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실제로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행하실
앞서 창세기 1장의 예를 든 것처럼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라고 하는, 저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육하원칙을 포함한 모든 것을 사용하신다.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나 철학과는 구별되는 가장 독특한 특징 중에 하나다. 성경은 하나님, 인간, 피조물, 사탄이 시공간에서 행한 실제 역사를 통해서 ‘왜’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막연한 개념상의 하나님이 아닌 과거에 실제로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행하실 역사 속에 실재하는 분임을 보여 준다. 크리스천은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 속에 갇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행하셨고 지금도 시공간 속에서 여전히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인간은 과학을 통해서 우주 만물의 운행과 작용 원리에 대해 ‘어떻게’라는 질문의 답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과학은 ‘왜’에 대한 대답은 절대 줄 수 없다. 다시 말해, 과학은 물질세계에 관해 부분적으로 알려 줄 뿐이지만 기독교 신앙은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에 관해 근본적인 관점과 지식을 모두 알려 준다.
결국 저자는 과학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성경으로부터 ‘왜’의 답을 찾으려는 태도를 통해, 마치 과학이 ‘어떻게’에 관한 모든 답을 말해 주며 성경은 ‘왜’에 대해서만 말해 줄 수 있다는 식의 이원론적 관점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과학에 필요 이상의 권위를 부여해주고, 반대로 성경은 부분적으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그릇된 신앙을 심어 준다.
성경은 어떤 사건이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를 여느 역사책보다도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가 성경을 읽을 때 이 사실을 일부러 무시하지만 않는다면 육하원칙의 요소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성경에서 역사적 사건을 ‘왜’라는 부분에만 국한하여 알려 주려고 하셨다면, 무엇 때문에 노아의 방주나 성막에 관해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규격과 방법을 알려 주며 ‘어떻게’ 만들라고 지시하셨겠는가? 성경은 ‘어떻게’에 관해 침묵한 적이 없다.
이재만, “타협의 거센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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