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의 흥망성쇠를 하루 만에 경험하기
우리는 광화문에 서있었다. 2004년의 마지막 날. 12월 31일. 커플이라면 새해를 맞이하는 순간 함께 종소리를 들으며 해피 뉴 이어! 하면서 키스하는 낭만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우리 커플은 광화문 새해맞이가 두 번째였다. 그런데 첫 번째와는 상황이 달랐다. 우리는 여행용 가방과 공공칠가방에 물건이 가득했다. 옷은 화이트 패딩으로 맞춰 입었다. 그리고 외치고 있다.
"손난로 사세요!"
그리고 우리의 등판에는 큰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애기야나손난노사죠랴"
지난번 광화문 새해맞이는 정말 추웠다. 여기저기서 폭죽이 터졌다. 그리고 폭죽을 파는 아저씨들이 많았다. 그런데 폭죽을 사는 사람은 많아 보이지 않았다. 새해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나서 둘러보니, 폭죽을 팔던 아저씨들이 집에 가려고 자기 물건에 불을 붙여 재고를 소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웠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사는 사람이 없나 보네. 이 사람들한테 폭죽이 필요하긴 한 건가? 그나저나 너무 춥다...'
2004년에 나는 6월에 해군 병장으로 제대하고 2학기 복학을 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힙합 쇼핑몰에 취업해서 일하고 있었다. 그때 물건을 사입해서 판매하는 직접 판매. 다른 브랜드의 물건을 사이트에 노출해주는 대행 판매를 보게 되었다. 디자인을 전공해서 그런지 몰라도, 쇼핑몰에서 일하기 전까지는 뭔가를 '만들어서 판다'는 개념은 있었지만 '뭔가 사 와서 판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반년 정도 업계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하나의 사업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사람들을 모아서 상품을 알리느 냐도 "가치"라는 것을 무심결에 깨달았던 것 같다.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내 여자 친구가 인턴 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쇼핑몰 사장님도 오케이 하셔서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회사 CC는 회사 안에서 만나서 사귀는데 우리는 밖에서 만나서 회사로 데리고 온 특이한 케이스였다. 연말이 다가오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쇼핑몰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커플은 특별한 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큰돈 만들어서 해외여행을 가는 계획이었다. 대학 전역한 후 모은 돈도 있지만, 투자를 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업 아이템은 보신각종에서 손난로를 파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그날은 춥다. 매우 춥다. 그리고 연인들 가족들, 친구 단위로 새해를 맞이하려고 덜덜 떨면서 서있다. 이때 손난로가 있다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마음을 표시할 수도 있고 실제 기능도 따뜻해지는 것이다. 내 여자 친구도 해보자고 동의했다.
우리는 도매로 손난로를 살 수 있는 곳을 알아보았다.
남대문이나 동대문에 가면 도매로 판매하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가격은 알지 못했다. 지금처럼 도매사이트가 흔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문구류를 판매하는 도매상들이 모여있는 구역을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지우개, 연필, 볼펜, 연습 노트, 장난감, 없는 게 없었다. 손난로 있어요? 없어요. 손난로 있어요? 없어요. 손난로 있어요? 네, 몇 개 드려요?
템포에 살짝 놀랐다. 어떤 게 있는지, 보여주지도 않고 몇 개 살 거냐고 물어보는 엄청난 템포. 그렇다 도매는 이런 것이었다. 물건 뭔지 다 알고 지난주에 몇 개 팔렸으니 이번 주에는 몇 개 갖다 놓을지 이미 사입하는 사장님은 머릿속에 숫자가 다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자 친구가 말했다.
"좀 보여주세요. 어떤 게 있나요?"
도매상 아저씨는 살짝 눈치를 챘다. 이 친구들 장사꾼 아니구먼. 표정이 밝진 않았지만, 우리가 방문한 시간이 바쁜 시간은 아니었던지라 순순히 보여주셨다.
"똑딱이는 700원, 철가루 흔드는 거는 240원"
똑딱이는 액체 중간에 동전 같은 게 있고, 이것을 똑딱 구부리면 뜨거워진다. 철가루는 열심히 흔들면 뜨거워진다. 어릴 때, 한번쯤 써본 물건이라 보자마자 느낌이 왔다. 그런데 지속시간이 궁금해서 물어봤다.
