있는데,
창작하고 싶어서 삼성도, 금융계도 가지 않고 왔는데
그러면 정말 쓰고 싶은 걸, 만들고 싶은 걸 잊지 않고 잃지 않고 해야겠다는 마음이 박혔단다.
그와 더불어서 무얼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왜 만들어야 하는지, 왜 시청자들에게 필요한지를
명확하게 짚고 끊임없이 고민하면 좋은 작품으로 이어진다 한다.
그 외에 Q&A 시간에 한 대답 중 순수한 건 인간의 정신이지 장르가 아니므로
순문학, 대중문학, 장르문학을 가르기보다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면 그게 문학의 미래가 되는 것이고,
또 좋은 제작사는 거장들과 일하는 제작사가 아니라 거장을 키워내는 제작사라 한 대답이 힘이 됐다.
“20년 후에는 변한 것이 없습니까?”
“시그널”에 나왔던 대사다. 이 대사 하나로 감독과 배우 모두 섭외할 수 있었다 한다.
그렇게 연습과 훈련과 성실과 노력을 통해 갈고닦으면
문장 하나로 사람을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의 매력이다.
뭐가 어떻게 될지 그 무엇도 예측할 수 없으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을 해야 하고,
그러다 기회가 오면 꼭 잡아야 하고,
어떻게든 견뎌내야 꿈을 이룰 수 있다고 견뎌내길 바란다는 부부의 위로가 더욱 따뜻하게 와 닿았다.
내가 만난 장항준 감독은 정확하고 솔직하게 후배들을 위해 조언했으며
김은희 작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 모두 정성을 담아 진심으로 건넸다.
누구보다 따뜻한 선배이자, 누구보다 멋진 팀.
누구보다 깊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누구보다 서로를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
김은희 작가와 장항준 감독의 콤보는 평생 부러울 것 같다.
제일 감이 잘 맞는 파트너와 꼭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
한평생 함께할 든든한 친구와 함께 한평생 사랑하는 일을 하는 것.
김은희 작가, 장항준 감독.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위해 준비할 때 몇 년간 생활고를 겪다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때 아내가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으며
‘장항준은 할 수 있다. 좋은 감독이 될 거다'라고 말해줘 1년의 시간을 더 얻게 됐다.
나도 지킬 수 없었던 내 꿈인데 그걸 아내가 지켜줬다.”
장항준 감독
서울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20. 그들은 멋졌다.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