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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Feb 12. 2023

피하는 게 아니라 거르는 중입니다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06

01. 

솔직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저는 사탕 발린듯한 위로를 크게 선호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래서 서점에 나와있는 에세이들 중에 '네 자존감이 제일 중요하다. 그러니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행동 다해라'는 류의 조언들을 보면 '이런 태도로 어떻게 협업을 할 수 있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를 응원해 주는 그 진심이야 잘 이해해 보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처한 현실에 당장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니까 말이죠. 


02. 

혹시 주위 사람들에게 해주기 가장 어려운 조언을 고른다면 어러분은 무엇을 고를 것 같으신가요? 저는 'DO'와 'DON'T'로 물어보는 조언이 가장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 그거 해요 말아요?', '선배 저 이거 그냥 접을까요? 계속해 볼까요?'라는 식의 물음은 경중을 떠나 너무도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03. 

하지만 이미 살짝 기울어진 상태로 들고 오는 문제도 있습니다. 저에게 질문을 던진 당사자의 상황을 들어보면 이미 마음은 'DON'T'하기로 어느 정도 방향을 정한 것 같은데 마지막까지 본인의 발목을 잡는 찝찝함이 있는 것이죠. 바로 '지금 내가 포기하는 게 그저 이 상황이 싫어서 피하는 것처럼 비춰지면 어쩌나' 하는 것입니다. 혹은 '이렇게 한 두 번 계속 피하는 횟수가 늘어나다 보면 그게 익숙해지고 습관처럼 굳어져 나중엔 모든 걸 쉽게 포기하게 되면 어쩌지?' 하는 나름 스스로에 대한 체크도 있죠. 


04. 

누구나 이런 고민을 한 번쯤은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적어도 뭔가를 DON'T 하더라도 이런 고민을 하고서 결정하는 사람들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피한다'는 그 늬앙스 자체에서 벗어나서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조금 유연하게 가져가 보자는 게 포인트입니다. 


05. 

1996년부터 2007년까지 뉴욕 양키스를 이끌며 수많은 우승을 만들어냈던 야구 감독 '조 토레 (Joe Torre)'는 선수 시절 이런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결국 공은 두 가지다. 내가 칠 수 있는 공과 없는 공. 그러니 칠 수 없는 공을 거르는 게 먼저다. 그래야 남은 공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06.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대답이 '투수와의 정면 승부를 왜 피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조 토레가 선수 생활을 하던 시절만 해도 투수가 던지는 높은 직구에 방망이가 멈춰있는 건 이미 기싸움에서 투수의 승리로 보는 경향이 짙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렇게 좋은 기회를 날리다니. 헛스윙을 하더라도 피하지 말았어야지!'라는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단 얘기죠. 


07. 

세상사 대부분이 결과론적인 얘기라 가치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공 하나하나로 보지 말고, 타석 자체로 보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스스로 목표한 바가 있다면 모든 문제에 대해 할 거냐, 말 거냐 피할 거냐 부딪혀볼거냐로만 정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까지 나 자신에게 몇 번을 기회를 줄 거냐'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러다 보면 공보다는 타석에 집중하게 되고, 피한다는 생각보다는 이번 공은 거른다는 생각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고 봅니다. 


08. 

무엇보다 이렇게 스스로 여러 번의 기회를 주는 타석 시스템(?)에 적응하다 보면 내 공이 아닌 것을 자동적으로 걸러내고 어떤 공을 노려야 하는 지가 훨씬 뚜렷해진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DO냐 DON'T냐를 가지고 고민하는 순간에는 매번 새롭고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기분이지만, 적어도 자기 카운트를 가지고 공을 구분하다 보면 '아 이제 더 이상은 피하면 안 된다. 지금은 승부를 봐야 한다'는 타이밍 상의 노련함도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09. 

그래서 저는 '노림수'를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거름수'를 익히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본인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걸 말하라고 하면 머릿속이 우왕좌왕 할 때가 많지만, 싫은 거부터 하나씩 지워보자라고 하면 그래도 마지막엔 정을 붙일 수 있는 것들이 남아있게 되거든요. 그러니 결국 내가 노리는 그 기회도 내가 거른 기회들 속에서 더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10. 

혹시 주위의 누군가가 DO와 DON'T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면 '다 필요 없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말을 전하기에 앞서, '끝까지 버텨. 버티는 놈이 이기는 거야'라는 대답을 하기에 앞서 이 '거르는 방법'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 주는 건 어떨까 싶네요. 그거 아시죠? 결국 내 타석에서 출루에 성공한다면 스트라이크를 몇 개 먹었든, 파울로 몇 개를 끊어냈든 이전의 카운트는 모두 무의미해진다는 사실을요. 그러니 가장 중요한 사실은 피했냐, 안 피했냐가 아니라 출루를 했느냐 못했느냐라는 걸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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