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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일은 쉽니다 Apr 26. 2017

있잖아요, 그 스물여섯 번째

26. 지도자의 중심




있잖아요,


이전에도 나눴지만 대학생 때 한 선교단체에 속해있었어요.

간사님들의 로테이션은 비교적으로 빠른 편이었기에 한 사역지에 몇 년 계시다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시고 그랬죠. 덕분에 다양한 간사님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어요.

또 캠퍼스마다 간사님들과 함께 총괄하는 학생 대표단이 있었는데,

이 또한 해마다 신입생들이 들어오고 졸업생들이 나가며 새로 구성되었고요.

그렇게 간사님들과 대표단의 리더십 하에 운영됐기에 서로의 협업이 정말 중요했죠.

어느 단체나 마찬가지이지만 서로 마음이 잘 맞아야 일이 더 수월하게 진행되니까요.


근데 졸업한 후에 돌아갔을 때, 우연히 학생 스텝으로 섬기고 있던 후배랑 대화하는데

총괄하시는 간사님과 학생 대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대표를 맡은 친구가 너무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간사님의 말에 늘 반대한다.

그래서 스태프끼리 회의하면 분위기도 어두워지고 다른 학생 스텝들도 그 사이에서 눈치 보게 되고

또 때로는 학생 대표가 선을 넘는 감도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간사님한테 죄송하다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민수기를 묵상하고 있던 시기였는데,

마침 며칠 전에 민수기 12장을 읽은지라 겹치는 상황에 놀라기도 했고 또 위험하다 싶었어요.

물론 성향이 다를 수 있고 스타일이 다를 수 있지만, 다른 학생 스텝들이 보기에도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날을 세우고 있다면 돌아볼 필요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었죠.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민수기 12:1-2


그럴듯해 보이는 주장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여정에 있어

모세와 함께 지도자의 역할을 맡았던 아론과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본인들도 모세와 같은 권위에 있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혹은 모세가 그렇게 남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 강했겠죠.

하나님은 모세의 하나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공평한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들의 말을 놓고 보면 상당히 그럴듯한 주장입니다.

그래서 뭔가 흠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사건이 생겼을 때 더더욱 모세의 권위를 멸시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만 섞인 말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 세 사람을 부르시죠.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민수기 12:5-9


하지만 사람은 그럴듯한 주장에 마음이 혹할지언정

하나님은 각 사람의 중심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세 사람을 나아오라 하시고 그 자리에서 아론과 미리암의 잘못된 마음을 문책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을, 하나님 마음에 흡족한 종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종을

사람이 잘못된 마음으로 험담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죠.

정암 주석에는 “미리암과 아론은 자기들에게도 모세의 영권과 같은 은혜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명백히 그들의 반역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유기성 목사님의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제가 겉으로는 온화한 성격처럼 보이지만, 속마음은 가시투성이에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몰랐습니다.

한 번은 친구 목사님들과 대화를 하다가 어떤 목사님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조금도 문제라고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제가 분별력 있고 똑똑하고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는데 약간 우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기도하는데 기도가 안 되고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주님, 제가 회개할 것이 있습니까?’

주님은 제가 그 목사님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한 것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나는 오늘 목사들과 모인 자리에서 네가 그렇게 말한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도 내가 택한 종이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회개하였습니다.

그 후 저는 비판하는 죄를 짓지 말도록 성도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잘못을 하거나, 혹은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자기 의로움에 취하거나,

그 두 가지는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인 것 같습니다.

죄를 짓거나, 죄를 지은 사람을 정당하게 비판하는듯하며 본인도 모르게 자신의 의로움에 심취하는 것이죠.

분명한 것은 그 둘 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민수기 12:13


근데 모세가 참 대단하다 싶은 건 이 일이 있고 난 뒤 그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미리암은 나병에 걸리고

아론은 자기들의 어리석은 일을 회개하며 모세에게 해결해 달라 부탁하죠.