"똑딱이는 2시간 가고 철가루는 8시간까지도 간데요. 똑딱이는 뜨거운 물에 넣으면 다시 쓸 수 있다고 하더라고. (자기는 안 써본 느낌)"
당연히 철가루를 사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가격도 싼 데다 보신각종 치는 날 사람들은 밤을 새워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다짐하는 음주 의식을 거행할 텐데 오래가야지. 게다가 2천 원에 팔면 1760원 남고, 1천 원에 팔아도 760원 남는다. 철가루 손난로가 답이다. 오케이 상품은 선정되었다.
2004년은 ‘시크릿가든’ 신우철 PD와 김은숙 작가의 첫 작품인 ‘파리의 연인’이라는 드라마가 폭풍 닭살 트렌드를 일으켰다.
"애기야~ 가자!"
"애기야~ 하드 사줄게 놀자"
"내 안에 너 있다”
우리의 메인 타깃은 커플이었다. 그리고 서브 타깃은 젊은 친구들. 나머지 분들은 살 테면 사겠지. 트렌드를 반영한 마케팅 문구를 만들었다.
"애기야~춥다!"
"애기야~손난로 사줄게!"
"내 주머니에 손난로 있다"
"애기야손난로사죠라"
큰 종이에 팍팍 쓰고, 우드락에 붙였다. 그리고 앞 뒤로 보일 수 있도록 줄을 달았다. 알록달록 꾸미고. 얼굴이 팔리지 않도록 흰 마스크, 비니, 그리고 커플룩으로 화이트 패딩을 입었다.
가격은 2000원으로 하기로 했다. 240에 사 와서 두 배로 뻥튀기해도 500원인데 너무한 거 아닌가 잠시 생각했다. 당시 담배 한 갑이 2000 정도. 추워 죽겠는데 2000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학생, 직장인 충분히 사랑하는 애인을 위해 쾌척 가능한 가격이라고 결론지었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8시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광화문역에는 사람이 많았다. 종각역에도 많았다. 날씨는 추웠다. 다들 싫다는 표정이었지만 난 기뻤다. 우산장수는 비 오는 날 미소 짓고 손난로 장수는 추운 날 미소 짓는다. 우리 커플도 손난로를 팍팍 뜯어서 흔들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제법 따뜻했다. 돈 쓰면서 노는 것과 또 다른 느낌의 데이트였다. 돈 벌면서 사랑과 성공의 꿈을 동시에!
일단 경쟁자가 없었다. 제법 돌아다녔는데도 없었다. 아무도 손난로를 팔 생각을 못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마치 금맥을 찾은 느낌이었다. 몇 시간 단위로 장소를 옮기면서 적절한 목을 찾아다녔다. 우리는 기동성이 좋은 행상인이었다. 재고는 여행용 캐리어에 담겨있었고, 당장 팔 물건들은 007 가방에 넣어 열어서 보여주는 식이었다. 고객은 우리의 예측대로 커플들, 친구 단위로 온 젊은이들이 많이 사갔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해서 손난로를 사주는 엄마, 아빠도 있었다. 손주들을 위해 지갑을 여는 은퇴 포스 어르신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따뜻함을 느낄 기대에 찬 얼굴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1.
손님이 갑자기 몰려서 돈을 꺼내놓고 기다리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다들 손에 2천 원씩 쥐고 기다린다. 자기 먼저 안 줬다고 도끼눈을 하는 분도 있었다.
2.
사람들 없을 때 나타나서 3개 살 테니 5천 원에 하자고 달하는 분이 있었다. 보는 눈도 없고 해서 OK 했더니, 하나만 서비스로 더 줘!라고 한방 더 날려주셨다. 당황해서 OK 해버렸다. 그래도 이익이다. 다행이다.
3.
연속으로 만 원짜리를 내는 손님들이 이어졌다. 거슬러줄 돈이 꽤 많았는데 갑자기 없어졌다. 그래서 난 거스름돈을 만들어야 하는 미션을 받고 뛰어다녔다.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천 원짜리를 만들어 왔는데, 아까 그 손님은 없어졌다. 여자 친구가 말하길, 그분이 그냥 5개 사가셨다고... 오예
4.
경찰 두 분이 다가왔다. 헉. 우리 잡혀가는 건가. 불법 노점으로 잡혀가나? 벌금 무나? 하고 있는데... 얼마예요? 2개 주세요. 하더니 사갔다. 다행이다 ㅠ
5.
아까 그 경찰 두 분이 다시 왔다. 헉. 역시 잡혀가는 건가? 아니었다. 뒤에 전경이 4열 종대로 서있었는데 30개 달라고. 헐. 대박. 부하를 사랑하는 경찰관이었다.
