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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일은 쉽니다 May 12. 2017

있잖아요, 그 스물여덟 번째

28. 믿음의 경계에서




있잖아,


너의 연락을 받고 놀랐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내용을 보고.

기독교에, 교회에, 성경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는, 최근에는 무신론에 눈을 뜨게 됐다는 말.

전혀 상상도 못 했거든. 나한테 너는 누구보다 열심히 사역하며 섬기던 친구였으니까.

과학을 공부하기에 더욱 그런 걸까? 아무래도 다른 분야보다는 종교와 가장 마찰이 큰 과목이니까.

그래서 네 메시지를 읽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이러한 결론에 다다랐을까 생각해보니

막상 우리는 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나눠본 적이 없는 것 같더라, 그지?


나는 너의 이런 궁금증, 질문, 의심이 좋은 거 같아.

하나님이 우리한테 무조건적인 신앙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무조건적인 신앙은 표현은 그렇다만 토 달지 말고 믿으라는 신앙.

그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것과 정반대이니까.

그래서 너의 궁금증, 질문, 또는 의심, 그런 게 다 좋다고 생각해.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 중에 그렇게 성장한 사람들도 많잖아.

예를 들자면 목숨을 다해 반대하다가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 사도 바울처럼.

그래서 이러한 마음도 더더욱 똑똑하고 지혜로운 크리스천으로 크는 데 발판이 될 거로 생각하고!  


내가 과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생기는 질문에 대해선 별다른 도움이 될 수 없지만,

한걸음 떨어진 입장에서 보는 과학은 어떤 두려움을 들게 했어.

성경을 맹목적으로 믿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 과학을 맹목적으로 믿는 주장처럼 보일 수 있고,

어느 순간 과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숭고한 우상이 되어 버릴 수도 있겠다는,

혹은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두려움은 들어. 과학자들이 각각의 예수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과학과 종교의 마찰에 대해서는 내가 지식이 너무 부족해서 너의 가려운 부분들을 긁어줄 수 없다만

그 외에 다른 질문 또는 불만에 대해서는 그래도 조금은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현시대의 믿는 사람들에 대한 너의 지적이 옳아.  

많은 사람들이 성경대로 살지도 않고 똑같은 유혹 속에 너무나 쉽게 빠져버리지.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했다는 핑계 하에 아무렇지 않게 죄를 짓고 때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도 해.

그렇게 빛과 소금이 되라는 사명을 쉽게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그것뿐만이 아니야. 우리도 거짓말을 하고 사람을 미워하지.

용서하는데 더디고 혹은 아예 하지 않을 때도 있고. 불평불만을 하고, 욕을 하고.

거만하고 자만하면서 겸손의 탈을 쓰기도 하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배고픈 이들을, 병든 이들을, 약자들을 돌보지 않아.

가장 기쁘게 받으신다는 예배조차 제대로 드리지 않을 때가 많아. 형식만 챙기며 시간을 때울 때도 있지.  

하나하나 나열해보면 이 리스트는 끊임없이 이어질 거야.

맞아, 우리는 빛과 소금이 되라는 사명을 잊어가고 잃어가고 있어. 나부터가 자유롭지 못해.  


오히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더 철저할 때가 많지.

단적인 예로 내 친구 중에서도 자기의 신앙에 따라 카페인은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으면 마시지 않고

담배 피우는 사람이 지나갈 때면 입고 있던 재킷으로 얼굴을 가려서라도 연기를 맡지 않던 친구도 있어.

그에 비해 크리스천들은 너무 허술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잖아. 하나님을 주인이라고 입으로만 고백하고, 삶은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살고.

그래서 전도하려고 할 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싫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제일 양심에 찔리고, 부끄럽고, 마음이 아파.

네 말이 맞아. 우리는 빛과 소금이 되라는 사명을 잊어가고 잃어가고 있어.  


근데 우리의 몸이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교회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인간인 우리를 놓고 하나님을 평가해야 한다면 나는 너무 안타까울 것 같아.

