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있잖아요,
지난번 모세의 고백에 이어 이야기하려고 해요, 요번에는 다니엘과 아브라함에 대해서.
하나님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두고 저라면 치열하게 고민하며 고뇌했겠지만
그들은 흔들림 없이 타협 없이 내린 결정에 대해서.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선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이르되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로 말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
다니엘 3:1, 4-6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죠.
느부갓네살 왕은 금으로 신상을 만들고 모두 경배하라 명령합니다.
그리고 순종하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겠다고 하죠.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르되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모든 사람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려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다니엘 3:8-12
근데 다니엘의 세 친구는 타협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겠다는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외에 신에게는 절하지 않죠.
그들을 시기하던 사람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에게 고해 결국 세 친구는 왕 앞에 불려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을 한다면 살려주겠다는 마지막 기회를 얻습니다.
고집부리다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지거나, 눈 딱 감고 금 신상 앞에 절해 목숨을 건지거나.
승승장구하는 세 친구를 모두 시기하는 가운데 드디어 음모에 빠뜨려 죽일 기회를 잡았는데
코앞에 닥친 죽음의 위기에서 절 한번 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견져내시리이다”
다니엘 3:16-17
근데 여기서 세 친구는 또 한 번 대단한 결정을 내리죠.
아무런 타협이 없습니다. 끝까지 절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궁지에 몰려 정말 삶과 죽음 가운데 선택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도 그들은 끝까지 타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전능자이시라는 걸 믿기에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져도 하나님은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데, 여기서 뛰어내리면 즉사하는 건 뻔한데
그 앞에서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내실 수 있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전혀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말을 하는 거죠. 그 친구들의 믿음은 그런 깊이에서 비롯됐던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3:18
근데 사실 그 고백의 진정한 핵심은 그다음에 따라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아소서. 우리는 당신의 신을 섬기지도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죽음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모습, 또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살려주실 수 있다는 믿음.
근데 그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이 건져내지 아니하실지라도,
그래서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그러더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신상에 절하지 아니할 것이라 답하는 겁니다.
17절의 고백도 대단하지만, 사실 18절의 고백이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하나님께서 건져주시지 않더라도 여전히 우리가 섬기는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고백.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기에, 설령 풀무불에 던져질지언정 하나님의 계명은 어기지 못하겠다는 고백.
가장 값진 것,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라는 고백.
그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
저 자신을 돌아보면 17절의 고백만 기억하고 18절의 고백은 기억하지 못하는 때가 많은 거 같아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 부분은 고려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하실 수 있고 그리하실 거라 믿고 싶으니까.
근데 그건 앞서 모세에게 던져졌던 똑같은 상황에서
결국 하나님보다 약속의 땅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허락해주실 약속의 땅을 사랑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삶 속에서 17절의 고백이 세 친구의 고백과 같은 의미를 갖지 않을 때가 많은 거예요.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게 아니라, 내 뜻대로 해주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모세처럼 하나님과 함께 들어가지 않을 땅이라면
약속의 땅이라 한들 차라리 광야에 남겠다는 고백이 아닌
천사를 미리 보내주시면 더없이 훌륭하고 혹 그렇지 않더라도 약속의 땅이면 그걸로 충분하니
일단 그 땅으로 하루빨리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거죠. 나의 초점이 잘못된 곳에 맞춰져 있는 거예요.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세기 13:8-9
아브람과 롯 각자의 소유가 많아짐으로 인해 그들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기 시작하니
아브람은 서로 떠나자고 제안합니다.
근데 롯이 조카고 더 어리니 자기가 먼저 선택한 후 남은 땅으로 떠나라는 게 아니라
그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롯에게 양보합니다.
롯이 좌하면 아브람은 우로 가고, 롯이 우하면 아브람은 좌로 가겠다는 것이죠.
땅을 살피고 어디가 날씨가 좋고 토양이 좋고 이런 걸 따져도 모자랄 판에
롯에게 온전히 그 선택권을 넘겨주는 겁니다.
아브람은 알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좌인지 우인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라는 걸.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좌냐 우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이 땅에 삶의 의미를 두기보다는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라만으로 만족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던 거죠.
올 초 청년부 특별새벽기도회에서 신도배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탄이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이 시련을 주실 때 낙심하고, 절망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면 우리는 사탄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거죠.
근데 우리가 그걸 뛰어넘어 고난을 감사로 또 신뢰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사탄의 예측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탄의 계획에는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게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때부터 사탄은 더는 우리를 조종할 수 없게 됩니다.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복잡해질수록 기대해봐요.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 어떻게 풀어가실까?
물론 저도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진실이라 생각할 때가 많으니까.
근데 어쩌면 우리가 덜 계획할수록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더 늘어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그리하실지라도, 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해보는 거예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좌냐 우냐가 아니니까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행이니까요.
“그래도 우리는 예수가 전부이기 때문에
예수를 포기할 수 없다.”
몇 달 전에 생명의 삶에서 읽었던 마음에 오래 남은 간증이에요.
신앙 때문에 모든 걸 뺏기고 핍박받으면서도 믿음을 놓지 않은
가장 소중한 고백.
그리하실지라도, 혹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어노인팅의 찬양 가사처럼, 예수님만을 더욱 사랑.
“예수님만을 더욱 사랑, 날이 갈수록 더욱 사랑
고난이 와도 더욱 사랑, 내 삶의 고백 더욱 사랑
주님 한 분만 더욱 사랑, 그 무엇보다 더욱 사랑
그 누구보다 더욱 사랑, 내 영의 고백 더욱 사랑
나 사는 동안 더욱 사랑, 숨질 때에도 더욱 사랑
저 천국에서 더욱 사랑, 신부의 고백 더욱 사랑”
있잖아요, 그 스물다섯 번째
25.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
“성공해서 모은 많은 물질을 선한 일에 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직 주님만 바라고 구하며 사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무기는 물질적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족할 힘을 갖는 것이다. 그러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두려움은 사탄이 넣어 주는 생각이며, 세상의 모든 비극은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구약에는 요셉과 다윗, 다니엘 등 성공한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만을 의지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 성경 안에서 의미가 있다. 예수님의 모습보다 이들의 성공이 부각되는 것은 성경의 참뜻이 아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한 나라를 이끌 만큼 크게 성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길 원한다고 하지만, 그 속에 우리의 욕심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자녀가 요셉처럼 종으로 팔려 가고 옥에 갇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기도는 부모가 먼저 성령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자녀에 대한 기도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주님이 거하시는 가정 안에서 자녀는 천국을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김의수 & 데이비드 서, “돈 걱정 없는 크리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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