6.
폭죽 파는 아저씨가 오시더니, 폭죽 얼마냐, 어디서 구했냐, 잘 팔리냐, 물어보고 감. 내년을 기획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판매한 손난로를 여기저기서 흔들고 있었다. 그것이 홍보효과가 되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상품을 찾았다. 누가 물어보고 우리 커플 쪽을 손으로 가리키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스크 속에 입꼬리는 씩 올라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떤 우리 기존 고객이 손난로를 흔들면서 우리 쪽으로 왔다.
"이거 혹시 다른 걸로 바꿔 주실 수 있나요? 잘 안되는 것 같아요."
만져보니 역시 따뜻하지 않았다. 미온이 있었지만 내 주머니에 있는 뜨끈뜨끈 수준이 아니었다. 바꿔드렸다. 첫 번째 교환이었다. 그런데 얼마 안돼 또 다른 손님이 와서 교환을 요구했다. 뭔가 일부 제품이 불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환해드렸다. 문제는 교환의 템포가 점점 빨라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교환 과정을 사려던 사람이 보게 되니, 구매를 망설이는 고객도 늘어났다. 결국 큰돈이 아니라고 사는 분도 있었지만, 이내 그분들도 교환을 요구했다. 교환한 물건이 계속 쌓였다. 어떤 손님은 환불을 요구했다.
우리 커플은 당황스럽고 화가 났다. 도매 아저씨가 불량물건을 팔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개 뜯어서 테스트를 해보았다. 아무리 흔들어도 뜨거워지지 않았다. 대부분 충분히 뜨거워지지 않았다. 아까 경찰분이 다시 오셨다. 바꿔달라고 하셔서 바꿔드렸다. 어떤 어머님이 오셔서 환불해달라고 했다. 사람들의 실망한 표정을 계속 보게 되었다.
손주에게 손난로를 사주었던 어르신이 다시 오셨다. 이 물건 잘 안된다. 도로 가져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환불해드릴게요.라고 말씀드리면서 돈을 꺼냈다. 그러자 어르신이 크지 않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 없어요. 그런 엉터리 물건 팔지 마세요. 그렇게 양심이 없어서 되겠어요?"
너무나 창피했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죄송스럽고, 분하고, 속상했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여자 친구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가자"
시각은 1시 정도. 이미 차는 끊겼고 우리는 너무나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프집에 들어갔다. 치맥을 먹으면서 정리를 해보았다. 돈은 제법 벌었다. 물건은 1/3 정도 팔았지만 상당량이 불량으로 환불되고 교환되었다. 철가루로 가득 찬 여행가방은 여전히 무거웠다. 동시에 마음도 무거웠다. 물건을 더 많이 팔고 더 많은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었는데... 양심 없는 도매 아저씨가 원망스러웠다. 1월 1일은 노는 날이니 1월 2일에 다시 찾아가서 따지기로 나와 여자 친구는 결심하고 택시 타고 헤어졌다.
새해 첫날부터 늦잠을 잤다. 원망스러운 철가루 가방이 보였다. 열어서 무심코 흔들어 보았다. 와우. 너무 뜨거웠다. 번개같이 '임계점'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렇다. 철가루 손난로는 흔들어서 '임계점'을 넘어야 하는 친구들인데, 너무 추워서 꽁꽁 얼어붙은 것이었다. 그래서 초반에 뜯어서 흔들었던 난로는 잘되고 나중에 갈수록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사업자가 상품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좋은 제품을 판매한 도매상 아저씨만 원망하고 몹시 못난 사업가였다.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파악한 이슈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자 친구는 벌써 마음을 털어낸 상태였다. 자기 아버지가 등산, 낚시를 좋아하니 통째로 선물하면 좋아할 거라고 했다. 그래 몇 년 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친구와는 다음번엔 똑딱이로 해보자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벌써 그 이야기를 한 지 15년이 지났다. 2018년 연말 즈음에 지금은 아내가 된 내 동업자 여자 친구에게 그때를 떠올리며 물어봤다. 손난로 한번 팔아보지 않겠냐고. 아내는 온천에 가고 싶다고 추운 건 싫다고 했다. 그렇다. 나도 추운 건 싫다. 매년 보신각을 울리는 새해맞이 뉴스를 보면 하루 만에 지나간 나의 첫 사업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뭐든지 도전했던 우리 커플의 모습. 그리고 그 어르신의 양심에 대한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