만약에 사람들이 우리 부모님을 나만 놓고 평가한다면 그 평가가 꼭 정확하지만은 않을 것 같거든.

내가 잘 나가고 성공한듯한 딸일 때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부모님도 좋게 평가하겠지만,

지금처럼 내세울 수 있는 성과 없이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나의 모습은

특히나 어른들이 보기에는 참 한심하고 시간 낭비라 생각할 수 있거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걸 알아.

그래서 나의 평가의 연장선으로 우리 부모님을 그렇게 보는 시선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근데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시는 부모님을 나의 부족함으로 평가해야 한다면 나는 동의할 수 없어.

내가 못난 것이 부모님의 탓이 되는 걸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어.

그건 내가 아직 부족하고 못난 거지 우리 부모님의 부족하신 게 아니거든.  

오히려 우리 부모님은 날 기다려주시고, 이해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것뿐인데

나에 대한 평가가 나로 그치는 것은 괜찮지만, 나에 대한 평가가 내 가족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는 것은

동의할 수 없고 정확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그래서 나의 부족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돌아선다면

정말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아.


그래서 두 가지인 것 같아.

하나는 우리가 깨어서 회개할 필요가 있다는 것. 나의 인생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

처음부터 완벽한 빛과 소금일 수는 없지만,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어쩌면 그게 인생 전체에 걸쳐 떠나는 여정이 아닐까?

자격증이나 학위같이 몇 년의 과정 끝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내가 깎이며 연금처럼 단련되고 나아오는, 인생 전체에 걸쳐 걸어가는 여정인 것 같아.

그러니까 참 감사하지.

만약에 하나님이 20년의 시간을 줄 테니 그때까지 제대로 해내라고 하셨다면 난 이미 실패했겠는걸!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위대함.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나를 받아주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러니 도저히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질 않는 거 같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나로서는, 나 같은 사람하고 친구 하지 않을 거란 말이야.

세상 사람들은 서로 보여주는 모습만 볼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다 아시잖아.

근데도 나를 친구로 불러주신다는 게… 내 모든 걸 다 아시면서 말이야.

참 놀라운 사랑이야. 나같이 고집 세고, 나약하고, 제멋대로인 사람도 받아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맞아. 우리 크리스천들이 잘못한 게 많고 잘못하고 있는 것도 많아.

네가 적은 기독교의 어두운 역사,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어두운 모습이지.

절대 우리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업적들이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도 완벽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

그래서 회개하고 조금씩 성숙의 여정을 걸어가야 하지 과거의 잘못되었던 결정 때문에

기독교 전부가 부정된다면 나는 마음이 아플 것 같아.

우리 학교도 그렇잖아. 워낙 다양한 학생들과 교수님들이 있어서

우리 학교 학생들은 이렇다 하고 간단하게 몇 줄로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야.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렇다 하고 간단하게 몇 줄로 단정 지을 수도 없는 것처럼.

어쩌면 기독교도 그렇지 않을까?


물론 요즘 같이 종교 지도자들이 타락하는 시대에, 특히나 존경받던 사역자가

돈이나 성적인 또는 다른 유혹에 쓰러졌다는 뉴스를 접하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거 같기도 하고, 우리는 그럼 뭐가 다른 걸까? 의문이 들기도 해.

그래서 지난 몇 달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 미움과 증오의 범벅이 되어버린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

아브라함한테도 의인 열 명이 있으면 살려주신다 했는데

대한민국에도 의인 열 명이 있다면 살려달라고 기도하면서 동시에 비관적이었어.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은데 과연 하나님의 눈에도 의인이라 칭함을 받을 열 명의 사람이 있을까?

딱 열 명, 단 열 명이면 되는데 그 열 명조차 찾지 못할 것 같아 낙심됐어.

일단 나부터가 그 열 명에 들지 확신이 없었거든.


