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분명히, 분명 불가능한 일인데

어떻게 추억 하나가 아름다웠다고 마음이 시리고 아리고 따뜻해질 수가

by 일요일은 쉽니다


프롤로그


참 우울하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20대 후반에 접어든 언젠가부터, 태어났으니 이렇게 살아가지만, 만약 태어날 것인지 말 것인지 직접 선택할 수 있다면 아마 태어나지 않기를 선택하지 않을까 하던 생각이 점차 확신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삶의 롤모델로 올려다보는 인물도 줄어들기 시작했고, 부러운 사람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좋은 대학을 나온 친구? 좋은 회사에 취직한 친구? 좋은 집안에 시집간 친구? 여러 가지 잣대를 들이밀어도 부러운 사람이 없었다. 학교에서 남과 비교하지 말라는 조교들의 조언이 마음에 와닿던 시기가 있었는데, 남과 비교해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무채색 빛의 마음이 어쩌면 더 슬픈 걸까 싶기도 했다.


마음이 몇 년간 많이 약해진 상태이다 보니 환경에 쉽게 휩쓸렸다. 여기서 말하는 환경은 거창한 환경은 아니고, 학교에 돌아온 이후에는 듣고 있는 수업, 교재, 토론 주제 등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논문에 들어갈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하면서 아카이브를 하나씩 들춰보다 보니 모르고 지나갔거나 묻혀 있었던, 혹은 겉만 간단하게 알고 있던 사건들의 디테일을 보게 되면서 세상에 느끼는 환멸이 심해졌다. 얼마 있지도 않던 이 세상에 남은 정이 모두 떨어지는 느낌. 견디기가 어려워 이제까지 전혀 관심도 없고 본 적도 없는 동물 다큐멘터리를 찾아봐야 할 정도였다. “짐승보다 못한 놈”이란 말이 오히려 모욕적으로 느껴질 만큼 동물의 세계는 그나마 상식적으로 옳다고 생각한 (혹은 적어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개념에 의해 돌아가는 것 같았으니까. 예를 들면, 새끼 펭귄들이 어떤 큰 새를 만나 위험해 처했을 때 멀리서부터 뛰어온 보호자 펭귄이 본인의 몸을 던져 보호한다든지, 비슷한 맥락에서 부모 펭귄의 자식 펭귄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라든지. 근데 내가 그간 몇 년 간 본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계속해서 펭귄에 비유하자면, 새끼 펭귄이 어떤 큰 새를 만나 위험해 처했는데 피를 철철 흘리고 물어 뜯겨 죽을 때까지 쳐다만 본다거나, 혹은 고개를 돌린다거나, 합심해 같이 공격을 한다거나. 동물의 세계를 보며 위안을 얻어야 그나마 남은 멘탈을 붙잡고 이 시기를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을 정도로, 몇 년간 깊어지기 시작한 환멸은 어두웠다.


근데 이러한 어두움은 파괴력이 강한 것이, 조용히 그러나 면밀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한 속도였다. 세상에 대해 느끼던 감정이 나 자신에 대해 번지기 시작했을 때. 세상이 이렇고 저렇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때도 괴로웠는데 30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갑자기 내가 잘못한 것들, 내가 상처 준 것들, 내가 후회하는 것들이 생각나면서 짓누르기 시작했을 때는. 쓰레기 더미에서 한 송이의 꽃이든 한 그루의 나무든 혹은 풀잎이든 잡초든 그래서 괴롭다고 생각한 것과, 그 쓰레기 더미 속에 나 또한 쓰레기인 것을 느끼고 깨닫게 되었을 때 온 괴로움은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게다 안 그래도 약해진 멘탈에 듣고 있는 수업, 교재, 토론 주제 등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전공 수업과 함께 듣기 위해 선택한 문학 수업에서는 갈수록 심오한 주제들만 나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갓난아기를 죽일 모의를 하는 아버지라거나. 배우가 캐릭터에 빠져들어서 다시 본인의 일상으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일상에서 도저히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사는 것에 대한 회의가 점차 확장되어 '내 삶도 버거운데 나는 절대 자식을 낳아 또 다른 생명에 이러한 짐을 내 마음대로 얹어 버리지 말아야지'는 이미 당연했고. 어느 주말에 엄마, 할머니, 동생과 함께 먼 길을 다녀오던 과정에서 아주 큰 트럭과 충돌할 뻔했는데 집에 돌아와 우리 모두 그 자리에서 죽었을 수도 있다는 말에 그것도 나쁘지 않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어차피 괴로운 인생, 그나마 남은 아군들이 하나씩 떠나가고 더욱더 무거워지는 짐을 혼자 지느니 모두가 함께 눈을 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라는 생각. 마음이 말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입맛도 없고 먹는 것에 썩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던 내가 밥을 먹고 돌아서자마자 배고프다고 무언갈 계속 찾아 집어 먹는 모습을 보고 정말 배가 고프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그렇게 끊임없이 입안에 무언갈 집어넣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그래, 점점 마음이 허해지고 있구나 싶었다.


