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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일은 쉽니다 Dec 30. 2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했던 이유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를 보고



오랜만에 영화를 봤어, 정말 오랜만에

지난 한 해 동안 보고 싶은 영화가 몇 편 있긴 했지만

결국 보지는 않았거든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들은

왠지 보고 나면 네 생각이 너무 많이 날 거 같아서

그래서 보러 가지 않았던 거 같아

어떻게 감당해내야 할지 몰랐으니까



근데 오랜만에 영화를 봤어

이번에도 또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흘려보냈을 텐데

친구들이랑 팝콘 콜라 잔뜩 시키고선 영화를 봤어

너도 좋아했을 것 같은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며칠 전에 여러모로 별로라는 후기를 읽어서

살짝 걱정했었거든, 정말 별로면 어떡하지

나 때문에 다들 보자고 한 건데 미안해서 어쩌나 했는데

근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더라

참 잘 만들었어, 배우도, 그림도, 스토리도, 결말도

다 좋았어, 따뜻하더라


아, 그곳에선 아직 개봉을 안 했을 테니 안 봤겠구나

참 잘 만들었는데, 너도 보러 가겠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설정은 우리가 봤던 영화랑 같았어

그때 그 영화도 참 잘 만들었다 하고 봤는데

그보다 너랑 같이 봤기에 그랬던 거겠지?

너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재미없어도 너랑 함께면 재밌는

그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갈 기회가 열 번 주어지고

주인공을 포함한 친구들과 함께 그 열 번의 기회를 통해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하는 딸,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결국 다 함께하게 돼

예쁘지?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는

왜 누구는 아프고 누구는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생이 끝나버리는지

이제는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난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 좋거든

그냥, 스크린에서는 따뜻하면 좋잖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30년 전과 30년 후의 수현의 노력이 담겨있는데

중간에 과거를 다녀온 30년 후의 수현의 대사가 마음을 툭 치더라

30년 후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연아의 모습을 확인한 후 과거로 돌아갔을 때

연아는 살아있냐고, 다른데 아픈 데는 없냐는, 괜찮냐는 과거 수현의 물음에

“살았잖아”

살렸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맞아, 그건데

숨 쉬고 있음에 충분한 것

네가 여전히 숨 쉬고 있음에, 그걸로 충분한 것

내가 너와 12시간이 넘는 거리를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래도

아니, 이전보다 깊이 너를 아꼈던 이유는

네가 조금 멀리 있더라도, 그곳에서 숨 쉬고 있다는 걸로 충분했으니까


우리를 갈라놓았던 거리가

결국 네 마음은 희미하게 흐려놓았더라도

나한테는 너를 또렷하게 새기는 과정이었으니까, 그 시간이


네가 무언가를 해줘서 너를 좋아한 게 아니고

네가 누군가가 되어줘서 너를 좋아한 것도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든, 얼마나 멀리 있든

무얼 해주고 무얼 해줄 수 없든, 네가 어떠하든

내가 가장 아끼는 친구였고,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였고



그래서 하루를 시작하며 감사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감사했던 건

오늘도 네가 건강히 있어 주었기에

네가 여전히 숨 쉬고 있었기에, 저 반대편이라 하더라도

그게 감사한 거였어

그걸로 충분한 거였어

나한테는 그랬어, 네가

너는 그런 사람이었어


애초에 멀리 떨어지게 될 것이란 걸 알았지만

막상 그 과정을 시작했을 때

나한테는 그랬어

너는 그런 사람이었어

그래서 나한테는 그 시간이

마음이 더욱 깊어지는 과정이었지

마음이 더 멀어지는 과정은 아니었던 거야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네가

너는 그럼 사람이었으니까



너의 어떠함 때문에

또 너의 무엇 때문에

너를 좋아하고 곁에 두는 게 아니라


너는 너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너무 소중했기 때문에

그래서 옆에 있을 수 없어도 곁에 두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그 시간이 나한테는 마음의 깊이가 깊어지고

그 깊이가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 확인할 기회가 되었던 거야



그래서 버틴 걸지도 몰라

그냥 건강히 있어 주기만을 바랐으니까

옆에 없어도, 볼 수 없어도,

맛있는 걸 먹으러 갈 수도 없고 재밌는 데를 놀러 갈 수도 없고

날이 추울 때 손을 잡아줄 수 없고 하루가 고될 때 어깨에 기댈 수 없어도

너는 그곳에서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 소중했으니까

그래, 너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내가

너와 12시간이란 거리를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를



“있잖아 아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면 어떻게 해야 해?”


“행복했던 그때를 생각해

그 사람하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

그 기억만으로 살아져”



너는 그랬어

그 기억만으로도 살아졌어

고마운 사람이니까

옆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여전히 넌 변함없이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서 살아졌어

우리의 깊이가 달랐다는 걸 깨달아버린 후에도



“행복했던 그때를 생각해”


그게

내가 너와 12시간이란 거리를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를


“그 사람하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



우리의 삶이 한 번 더

한 번만 더 겹쳐진다면

이란 생각을 참 많이 했는데


“그 기억만으로 살아져”


한번 더, 우리가 마주할 수 있다면

한 번만 더, 우리가 만날 수 있다면


“그 사람하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



이제는

만나도 괜찮을 거 같아

이제는 마주쳐도

울지 않고, 차분하게

진심으로, 웃으며

인사를 건넬 수 있을 거 같아


그동안 잘 지냈냐고

건강히 잘 있었냐고



그 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직했던 사람


“그 기억만으로 살아져”


내가 너와 12시간이란 거리를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했던 이유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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