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고맙고, 미안하고, 고맙게

그는 멋졌다

by 일요일은 쉽니다




오랜만이다, 그지?

여기로 이사한 후에 일이 너무 바빴어, 정말 너무 바빴어

벌써 6개월이란 시간이 지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너무 빨리 간 거 같아

거의 하루 종일 회사에 있으니까, 사실 힘들다거나 지치는 걸 딱히 느끼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가는 경우가 더 많아, 일이 정말 많거든

게다 여기저기 문제 생기고, 급한 일들이 터지고 하면 순식간에 지나가지

젊고 아름다운 오늘을 하루 종일 서류에 묻힌 채 지내서 그러는지,

친해진 후에는 직원들이 자주 물어봐, 만나는 사람 없냐고

없지! 이 스케줄에 누구를 만나기까지 하면 정말 상사 한 명 더 모시는 기분일 거 같은데?

그래도, 20대의 설렘이 하나도 없는 거 같아도

어쩔 수 없지 뭐, 그 설렘을 찾기엔

오늘 급하게 해결해야 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잖아


두 달 전 그 사람도 그런 급한 일 때문에 만나게 된 사람이었어


같이 협력하기로 한 파트너 회사가 갑자기 넘어가면서

깜빡 속아버린 우리는 순식간에 껍데기뿐인 상황을 맞닥뜨리면서

대책이 없었거든

대안이 없었고, 시간도 없었어

더 이상 멈출 수도, 돌릴 수도 없는 시점까지 왔기에

무르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어

속상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처음부터 느낌이 안 좋았거든, 그 회사에 대한 신뢰가 가질 않았어

계속 말이 바뀌고, 태도도 이상하고, 너무 무리하게 요구를 하고…

그래도 해야 한다고 하니 계속 진행했는데

그러던 회사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 뒤통수를 쳤을 땐, 어떡하겠어

사막 속에서 오아시스를 찾을 수밖에



그때 만난 거거든

정말 어렵게, 어렵게

원래 다른 회사랑 협력하는 곳이 아니지만,

징검다리를 통해 우리의 상황이 많이 곤란한 걸 듣고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



그러고도 순탄치는 않았어

우리가 원했던 조건은 아니었고

언어의 장벽에 시차까지 겹쳐지며

그곳의 시간을 맞추기 위해 밤을 새우고 기다리는 새벽이 점점 쌓여가고

분명 몇 번이고 말을 했는데 상대방이 챙기지 않아 억울한 상황에 놓이고,

우리가 그 책임을 떠안으면서 답답한 적도 많았지만


일을 진행하기 위해 희생했던

수많은 새벽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걸까

아직 만나기 전의 우리는, 처음보단 조금 가까워졌고

내가 어리고 경험이 없어 소통하는데 답답할 거라는 말에

열심히 일하는 게 보여서 도와주고 싶다는,

지금 우리가 진행하는 일들이 과거 그 사람이 진행했던 시간과 겹치며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도와주고 싶다고


그 사람이 도착한 첫날

그날도 일이 너무 많았어

그래서 너무 미안하지만 오늘 밀린 업무를 보고 내일 합류하겠다고 전한 후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고


그 사람이 도착한 둘째 날

먼저 도착해 기다리다 들어오는 뒷모습만 보고

오전 회의가 끝난 후 다가가 드디어 만나서 반갑다며 인사를 하는데

인상이 참 좋더라



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자상했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솔직했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정성을 들여

정말 도와주려고 최선을 다했어



이미 한참의 경력이 있는 네가

아직 일이 손에 익지 않은 나를 가르치기엔

또 그간 모든 노하우와 경험이 축적된 배경을

이제 막 시작하는 우리에게 전수할 필요가 없었는데


너는 예전의 네가 생각난다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이곳에서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일들을 어깨에 이고 있는 내게

정말 정성을 다해서 가르쳐 주더라고

고맙고, 미안하고, 고맙게



여긴 거칠고 거칠 거든

그게 당연한 거고, 현장이니까

현장은 아름답지도 고상하지도 않아

이곳에 있으면 같이 거칠어지지,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어디든 그럴 수 있겠지만, 이곳은 정말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고

동시에 책임지려 하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탁구 치듯이 이 부서에서 저 부서에서 서로 안 하려고 하는 일들이 공중에 떠 있으면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받아서 해결해야 하는데



거기에 어리고 경험 없고 또 때로는 여자여서 치이는

그런 삭막한 환경 속에서

너는 진심으로 도와주더라고

도와주려 하고 도와주고 싶어 하고



그 정도 경력에 그 정도 능력이면

보통 자기 자신이 가득해 만나면 마음이 어렵고 늘 벽이 느껴졌었는데

너는 네가 있는 그 짧은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같이 있는 순간마다 도와주기 위해서 모든 걸 알려주려 했어

고맙고, 미안하고, 고맙게


한 주를 마무리하며 다시 회의실로 돌아와 모든 임원이 모인 자리에

혹 통역이든 의전이든 문제 생길까 가장 뒤에서 대기하며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나에게

한가운데에 있는 네 옆으로 오라며 자리를 만들어 주고는

하나하나 직접 가르쳐 주던 네가



고맙고, 미안하고,

고맙게



아무도 그렇게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거든

학부 때도 그랬지만, 학교를 떠난 후에는 더욱

서로 도와가며 사는 세상이 아니라

어떻게든 자기가 알아서 해내야 하는 그런 세상 속에서

같이 거칠어지므로 서라도 적응하려 하던 나에게

오히려 도와줘야 할 사람들은 외면하고 있는 순간에



그럴 이유가 없었던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도와주려 했어



마지막 날, 한나절뿐이었지만

고마운 마음에 잠깐 밀려있는 일을 두고 나와서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대화하고

어느새 서로가 조금씩 편해졌는지

말도 많아지고, 일상도 공유하고, 웃고


네 일행이 부인 선물을 사가야 한다며 골라달라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온 만나는 사람 없냐는 네 질문에

이 스케줄로 누구를 만나겠냐는 내 답에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무언가 달랐을까

우리는 달라졌을까



저녁 6시 52분, 테이블 위 핸드폰 진동이 울리길래

혹시 보딩 하기 전 네가 아닐까 했는데


오전에 찍은 사진 한 장과,

고마웠다며 웃는 얼굴


고마웠어

그래도 참 오랜만에

따뜻한 인연을 만나


고마워


서울 사는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

27. 그는 멋졌다.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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