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결혼식 축가
어떤 결혼식 축가
바야흐로 결혼의 계절, 축가의 계절입니다. 저도 소싯적에 축가 꽤나 불렀습니다. 나도 저런 결혼해야지, 부러움과 설렘으로 선배 결혼식 축가를 불렀는데 어느새 친구를 위한 축가, 금세 후배 결혼식 축가를 부르는 날이 오더군요. 축가의 역사는 오랜 싱글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축가의 노랫말들은 신혼집 인테리어 못지않게 샤방샤방합니다. 그대, 행복, 선물, 사랑, 운명, 영원, 하나 되어... 이런 단어가 겹치기로 출연하지요. 저는 어쩐지 결혼식 축가용으로 만들어진 노래에 마음이 가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랑 신부의 인생 스토리와 잘 맞는 CCM이나 찬송가가 더 의미 있다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친한 친구일수록 축가 같지 않은 축가를 불러 주곤 했습니다. 목사님과 결혼하는 친구의 결혼식에 찬송가 "내 평생에 가는 길" 한 절을 끼워 부르기도 했습니다. 결혼 20주년을 바라보는 친구의 남편 목사님께서 농담하십니다. "그때 우리 결혼식에 '내 평생에 가는 길' 불러 줬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큰 풍파로 어려웠어요. 허허."
얼마 전 인상적인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결혼식 전체가 감동적이었는데 제겐 특히 축가가 그러했습니다. 찬송가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였습니다. 유독 4절 가사가 귀에 들어오더군요. "이 땅 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이건 뭐 제가 불렀던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려운 것"과는 비교가 안 되지 뭡니까. 사랑과 행복의 바다를 향해 막 출항하는 사람을 세워두고 "참된 평화는 없다"라니요! 시작하는 부부에게 초를 치는 축가로 치면 저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에서 회심의 미소로 듣기 시작했지만 뒤로 갈수록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결혼과 인생의 본질을 꿰뚫는 진리를 담은 지혜이며, 그 지혜가 오롯이 담긴 축복인 듯싶었습니다.
사실 이 결혼식 전반에 담긴 신랑 신부의 지혜는 보기 드문 것이었습니다. 결혼식장 인테리어며 신부의 드레스, 피로연 식사까지 친환경으로 준비한 것도 남달랐고요. 주례를 목사님이나 교수님 한 분이 아니라 신부 직장 상사 '부부'가 맡은 것입니다. 가만 듣고 보니 단지 특별한 결혼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결혼'이 무엇인지를 아는 선택이었습니다. 결혼식 중 단 한 번의 주례사가 아니라 평생 함께 갈 주례자를 모신 것 같았거든요.
결혼 전에 두 부부가 여러 번 만나서 맞춤형 결혼 예비 학교를 했답니다. 심지어 함께 공부한 텍스트는 스콧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상대를 받아들이고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를 확장하는 것이 사랑이라 정의하는 그 스콧 펙 말입니다. 사랑과 성장을 위한 길은 마침이 없으며, 늘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고도 했지요. 이 사람들은 화려한 결혼식 후에 펼쳐질 일상의 결혼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았습니다. 솔로의 땅에 남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그 환상의 시간이 끝나면 자기 확장이라는 사랑의 불 연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요. 사실 선택은 둘 중 하나입니다. 연단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느냐 (이렇게 되면 배우자와의 행복은 저절로 따라오게 됩니다), 아니면 좌절과 무기력과 은근한 분노의 결혼 생활을 어쩔 수 없이 이어 가느냐. 엄밀하게 말해서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성장하거나 불행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모두 행복하려고 결혼하는데 정작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을 모릅니다. 모를수록 모호하고 허황한 이상을 부여잡게 되지요. 갈등을 겪는 신혼부부를 각각 만나 보면 하나같이 하는 얘기가 "내가 생각한 결혼이 아니다"입니다. 그들이 꿈꾸던 결혼이란 따스한 배려, 퇴근하고 돌아가면 그저 맘 편히 쉴 수 있는 홈 스위트 홈, 더는 외롭지 않음... 그럴듯하지만 모호한 표현들입니다. 알랭 드 보통의 말대로 모호한 표현을 늘어놓는다는 것은 "행복해지기 위해 (혹은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 어떤 요소가 필요한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중"입니다. 그렇습니다. 결혼식 축가 속에 담긴 행복, 사랑, 축복, 하나 됨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환상이 아닌 듯 참된 사랑 역시 낭만적 사랑의 환상과 같지 않습니다.
"이 땅 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결혼만 하면 외로움 끝, 행복 시작, 사랑해서 결혼만 하면 행복해질 거라는 환상을 깨는 한마디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부부에게 절망적인 얘기 같지만 알고 보면 참 평화의 문을 여는 진실의 열쇠입니다.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이 지혜로운 부부는 예수님을 선생님, 친구로 삼듯 좋은 선배 부부를 꼭 붙들었습니다. 주례자로 모셨을 뿐 아니라 20여 년 결혼 생활 노하우를 밀착 전수하는 자들로, 무엇보다 결혼의 증인이며 안내자로 삼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든든한 안전장치입니까? 이들의 청첩장 문구는 "사람들은 왜 손을 잡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더군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하는 것도 참 좋았습니다. 둘만 좋으라고 맞잡는 손이 아니라 좋은 선배와 연약한 이웃의 손까지 꼭 붙든 이 결혼은 살아 있고 풍성한 답으로 채워질 것이 분명합니다.
정신실, “연애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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