그러던 와중, 문학 수업에서 마지막 소설에 접어들었다. 최종 프로젝트 틀을 이미 잡아놓은 터라 정말 의욕이 없다면 읽지 않아도 됐다. 전공 수업도 아니고 강의가 끝나면 온라인으로 다시 볼 수 있는지라 무조건 실시간으로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일은 깔끔하게 진행되어야 마음이 불편하지 않아서 마지막 소설에 임했는데, 내가 무얼 빠뜨리고 읽고 있는가? 싶을 만큼 너무 잔잔했다. 두 번에 나눠서 반씩 읽는 스케줄이었는데, 하도 잔잔해서 무얼 토론할 수 있겠나 싶어 반을 읽고도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다 맞닥뜨린 장면.


아픈 증손주를 키우는 증조할아버지와의 이야기 중 집을 떠나 본인의 삶을 살고 있는 증조할머니가 어느 날 둘을 보러 다시 고향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기억이 날 듯 안 날 듯 낯설어지고도 여전히 친숙한 동네의 집을 하나하나씩 지나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마주친 집 앞에서 손을 위아래로 흔들고 있는 남편과 증손주의 모습.


Yoshiro and Mumei were standing out front, waving like beckoning cats, their paws moving up and down. Two beckoning cats: one big, one tiny. Thanks for beckoning. Suddenly everything seemed funny to Marika as she leaned forward even further, laughing as she ran toward them at top speed.
“Great-grandma is here!” The trio’s happiness exploded into joyous fireworks as they jumped around like rabbits in springtime.


여기서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고 숨이 턱 하고 멈췄다. 지난 몇 권의 소설과는 다르게 그렇게 시각적이진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선하게 그려져서였을까. 토끼처럼 셋이 부둥켜안고 폴짝폴짝 기쁨으로 뛰는 장면이 그려져서였을까. 시럽이 흘러 진득진득하게 굳어 버리는 바람에 열리지 않는 병과같이 딱딱해진 마음이었는데, 누가 작은 못을 대고 고무망치로 톡, 톡, 톡, 톡 두드리던 것이 모여 쫙하고 갈라지는 금처럼.


수업이 끝나고 여전히 어두운 창밖을 쳐다보며 하늘의 색감이 비슷해서 생각이 난 한 장면. 사람 인연은 어디서 어떻게 이어질지 모른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의지하게 된 간사님이 몇 년 만에 한국에 들어오셨을 때, 간사님을 뵈러 조금 떨어진 동네로 가던 지하철 안. 그래, 그때 창밖의 색감이 이러했다. 한 시간가량 되는 지하철 안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오묘했던 색감. 외각으로 나갈수록 점차 풍경이 많아지고 사람은 줄어들고 더 오묘해지던 색감. 그곳에 도착해 만난 반가운 얼굴과, 잔잔하게 쏟아낸 마음과, 지하철이 끊길까 일어나야 했던 순간과 역까지 바래다주시던 발걸음. 오랜만에 보러 온 할머니를 마중 나온 (부인에게 버려진) 할아버지와 (부모에게 버려진) 손주의 모습이나, 지금 저 창밖 너머 새벽의 오묘한 색감이나, 그날 저녁 참 평범한 하루이자 만남이었는데도 풀냄새까지 생각날 정도로 선명한 기억.


Looking at himself in the mirror, Mumei had said, hoping to make Yoshiro smile, “We’re like twins with hair the same color!” But Yoshiro had wept, holding his great-grandson tightly to his chest, gently stroking his head. When Mumei quickly blurted out, “Great-grandpa, let’s form a Silver-Headed League, just the two of us. Our hair will be our membership card. You’ve done just fine with silver hair for over fifty years, so I’ll be fine, too, for at least another fifty,” Yoshiro’s tears had stopped like a miracle as a silver smile flashed in the corners of his eyes.


하나의 기억이, 혹은 장면이, 그러한 순간들이 손에 꼽을 만큼 적더라도,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면 어둡고 어둡기만 한 삶을 다 가리울 수 있을까. 99가지의 단점이 있어도 한 가지의 장점으로 모두 만회가 된다거나, 혹은 99가지의 싫은 이유가 있어도 단 한 가지의 좋은 이유가 있어서 그 사람이 좋다거나. 혹은, 아들이 반역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쫓아냈는데 그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 그 아버지가 내가 대신 죽을 수 있다면 하며 온 나라가 떠나가라 운다거나. 혹은, 100가지의 죄를 지었는데 그 모든 것이 은혜로 사함을 받는다거나. 난 분명히 이런 세상에서 이런 삶 속에서 그래도 아름다운 날도 있었다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몇 안 되는 순간은 결코 이 모든 악취를 가릴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분명히. 분명. 사는 게 괴로움이라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기타를 치다 이제는 그마저도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기타를 구석에 깊숙이 정리해 넣었는데 어떻게 추억 하나가 아름다웠다고 마음이 시리고 아리고 따뜻해질 수가 있을까. 그건 분명히, 분명 불가능한 일인데.



Wealth, prestige, none of it has the value of a single blade of grass.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