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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일은 쉽니다 Jul 06. 2024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는
화해에 대하여

너무나도 미워했던 할머니를 떠나보내며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만일 언니가 지난달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언니랑 오랜만에 대화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할머니를 만나러 끝까지 안 갔을 거예요.

고마워요 언니. 시기에 언니가 내 인생에 와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어요."




장례식장에 자리가 없어서 장례식을 내일부터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소천하신 후 오후에는 병실을 정리하고 저녁에는 밀린 일을 보느라 벌써 하루가 지났네요. 이 와중에 일을 해내는 제 모습을 보면 어찌 되었든 일이 밀리면 안 되니 해내야 하는 상황인가 싶기도 하고, 할 만해서 일을 하는 것인지 싶기도 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하는 것인지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며 남은 일은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감당해 낼 테니 고통도 슬픔도 없는 곳으로 편안히 가시라고 했는데, 진심이 아닌 부분은 없었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참 막막했던 것 같습니다. 더 담대히 했으면 좋겠으련만 그 남은 사람 중 중책을 맡고 있는 제가 솔직히 어떻게 남은 상황을 수습해 나가야 하는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인 어제도, 돌아가신 후인 오늘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런 고통도 슬픔도 없는 곳으로 가시길 바라는 마음이 걸러내고 걸러내면 남는 가장 원액의 마음이겠지요. 할머니의 투병에 나의 원망과 분노가 일조를 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할머니가 이 세상에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딱 한 명 남았는데 희원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맨날 우셨다는 걸 보면, 사랑하던 아버지를 보낸 것도 죽음의 하나의 결이지만 미워하던 할머니를 보낸 것도 또 다른 죽음의 결이라 결국 그 죽음 앞에서 참 많은 것들이 허무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인간은 무엇이 그리 어리석어서 한때 강자가 한때 약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이후 약자가 강자로부터 받은 상처를 회복하기까지 역으로 상처를 입히고, 겨우내 한참의 세월이 흘러서 혹은 병마나 죽음 앞에 서서야 다시 재회를 하게 되는 것일까요. 기차를 타고 유민이와 돌아가며 나누었던 마음 중 인간은 본성이 악해서 태어나서부터 악한 것이 참으로 맞는 말이지만 동시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서 아주 깊숙한 내면에는 사랑과 긍휼 또한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고 했는데, 그 두 가지 본성 사이에서 한평생 줄다리기처럼 도돌이표를 반복하는 것인지 나는 지난 몇 년 할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정과 원망 사이에 줄다리기를 했고 나중에는 더 이상 줄다리기도 아닌 원망으로만 기울어져버린 시소가 되었지요. 시소가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오기도 하고 그랬어야 하는데 내 마음의 돌덩어리가 너무 커서 시소 위에 올라탄 나의 무게가 도저히 땅에서 떨어지질 않았네요. 사랑은 먹이를 주어야만 커가지만 미움은 먹이를 주지 않더라도 일정하게 커가니까요. 참 무서운 일입니다.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안다면 -


단순히 성공과 부귀영화만 부질없음이 아니라 그 많은 분노와 원망 또한 부질없음을 알았어야 하는데... 두 가지 양극단이 모두 부질없음을 알았더라면 굳이 병마와 죽음 앞에서야 이루어지는 화해가 아니라 삶의 순간순간마다 이루어내는 화합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라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슬프기도 합니다. 짐승은 오히려 본능 밖에 없어서 사랑하는 본능 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해요. 마치 유기견이 자기를 버리고 간 주인을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없이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에요. 나는 그렇지 못한 인간이라서 그 자리를 진작에 박차고 나와 기다리는 마음들을 두고 멀리 떠났었더라지요. 이 전에 나에게는 분노와 원망이 부질없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분노와 원망은 나를 지켜주는 단단한 갑옷 같은 존재였었으니까요. 그 갑옷을 입고 이제는 내가 강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침묵을 마음껏 휘둘렀습니다. 언니가 지난달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우리가 부질없음을 논할 때 그 대상은 결국 성공이거나 인생이었는데 그 반대편의 미움과 원망 또한 부질없음을 깨닫게 된 것은 이제야였어요. 저를 마지막으로 한 번 알아보시고는 그다음 날부터 의식을 놓으셨으니 죽음의 문턱 앞에서야 이루어진 재회인 셈이겠죠.  


언니한테 편지를 적다 생각이 나서 할머니가 보내셨던 편지를 하나하나 다시 읽어보니 받은 것이 보낸 것보다 셀 수 없이 많네요. 결국 마지막에 모진 마음은 다 흩어지고 미안함, 아쉬움, 어떠한 애달픔 밖에 남지 않을 것이었는데... 분명 과거의 그 순간들에 나는 너무나도 억울했고 너무나도 힘이 들었고 너무나도 괴로웠고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 괜찮다는 듯 함께 지낼 수가 없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이 수많은 연락에 답장을 할 수도 없었고 시간이 충분했을 때는 더 자주 찾아뵘으로 그 시간을 누릴 수가 없었어요. 그때는 그게 나의 최선이었어요. 그래도 변론을 해보자면 과거의 강자가 그때의 약자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더라면 그때의 약자가 현재의 강자가 되었을 때 받은 만큼 돌려주지 않았을 텐데... 그때 그랬을 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때의 나는 너무 상처를 받았고 그때의 그들은 너무 상처를 줬었거든요. 그 상처를 받아가면서도 먼 미래에 헤어짐을 미리 복기하며 후회하지 말자하고 상처를 사랑으로 다 감싸기에는 나도 어렸잖아요. 그래서 나의 미워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컸을 때 할머니는 매번 답이 없는 제게 혼자 편지를 보내셨고, 이제는 또 제가 보낼 수 없는 편지를 마음에 적었다 지우고, 다시 적었다 지우는 나날들이 시작되겠네요.


결국 돌고 돌아 헤어짐 앞에선 모진 마음은 흩어지고 애달픈 마음만 남을 것인데 인간이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강자도 약자도 없는 관계로, 어차피 이별 앞에서 거르고 걸러 애달픈 마음만 남았을 것인데... 그래도 이만큼 많이 살아왔으니 이만큼 살 날이 적을 것이고 그러면 또 그만큼 쓰고 붙이질 못해 마음으로 지워야 하는 편지도 줄어들겠지요. 그러면 언젠간 아픔도 슬픔도 없는 그 땅에서 우리 이미 다시 만났겠지요.


또 편지할게요.




커버 사진
https://pixabay.com/users/mammela-686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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