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있잖아요

있잖아요, 그 열세 번째

13. 미생

by 일요일은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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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요,


2014년 여름에 입사하고 그해 가을에

굉장히 화제가 됐던 드라마가 있었는데

바로 “미생”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적응하는데도 정신이 없고 한주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갔기 때문에

집에 돌아와서 TV며 컴퓨터며 할 여유가 없었어요.

한국 사회, 한국 회사. 거꾸로 뒤집으면 서로가 되듯 사회생활도 회사생활도 처음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는 주위 사람들이 다들 “미생” 봤냐며 드라마 얘기를 해도 보지 않았는데

최근에 바빴던 일을 끝내고 탄탄한 드라마를 보고 싶은데 무엇을 볼까 하다가 “미생”이 떠올랐어요.


“‘그래 봤자 세상에 아무 영향 없는 바둑.

그래도 나에겐 전부인 바둑…’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휠체어에 탄 채 대국했던 조치훈 9단의 이 말처럼

남들이 보기엔 사소하고 작은 일일지라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정치’가 아니라 ‘일’로 평가받으려고 애쓰는

이 땅의 모든 건강한 직장인들을 위한 송가가 되고자 한다.”


“미생” 기획의도 중


웹툰이나 드라마를 통해 많이들 보셨겠지만, 너무 재밌더라고요.

하루에 한 회씩 이제 반 정도 봤는데, “골든타임”과 “연애의 발견” 이후로

가장 재밌게 보고 있는 드라마가 아닌가 싶어요.

차이가 있다면 “골든타임”이나 “연애의 발견”은 비슷한 상황이나 배경에 처해있지 않았지만

“미생”은 모든 상황, 매 순간이 옛 기억을 떠오르게 하고 지나간 순간들을 생각나게 해서 새롭더군요.


그런 책들 있죠?

읽을 때마다, 특히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더 들어 다시 읽을 때 감회가 새로운, “어린 왕자” 같은 책들.

다른 드라마도 그럴 수 있겠지만 “미생”이 특히나 더 그렇게 다가왔던 거 같아요.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기 전에 봤더라면 긴박한 상황에 흥미를 느껴도 공감은 하지 못했을 테고,

(이걸 보고 입사했더라면 한국 사회와 회사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텐데 말이죠)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중에 봤더라면 씁쓸해하거나 통쾌해하거나 공감하며 봤을 텐데,

한국에서 첫 직장생활을 마친지 벌써 일 년 반 즈음이 되어가는 지금은 –


일 년 반이란 세월이 지나 입사했을 때보다 나이를 두 살 더 먹은 게 생각보다 큰 차이인지

지금은 회사를 보게 되는 시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어떤 식으로냐면 –


회사에 다닐 때와 퇴사한 직후에는 초점이 나 자신과 나 자신의 이익 또는 만족에 가 있었어요.

내가 가서 무얼 배울 수 있고 어떻게 성장할 수 있고부터 어떻게 하면 챙길 건 챙기고 누릴 건 누리며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들을 요구하고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나를 위한 부분에 많이 중점을 뒀었어요.

당연한 거라 생각하면 당연한 태도이고, 이기적인 거라 생각하면 이기적인 태도인

회사에서 나를 챙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나 자신은 내가 챙겨야 한다는 모습이 많았죠.


근데 퇴사를 하고 대학과 직장에서 쉬지 못했던 걸 몰아서 푹 쉰 후

앞으로는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나,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고민하다

그 과정에서 헤매기도 헤매고, 방황하기도 하고, 길을 잃은 채 멍하니 주저앉아 시간을 보내며

한 가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깨달음을 얻은 건

제가 던진 질문에 아주 중요한 단어를 하나 빼먹고 있었단 거였어요.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보다

크리스천으로서 어디를 가고, 크리스천으로서 무엇을 하며,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단어 하나 빠진 건데 차이가 너무 큰 거예요.

이전에는 시선을 나에게 맞췄다면, 그 단어 하나를 추가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되더라고요.

내가 회사에서 크리스천답게 일을 하고 사람들을 대했었나?

회사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흐뭇하셨을만한 빛과 소금이 되었었나?

모양은 크리스천인데, 그 속까지 꽉 찬 진정한 제자다운 삶을 회사에서도 살아냈었나?