근데 내가 그 고민 탓에 너무 괴로울 때

우연히도 그 주말에 우리 셀장이 너무 감동받았다며 시간 될 때 보라고 영상을 하나 보내줬거든.  

그래서 며칠 있다 자기 전에 영상을 보는데, 영상에 담긴 박누가 선교사님의 삶을 보면서 펑펑 울었어.  

내가 너무 형편없는 크리스천이라 그렇지,

내가 너무 연약하고 부족하고 죄를 짓는 크리스천이라 그렇지

진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구나.

짠맛을 잃지 않고 사명을 위해, 소명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구나.

나는 어쩌면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셨을지도 모른다고 섣불리 포기하려 했는데

대한민국에서 의인 열 명을 찾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기더라고.

한편으로는 죄악에 쓰러지는 크리스천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대의 사도 바울, 이 시대의 다니엘, 이 시대의 요셉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더라.

내가 부족한 크리스천이라고 모든 크리스천이 부족한 게 절대 아니었어.

그래서 그분들이 크리스천이라는 게 너무 자랑스럽고 너무 감사했어.

우리는 인간이기에 뭐든지, 또 모든지 양면이 있는 거 같아.


[마지막 가르침]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1-5


몇 달 전에 이 구절을 읽으며 깜짝 놀랐어.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너무 놀랐어.

우리가 정말 마지막 때에 살고 있구나… 내 모습을 돌아보니 모든 구절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거야.

우리는 정말 마지막 때에 살고 있어. 그리고 항상 깨어있으라고 하시는데,

세상에 취해 깨어 있지 못하고 살아온 지난 20 몇 년간의 세월이었어.

퇴사 후에 광야의 길을 걸으며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그나마 조금씩 깨어짐의 삶, 또 깨어있음의 삶을 걷기 시작한 거 같아.


나도 전에 회사 선배 중에 아이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걸 반대했던 분이 계셨어.

부인은 교회를 다니고 자기는 교회를 한때 다니다 지금은 떠나왔기에

딸이 아직 본인의 생각과 의지가 정립되지 않은 나이에 엄마와 같이 교회 가는 걸 반대하셨지.


근데 있지, 나는 되게 고집이 세거든. 되게 내 마음대로고 헛똑똑이고.

그래서 만약에 내가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우리 부모님이 날 교회에 데려가지 않으셨더라면, 그래서 내가 신앙이 없었더라면,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 그 삶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어. 아니, 상상하고 싶지 않아.

오늘도 매일 하나님과 씨름하지만, 때로는 화가 나고, 속상해하고, 실망하고, 따지고 그러지만

여전히 하루의 끝에선 하나님 없는 삶을 상상할 수가 없어. 결국에는 하나님인 거 같아.

그래서 부모님께 감사한 게 참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감사한 것은 신앙을 물려주신 거라 생각해.


모태신앙이 절대 답이라 생각하지 않아. 유일한 답이거나 최선의 답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고.

모태신앙의 단점들이 분명 있어. 그래서 오히려 본인이 직접 믿게 되는 경우가 더 열심히 믿는 경우도 많지.

이영표 선수처럼 말이야. 난 이영표 선수를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는데,

그분이 20대 때에 하나님을 만난 경우일 거야. 홍대광도 그렇고. 이런저런 다양한 경우가 많지.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가장 알맞은 길을 열어주시고 인도해주신다 생각해.


근데 그렇다고 다들 기독교를 선택하지는 않지.

내 친구들 중에서도 내가 전도하려 했지만 그럼에도 믿지 않는 친구들이 있어.

그리고 나의 책임이 절대 작지 않다 생각해.

신앙을 거부하는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만약에 내가 더 좋은 본보기가 되었더라면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거든.

또한 하나님이 강요로 믿게 하시지도 않으니, 무조건 닥치고 믿으라는 신앙은

성경 어디에서도 요구된다 생각하지 않아 (온전한 믿음과는 다른).


그래서 언어를 좋아하고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말이 가지는 힘을 알지만 동시에 그 한계도 알아.