솔직하게 생각해볼 때 저였더라면 나를 모함하고 비방한 사람들이 화를 입는 걸 보고

조금 통쾌했을 것 같아요. 아니, 조금 많이 통쾌했을 것 같아요.  

근데 모세는 다릅니다. 미리암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기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고 미리암은 치유됩니다.


이러한 반역은 지도자들 사이에서만 서열 혹은 권력 싸움하듯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론과 미리암의 반역에 이어 고라의 반역이 일어나죠.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민수기 16:1-3  


아론과 미리암의 주장과 상당히 흡사합니다.

아론과 미리암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만 말씀하신 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말씀하셨다고 주장한 것처럼

고라가 새롭게 세운 당의 사람들 또한 모세와 아론만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 또한 거룩하고

하나님은 특정 지도자들에게만 아니라 모든 이들과 함께하신다고 주장합니다.

편집해서 그 부분만 들으면 맞는 말이죠.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리고 더 나아가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 높아졌다며 그들의 자만함을 (잘못) 지목하는 확인 사살을 합니다.

즉 사실이 아닌 자극적인 모함으로 선동하고 반대 세력을 정의로워 보이는 주장으로 단결시키죠.  

그 당시 광야에서 말도 안 듣고, 체험한 기적과 받은 은혜는 돌아서면 곧바로 잊고,

늘 불평불만으로 가득하던 백성들에게 얼마나 혹할만한 주장이었을까요.

게다 고라, 다단, 그리고 온의 리더십 하에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이 나선 반대세력인데

시시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름 있는 사람들이 불공평한 사회라며 백성을 위한다는 정의를 들고 일어섰으니

굉장히 매력적이고 또 논리적으로 다가오는 주장이었을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노예생활이 나았다고 말도 안 되는 불평을 하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분노를 쏟아낼 수 있는 희생양을 찾은 거죠.


뭔가 지도층이 잘난척하는 것 같아 보이고, 자기네들만 누리는 것 같아 보이고,

하나님을 핑계 삼아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것 같아 보인다 생각했던 거겠죠.  

무능한 지도자를 잘못 만나서 백성들이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내가 이들을 낳았냐고 울부짖던 모세의 고뇌는, 그의 어깨에 놓였던 막중한 책임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그들만 누리는 것 같고 그들만 편한 것 같고 그러지 않았을까요.

게다 자기들의 원망과 불신앙으로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게 됐는데도

모세 보고 왜 우리를 광야에서 죽이려 하냐고 따지고 있었으니

이름 있는 사람이 당을 짓고 그럴법한 당론을 정하고 권력에 맞서는 반대세력을 모을 때

그 말에 동조하기 쉽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택하신 지도자 모세를 따르기보다, 그의 노력을 보기보다, 본인들의 죄를 회개하기보다

지도자라 고하는 저들은 백성은 안중에도 없고 권력에 취해 부패한듯하니

지금이라도 정의를 세우기 위해 우리가 직접 일어나서 그에 맞서 싸우자는 의견에 혹하지 않았을까요.

게다 고라의 주장은 앞뒤 문맥 없이, 또 그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놓고 판단한다면 맞는 말이잖아요.

여호와께서는 온 회중의 하나님이시니 비단 모세와 아론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함께 계신다는, 함께 하신다는 말이 타당한 주장이잖아요.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민수기 16:13-14


고라당의 지도자들이 막강해 보이는 권력에 맞서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그 주장을 들으면 들을수록 얼마나 백성들의 마음에 흡족했겠습니까.

드디어 광야의 상황을 이해하고 백성의 이익을 위하는 지도자가 나타났다 기쁘지 않았겠습니까.