다른 동기들, 상사들이 보기에도 애가 참 괜찮은데 교회 다닌다더라,

안 믿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교회 다니는 사람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는

과연 그런 삶을 살았었나…


모양은 확실한 크리스천이었어요. 그리고 그러함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죠.

절대 타협하지 않은, 꼭 지켰던 세 가지가 있었는데 예배, 술과 십일조였어요.

예배시간 전과 후에 출근할 테니 예배시간만큼은 꼭 지켜야 한다던,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술에 취해 윗분들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도 버티던,

또 얼마 되지 않는 데 십일조는 나중에 더 많이 벌 때 낼까 싶어도 매달 챙겼던.

당연하면서 어려운 세 가지를 지켰기에 부서 안에서도 교회 다닌다는 걸 다 알고 있었고

저 또한 여러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랬는데,

근데,


그게 정말 크리스천답게 직장생활을 한 거였을까. 그게 정말 회사에서 빛과 소금이 되었던 걸까.

퇴사하고 시간이 한참 지나 감정을 내려놓고 한걸음 물러나 돌아보니 좀 다른 생각들이 드는 거예요.

과연 나는 모양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속도 정말 크리스천다웠던 걸까.

안 믿는 사람들이 더 많던 조직 속에서 그들이 보기에도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르구나 싶을 만큼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걸까 하는…


“미생”을 보면서 네 명의 신입사원 중에 누가 크리스천이라면 자랑스러울까 생각해보는데

실력도 좋으면 좋겠지만, 무엇보다 성실하고 끈기 있는, 순수하고 열심히 하는

주어진 위치에서 불평하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니라 억울한 상황이라도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장그래나 안영이 같은 사람이 본받고 싶은 크리스천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셉 같은 친구들 있잖아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겸손하고 진실하게 우리를 섬기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으로 나가 주어진 자리에서 축복에 감사하며 진정한 섬김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과연 나는 장그래나 안영이 같이 살았던가.

남이 보기에도 저 친구는 뭔가 다르다 싶을 만큼,

그래서 동료들이 함께 일하고 싶고 같은 팀에 배치받고 싶어 하는,

이 사람이 있다 하면 든든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삶을 살아냈던가.

저 친구가 믿는 신이라면, 저 친구가 다니는 교회라면 다니겠다고 할 만큼

세상에서 온갖 비난을 받는 약해진 오늘날의 교회와 다른 모습을 보였던가.


말보다는 행동과 태도 –그 사람의 삶에서 배어 나오는 향기 있잖아요.

술을 마시지 않고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는 것도 중요하고 기본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대놓고 드러나는 것보다 일을 대하는, 사람을 대하는,

회사를 대하고 삶을 대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예수님의 향기 있잖아요.

김대리가 장그래한테 너는 도대체 어떤 과거를 살았길래, 어떤 사람이길래 그럴 수 있냐는 물음에

‘사실 제가 교회를 다닙니다,’ ‘저는 크리스천입니다’라 말할 수 있는 그런 모습 있잖아요.


예전에 Tim Keller 목사님이 안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교회에 발을 들이게 되는지 이야기하시다

어느 주일 자기가 만난 한 새 신자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어요.

교회 다니는 집안에서 자랐다든지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든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회사에서 꽤 잘 나가다가 어떤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큰 잘못을 했대요.

본인 잘못이기에 본인이 책임지고 회사를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자기 위에 상사가 대신 책임을 지겠다 해서 자기는 회사에 남게 되고

대신 그 상사는 몇 달 감봉을 당하게 됐다는 거죠.

본인의 잘못도 아니고,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이해가 안 가서,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도대체 왜 내 잘못을 대신 덮어썼느냐, 왜 나를 살려줬느냐 물어보니

처음에는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만 하다 그런 대답을 했다는 거예요.

자기는 교회를 다니는 크리스천인데, 자기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에 자기도 대신 질 수 있는 책임이라면 본인이 진다고.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닮기 위한, 닮고 싶은 노력이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꽤 충격을 받은 여자는 당신이 다니는 교회가 어디냐 물었고

그 길로 바로 그 주부터 Tim Keller 목사님이 계신 교회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거죠.

그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그가 다니는 교회는 어떤 곳이고 그의 종교는 어떤 종교인지,

도대체 어떻길래 그렇게 사랑과 희생을 실천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저 친구 좀 신기해. 좀 달라 다른 신입들하고.”

