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더콜리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났다. 5kg 남짓하던 팔뚝만 하던 아이는 1년 동안 15kg 정도의 중형견으로 성장했다. 당시 포메는 2.5~3kg 정도였는데, 자신보다 몇 배는 큰 보더콜리에게 앙칼지게 짖으며 절대 지려고 하지 않았다.
두 마리는 함께 성장하면서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한 번씩 포메가 보더콜리에게 이유 없는 짜증을 내며 괴롭히고 못살게 굴어도, 보더콜리는 항상 넉살 좋게 받아주었다. 보더콜리가 포메를 받아주지 않던 유일한 순간은 나의 품에 안겨있을 때였다. 내가 소파에 앉아있거나 침대에 누워있으면 한순간도 빠짐없이 내 옆으로 찰싹 달라붙어 왔는데, 그 순간 내가 자신이 아닌 포메에게 관심을 주면 그걸 그렇게 싫어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어느 정도 만족감을 충족하면 이후에는 포메에게도 조금씩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보더콜리와 포메는 두 마리 모두 사교성이 아주 훌륭했다. 어딜 가도 이목을 끓었고 무리에 금방 섞여 들어갔다. 어느 날 집 근처의 반려견 카페에 아이들과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목에 멋진 스카프를 두른 시바견을 만났는데, 그 시바견이 포메를 집착하듯 따라다녔다. 그 정도의 집착이면 견주분께서 주의를 줄법도 한데 그저 자신의 강아지가 해맑게 뛰어노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진만 찍어대기 바빠 보였다. 견주분에게 이야기를 할까 하다, 괜히 싸움만 날 것 같아서 결국 내가 포메를 안아 들기 위해 자리를 이동하려던 순간 시바견이 포메의 뒷다리를 살짝 물었다.
포메의 ‘깽’하는 소리가 카페에 울림과 동시에, 다른 중형견 친구들과 놀고 있던 보더콜리가 바람처럼 달려와 시바견의 몸을 밀어내고 흉흉한 어금니를 들어내며 낮게 으르렁 거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던저서 달려드는 보더콜리를 제지하고 시바견의 견주분에게 아이를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보더콜리는 아직까지도 시바견을 싫어한다. 그날 이후로 계속 쭉. 이는 카페에서 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가급적 두 마리를 함께 산책시키는 게 아닌, 각각 분리해서 산책시켰는데, 우선 체급에서 비롯된 체력에서부터 차이가 발생했고 걸음걸이에 속도부터 포메가 보더콜리를 따라가기에는 조금 벅차보였다. 그래도 간혹 시간관계상 두 마리를 모두 데리고 나가서 산책을 하곤 했었다. 길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강아지들은 낯선 강아지를 마주하면 짖어대는 경우가 많았다. 보더콜리만 혼자 산책시킬 때는 다른 강아지가 짖어대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더니, 포메와 함께 산책만 나가면 어딘가 불안해 보이고 날카롭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유일하게 나만 목격할 수 있었다. 내가 아닌 그가 두 마리를 함께 산책시켜도 보더콜리는 딱히 날카롭거나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가 함께 모두 데리고 산책을 나갔을 때도 예민하거나 날카롭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가 없이 나 혼자 산책을 나갈 때만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었다.