만나도 질렸겠다, 불과 구름 기둥도 눈에 들어오지 않겠다,

광야에서의 생활이 애굽에서 노예생활보다 못하다고 신세 한탄하고 있던 그들에게

이름 있는 자들이 일어나 지도자들을 대적하며

어찌 일을 벌이고 해결은 못 하냐고, 어찌 약속한 바를 지키지 못하냐고, 어찌 이리도 무능하냐고,

어찌 백성들을 풍요로움으로 인도하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백성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고 하니

드디어 누군가 용기 있게 일어나서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싸운다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모세가 심히 노하여 여호와께 여쫘오되 주는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지 마옵소서

나는 그들의 나귀 한 마리도 빼앗지 아니하였고 그들 중의 한 사람도 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민수기 16:15


각 진영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모세가 고라의 주장대로 이득을 취하고 높아지려고 했든,

모세의 변론처럼 자기의 사익을 취한 것이 하나도 없든,

또 백성들의 불신앙이 얼마나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했든 아니든 실상과 관계없이

얼마나 매력적인 주장이었겠습니까.

왜곡하고, 과장하고, 끼워 맞춘 거짓이더라도 자기 생각에 그럴듯해 보이면 사실이 되는 그런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이름 있는 자들이 상당히 논리적으로 보이는 주장을 했으니

이참에 무능해 보이는 지도자는 끌어내리고 백성을 대변할 지도자를 바로 세워야 한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근데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듯해 보이는 주장이 어떠한 배경에서 나왔는지 분별력 있게 판단해야 합니다.

정암 주석에는 “고라당이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이런 말로 비방한 것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그들의 시기심에서 모세와 아론의 행동을 오해한 것이었든지

아니면 그들이 높아지기 위해서 지어낸 말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라오지요.  


“고라가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아 놓고 그 두 사람을 대적하려 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회중에게 나타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민수기 16:19-21


성경에서 제일 좋아하는 책을 꼽으라 하면 민수기라고 할 만큼 원래도 민수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다시 묵상하게 되는 민수기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오늘날의 우리를 보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 시절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없어 마음이 어렵기도 합니다.

역사는 되풀이한다는 말을 익히 들어 알지만, 정말 그런 것 같아 두렵기도 합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상황을 완전히 똑같다 볼 수는 없지만,

성경에 쓰인 민수기의 결말은 알 수 있으니까요.


물론 모세가 완벽한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모세도 그릇된 언행과 태도를 보인 적이 있죠.

또 그러함으로 인해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천사와 함께 들어가는 약속의 땅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광야를 택한 사람입니다.

실수를 할지언정 중심이 바로 서고 초점이 제대로 맞춰져 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시던,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흡족하였던 모세는 온유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엎드려 이르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민수기 16:22


계속해서 대항하고 대적하러 올라온 무리를 보고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그들을 치시겠다고 할 때

그 순간마저 하나님께 엎드려 백성들의 죄를 대신 회개하던, 백성들을 위해 중보하던 모세와 아론입니다.

참으로 대단하죠. 고라당의 적대 행위가 무엇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분노를 살만한 행동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모세와 아론은 백성을 구원해달라는 기도를 올립니다.

그만큼 백성을 사랑했던 지도자입니다. 그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했던 지도자입니다.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지금, 우리는 알죠.

당시에는 백성들이 스스로 높아졌다 손가락질했던 그 지도자들이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고, 자기를 치려던 백성을 위해서도 엎드려 중보하던

진정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지도자였다는 것을.  


다른 건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것은, 또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까지 꿰뚫어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해 보이는 주장을 내세우며 당시에는 의로워 보이고 대중에게 인정받더라도

우리의 말과 행동이 잘못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하나님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분의 심판을 피해갈 수 없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나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나의 가치는 무엇에 세워져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를 가지고 사실은 본인의 욕심을 채우려

모세를 대적한 고라가 아니라,

두려움과 불신앙으로 가득하던 여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능히 이길 수 있다 모세와 백성을 격려한

갈렙과 여호수아가 되어야 합니다.


있잖아요, 그 스물여섯 번째

26. 지도자의 중심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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