“교회 다닌대. 교회 다니는 친구래.”


나는 그런 삶을 살았던가.

발꿈치만큼이라도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보였던가.


내 삶을 살아내기에도 너무 바쁠 땐 그런 게 보이지도 않고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는데

처음으로 인생에 브레이크를 밟고 잠시 쉬어가는 지난 몇 달간의 시간 동안

찬찬히 하나님과 대화하니 그런 것들이 보이고 느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인생을 살아내는 데 급급한가 아니면 제자답게 살아내는데 열심을 다하는가.

나는 그런 삶을 살았던가. 발꿈치만큼이라도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보였던가.


같이 성경공부를 한 집사님이 예전의 직장생활 이야기를 하시면서 본인의 간증을 들려주셨는데

원래는 본인도 굉장히 무서운 선배이자 실적을 최우선으로 꼽는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교회에 다니면서부터는 이전처럼 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셨대요.

그러던 중 새로 배치된 팀에서 까다롭고 어려운 상사를 만나게 됐는데

아무리 심한 핍박을 당해도 그냥 묵묵히 참아내고 오히려 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보며

후배들이 은혜를 받더라는 거예요.

이전에 본인이 팀을 몰아쳐서 실적이 잘 나올 때는 상사들이 좋아했는데

그러한 모습을 내려놓고 조금 더 진정한 섬김의 모습을 닮기 위해 노력하니 후배들이 은혜를 받더라는 거죠.


“도대체 선배님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저 팀장님하고 일하고 싶다.

저 신입 참 괜찮다.

저 선생님에게 아이를 맡기고 싶다.

저 간호사는 아무리 바빠도 늘 친절하다.

저 아르바이트생은 궂은일도 불평불만 없이 웃으면서 한다.

저 연습생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정말 열심히 한다.

저 선배는 상사한테만이 아니라 후배들도 가족처럼 아끼고 챙긴다.

저 직원, 참 잘 뽑았다.


“교회 다닌대.

교회 다니는 친구래.”


회사는 낯설고 어려운 곳이었어요. 그곳에서의 생활은 답답하고 힘들었고요.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막아내기에 급급하고, 살아내기에 급급하고.

근데 한 발짝 물러서서 나의 시선으로가 아니라 남의 시선으로 삶을 돌아보니 다르더라고요.

회사에 다니는 건 다 그런 건가? 어디에 가도 똑같을까? 결국 이런 인생인 걸까?를 고민하다

나는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었는가? 나는 그곳에서 제자다운 모습을 보였는가? 하는 고민으로.


왜 나는 좀 더 장그래답게, 좀 더 안영이답게 살지 못했을까 자책하는 마음이 들던 와중

어젯밤에 9화를 보는데 장그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 걸어 내려가는 길, 김대리와 장그래가 그런 대화를 나누더라고요.


김대리:

“당신 실패하지 않았어.

나도 지방대 나와서 취직하기 되게 힘들었거든.

근데 합격하고 입사하고 나서 보니까 말이야

성공이 아니라 그냥 문을 하나 연 것 같은 느낌이더라고.

어쩌면 우리는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


장그래:

“그럼 성공은요?”


김대리:

“자기가 그 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린 문제가 아닐까?

일하다 보면 깨진 계약인데도 성장한 것 같고 뿌듯한 케이스가 있어.

그럼 그건 실패한 걸까?”


장그래:

“졌어도 기분 좋은 바둑이 있어요.

그런 걸까요?”


김대리:

“잘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까?”


그 대화가 흘러나오는 동안 다른 직원들의 모습도 보여주는데

안영이가 서랍 안에서 어떤 상자를 꺼내 이전 회사의 사원증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며

마음 안에 뾰족하고 날카롭던 자책 속 어떠한 위로가 됐어요.


비록 그곳에 있던 시절 제자다운 삶을 살아내지 못했고

그래서 그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큰 빚을 진 채 떠나왔다는 생각의 요즘이지만,

“깨진 계약인데도 성장한 것 같고 뿌듯한 케이스”가 있듯이

이 경험이 나를 성장하게 했고, 다음에 머무르게 될 곳에 중요한 자양분이 될 테니까요.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그런 삶을.


있잖아요, 그 열세 번째

13. 미생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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