나는, 타고난 기질이 예민한 사람이었다. 휴대폰의 진동소리만 들어도 잠에서 깨어났고, 조금의 빛이라도 들어오면 잠에 잘 들지 못해서 암막커튼이 무조건 필요했다. 거실에서 나오는 티브이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해서, 항상 방문을 꼭 닫아놓고 잠에 들었다. 그런데 강아지를 키우는 지금은 내가 자는 동안 아이들이 언제라도 내 옆자리에 올 수 있게 방문을 항시 열어놓았고 새벽에 강아지들이 뒤척거리거나 집안에서 뛰어다니면 금방 잠에서 깨버렸으니, 아이들과의 생활이 익숙해지는 1~2년 동안 거의 숙면을 취하지 못했었다. 추가적으로 창문을 다 닫아놓아도 시끄럽게 울려대는 서울의 소음이 나를 쇠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매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보더콜리를 보고 있으니 모든 게 나의 잘못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키우는 강아지가 주인의 성향을 닮아간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내가 예민하고 모난 게 많은 사람이라서 나의 아이가 그런 나의 안 좋은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우선 환경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슬슬 남산타워를 구경하는 것도 질려가고 있었다. 우선 그에게 이런 나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조용한 곳으로 이사하고 싶다. 네가 서울에 남고 싶으면 나 혼자 보더콜리만 데리고 나가겠다.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알아보겠다.
당시의 그는 이사 따위를 준비할 만큼 시간이 남는 상황이 아니었다. 해결해야 하는 여러 가지 상황과 일들이 그에게 있었고 그것만으로 벅차하고 있었다.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이기적이게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그렇듯 그는 나를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고 나와 함께 이사 가길 선택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대신해서 조용하고 아이들을 위해 큰 호수를 둘러싼 공원이 있으며 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나를 위해서 서울과 멀지 않은 동네를 탐색해 주었다. 이사할 집도 알아봐 주었다. 답답한 걸 싫어하는 나를 위해 뷰가 트여있고 신호만 건너면 바로 공원이 나오는 곳으로. 근처에 동물병원이 있고, 혼자 카페에 가는 걸 좋아하는 나를 생각해서 아기자기한 카페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며 바다와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그렇게 그가 없는 시간을 짜내서 알아보고 이사한 집은 아주 마음에 쏙 들었다. 지하주차장에 자리가 항시 넉넉했기에 늦은 시간 들어와도 주차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고 바로 앞 상가에 분위기가 좋은 카페가 3개나 있었다. 짧은 신호등을 건너면 나오는 꽤 큰 규모의 호수공원과 도시를 가로지르는 수변공원은 운치 있었다. 차를 운전해서 멀리 나가지 않아도 넓은 공간에서 한적하게 아이들과 산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동네가 정말 조용했다.
그는 언제나 나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신을 희생해 가며 나를 챙겨 주었다. 나는 강아지 2마리만 돌보고 있었다면, 어쩌면 그는 강아지 2마리와 사람 1명을 책임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자기 연민에 빠져 내 불행에 눈이 멀어 그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오랜 시간, 그는 혼자서 많은 짐을 짊어지고 우리를 보살폈다. 그의 몸과 마음이 지치고 너덜거리며 나에게 질식하듯 질려가고 있는 동안 나는 그를 돌아보지 못했다.
이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려보니 우울증과 공황장애약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다니던 병원은 서울에 있으니 혹 서울에 나갈 일이 있으면 병원에 들러서 약을 처방받으려고 하였으나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나는 학교가 아니라면, 서울에 나갈 일이 전혀 없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올까 싶다가도 번거롭고 귀찮게 느껴졌다. 그렇게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약이 남지 않았다.
왕복 세 시간 넘는 거리를 운전해서 병원을 가야 한다는 게 좀 버겁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약이 다 떨어졌고 도저히 서울까지 운전해서 그 먼 거리를 가고 싶지 않았다. 당시 학교는 방학이었기에 학교 가는 길에 잠시 들러서 처방을 받는 것도 어려웠다. 결국 나는 그날 이후로 한동안 병원에 가지 않았다. 약이 없으니 누군가를 만나러 나가는 것도 조금 부담스러워서 아이들과 산책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한동안 집 밖을 아예 나가지 않았다.
먹던 약을 갑자기 끊어버리니,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시고 겨우 잠에 들어도 금방 깨어나기 일쑤였고 겨우 3,4시간 잠들고 일어나면 낮이 되면 어김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그렇게 계속 잠들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나면 어느 날은 갑자기 20시간씩 잠들었다. 침대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눈을 뜨고 휴대폰을 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나의 일에 지장을 주기 시작했다. 그럼 나는 또 최대한 일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더 이상 도저히 일을 미룰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일을 시작했다. 계속 미뤄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 그런 시기에는 아이들과 산책도 나가지 않았다.