내가 이렇게 두 시간 동안 앉아서 끄적끄적 편지를 적어가도

네 마음에 전혀 감동이나, 설득이나, 그 어떤 미동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잘 알아.

그리고 나는 오늘 네가 나를 믿고 이렇게 네 속마음을 이야기해준 것처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어떤 길을 택하던, 양 갈래의 그 어떤 끝에서도 너의 친구로 남을 거야.


그래서 내가 너에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야.

하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우정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과

또 하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것.


이 이야기를 끝으로 편지를 마무리해야겠다. 얼마 전에 내 시각을 바꾼 이야기가 하나 있었거든.

위에도 적었지만 나는 정말 이영표 선수를 좋아하고 존경해.

이영표 선수의 간증인데, 자기가 처음 믿기 시작했을 때 이해가 안 가는 게 너무 많았대.

대표적으로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 세상에 가난이 있는가? 왜 이렇게 양극화되어있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먹을 게 너무 많고 어떤 사람들은 먹을 게 아예 없는가?

왜 공평하신 하나님은 전혀 공평해 보이지 않는가?


근데 어느 날 그런 문구를 보게 되었대.

만약에 믿는 사람들이 하루에 100원씩 기부했다면 이 세상의 가난은 없을 거라는.

그리고 그 문구를 보고 충격받았다는 거야.


그때 자기가 그 질문에 대해 얻은 깨달음은

우리 생각에는 만약에 아이가 세 명이 있고 빵이 세 개가 있으면

아이마다 빵을 하나씩 주는 게 공평한 거지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다르다는 거야.

하나님은 한 명의 아이에게 빵 세 개를 주고

그 아이가 다른 두 명의 아이에게 나눠주길 바라신다는 거지.

그게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거라는 걸 깨달았대.


어떻게 보면 되게 비효율적이고 별로 현실적으로 보이지도 않지.

우리는 알잖아, 인간으로서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은지.

크리스천이라고 그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근데 참, 하나님 대단하시지? 혼자서라면 더 쉽게 하실 수 있는 일을

넘어지고 쓰러질 우리에게 함께 할 기회를 주신다는 게.

함께 그 세상을 가꾸어나가길 원하신다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네 말이 맞아. 우리는 넘어질 거야. 우리는 쓰러질 거야.

그래서 이 세상의 가난은 종말의 때까지 지속할 것이고

그렇게 영양실조로 죽고 약이 없어 질병으로 죽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겠지.

나부터가 욕심 많고 이기적인 인간이니까. 나부터가 그렇게 부족하고 못났으니까.


그래서 나중에, 천국 가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될 그 날에 꼭 여쭤보려고.

하나님 참, 무슨 배짱으로 날 믿으셨냐고.

나를 그렇게 잘 아시면서, 내 안에 선한 것 하나 없다는 거 아시면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사실 내 속은 엉망진창이라는 거 다 아시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날 사랑하셨냐고.

도대체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하나도 보이지 않는 나를, 이렇게 고집불통인 나를

어떻게 믿으셨냐고. 도대체 왜 믿으셨냐고.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나 같은 건 그냥 애초에 진작에 포기하는 게 난데,

나는 희망도 없을 만큼 고집불통의 고장 난 기계였는데,

투자도 성공할법한 걸 투자해야지 누가 봐도 실패할 거 같은 상품에 투자하는 게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 참, 이해할 수 없다고. 가끔은 나보다도 바보 같다고.


근데 그래서

내가 당신의 사랑 덕분에 살았다고.

포기하셨으면, 내가 날 포기했을 때 하나님 당신도 날 포기하셨으면

그럼 난 거기서 멈춘 채 모든 게 끝났을 텐데


근데 나를 믿어주셔서

그럼에도 나를 사랑해주셔서

끝까지 나를 기다려주셔서


그래서 내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내가 끝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고.


나를 포기하지 않으셔서

감사하다고.


있잖아요, 그 스물여덟 번째

28. 믿음의 경계에서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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