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동체도 완전히 포용적일 수 없다
어떤 공동체도 완전히 포용적일 수 없다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신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성질 탓에 사회 분열을 부른다는 비판을 받는다. 인간 공동체는 철저하게 포용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성을 공통분모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에서는 주민들의 인종과 종교적 신념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이뤄 함께 살고 일하지 않느냐고 비판자들은 지적한다. 공동체 생활에 필수 요건은 다른 이들의 사생활과 권리를 존중하고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과 직업, 의사결정 기회를 누리도록 보장하는 정도이며 그게 바로 '자유민주주의'라고 못 박아 말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시각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사고방식을 드러낼 뿐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유익보다는 개인의 권리가 우선이며, 개인 윤리와 공공 윤리는 별개이고, 개인의 선택을 신성시하는 따위의 숱한 전제들을 깔고 있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하나같이 이질적인 신념들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구성원들끼리만 공유하고 있는 (모든 공동체가 다 마찬가지다) 일단의 몹시 특수한 신념들을 토대로 삼는다. 서구사회는 이성, 권리, 정의 따위를 둘러싼 공동의 약속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서는 어느 하나 보편적으로 합의된 정의 같은 게 없다. 정의와 이성에 대한 해석에는 예외 없이 인생의 의미와 관련된 특수한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게 아닌) 확신들이 들어 있다. 따라서 철두철미하게 포용적인 공동체는 헛꿈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 공동체는 어김없이 공동의 신념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며 자연히 누구를 그 테두리 안에 넣고 누구를 제외시키느냐와 같은 경계가 생기는 법이다.
예를 들어 보자. 게이와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센터 이사진 가운데 한 명이 어느 날, "신앙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이제는 동성애가 죄라고 믿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치자. 몇 주가 지나가는데도 꿋꿋이 같은 주장을 되풀이한다. 또 동성애반대연맹의 간부 하나가 "아들아이가 게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동성 파트너와 결혼할 권리가 걔한테 있다고 봅니다"라고 발표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양쪽 집단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너그럽고 유연한 성품을 가졌는가와 상관없이, 저마다 "신념이 다르니 이제 그만 이사회에서 나가 달라"고 통고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 반드시 닥칠 것이다. 두 그룹 가운데 첫 번째는 포용적이라는, 그리고 두 번째는 배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운영 방식에서는 둘 사이에 별반 차이가 없다. 양쪽 다 구성원들끼리 공유하고 있는 확신들을 기초로 삼고 있으며 그 믿음을 포용하고 배척할 상대를 가르는 경계선으로 작용한다. '편협해서'가 아니다.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두 편 다 그저 공동체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따름이다.
구체적인 신념과 실천 방안을 구성원들에게 책임지고 제시하지 못하면 그 어떤 공동체도 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없으며 공동체라고 말할 근거를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멤버들에게 적용되는 명쾌한 기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 집단을 무조건 배타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공동체가 편협하고 억압하기보다 개방적이고 배려하는지 여부를 가릴 방도는 없는가? 훨씬 정확한 검증 방법이 있다. 다른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섬기며 그 필요를 채우도록 가르치는 신념들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공동체의 신조들이 그 경계를 침범하는 이들을 친절하고 겸손하며 쾌활하게 대하기보다 지배하고 공격하도록 유도하는가? 크리스천들이 믿지 않는 이들을 손가락질하고 불손하게 대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고유한 확신을 좇아 구성원들에게 적용되는 확고한 기준을 지켜 간다고 해서 교회를 비판하면 안 된다.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공동체가 그러고 있기 때문이다 (82-84).
팀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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