평소대로라면 그가 나의 손을 잡아끌어서 나를 양지로 끄집어 올렸을 텐데, 당시의 그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당시의 여러 가지 악재들이 겹쳐서 이를 해결하느라 그 누구보다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고 자신의 삶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들을 살펴볼 때 분명 그 순간은 그가 아닌 내가 그의 손을 잡고 그와 함께 양지로 올라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나는 그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는 그저 쓸모없는, 먼지와도 같은 인간이었다. 그는 나와 아이들의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어준다고 이야기해 주었지만 현실은 언제나 이상과는 다른 법이라서, 당시에 나는 버거운 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내가 가진 문제가 이렇다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개인적인 무기력감이었다면, 그는 불현듯 인생에 들이닥친 폭풍처럼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 깊이의 차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당시의 나는 모든 것을 외면했고 스스로를 다시 부정적인 생각과 끝없는 구렁텅이로 처박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상황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우리가 평생을 책임지겠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한 우리의 강아지들 이였다. 집에만 틀어박혀있는 나를 보는 게 답답했을 거고, 매일 나가던 산책을 갑자기 나가지 않아 버리니 분명 지루하고 힘들었을 텐데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은 단 한 번도 나를 보채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있으면 조용히 옆으로 와서 가만히 누워있었고 일을 하고 있으면 발 밑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렇게 대학원의 개강이 눈앞으로 다가왔고, 학교를 가기 위해서라도 약이 필요해졌다. 다니던 병원으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마침 동네에 멀지 않은 거리에 평이 아주 좋은 병원이 있어서 그곳으로 방문했다. 기존의 병원은 100% 예약 시스템이라서 대기 없이 바로 진료를 볼 수 있었는데 새로 옮긴 병원은 예약 시스템이 없고 병원에 도착해서 순번을 적어놓고 마냥 기다려야 했다.
일단 당장 약이 급하니 우선 이번에만 처방받고, 어차피 학교에 가려면 서울에 나가야 하니 기존의 병원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편안한 선생님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짧은 대화 중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여기가 정신병원 맛집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상담을 받고 나오니 기다리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후 나는 귀찮았던 서울 병원을 뒤로하고 이곳으로 병원을 정착했다.
평온한 삶 속에서 의미 없는 무기력함에 빠져 약에 의존하며 허우적거리고 있던 나의 모습과 풍비박산된 현실을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서의 힘으로 해결하고 올라오고 있는 그의 모습과 비교되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나는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수면제를 먹어도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밤이 늘어났다. 약의 용량을 조금씩 조절해 가면서 종류를 바꾸었는데, 맞는 약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어떤 약은 잠들기 직전에 폭식을 유발해서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먹게 만들었고, 또 어떤 약은 갑자기 정신이 끊어지는 것처럼 잠들었고 다음날 엄청난 두통을 유발했다.
이런 날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어김없이 술을 찾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몸에서 알코올을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하여 와인 한잔만 마셔도 온몸이 벌겋게 올라왔는데, 술을 마시면 쿵쿵 울리는 심장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려서 그 소리를 들으며 어렵게 잠에 들었다.
수면제를 먹고 잠에 들던, 술을 마시고 잠에 들던, 혹은 두 가지를 함께 하던, 다음날 나의 상태는 언제나 늘 최악이었다. 늘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결국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있네'였다. 하루의 시작을 오만상을 찌푸리며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채 그 문을 열었으니 어쩌면 매일매일이 고통스러웠던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침대에서 눈을 뜨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나는 보더콜리를 꼭 끌어안으며 등을 쓰다듬으면 마음은 분명 안락했지만 뇌에서 울리는 고통은 멈추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