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16
01.
지난주 유퀴즈에 출연한 류승범 배우의 인터뷰가 화제입니다. 스스로도 예능 출연이 15년 만이라고 했으니 그동안 업데이트된 그의 인생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기다려왔고, 또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던 거겠죠. (물론 저도 그랬고요.)
02.
그중에서도 저는 류승범 배우가 화가로 활동 중인 아내와의 대화 에피소드를 들려준 부분이 참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아내에게 ‘베로(아내 이름) 너는 왜 그림을 그려?’라고 하니 아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그를 한 번 보고 씩 웃더니 또 그림을 그렸다고 해요. 그러다가 딱 붓을 놓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다 그림을 그려. 자기표현을 그림으로 하는 거야. 근데 너는 멈췄고 나는 멈추지 않았을 뿐이야."
류승범 배우는 이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며칠간 그 공명이 떠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덕분에 본인은 자기 아내를 사랑이자 스승이라고 생각한다고까지 말했죠.
03.
생각해 보니 저도 비슷한 경험이 한 번 있었습니다. 제 조카가 6살 때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느 날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스티커 세트를 가져와 저한테 자랑하더라고요.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삼촌도 어릴 때 미키마우스 좋아했어'라고 말했더니 갑자기 눈이 동그래져서 저를 쳐다보며 묻더군요.
"그럼 지금은 안 좋아해?"
04.
아마도 그때까지 조카는 뭔가를 좋아했다가 흥미를 잃어본 경험이 없었나 봅니다. 그러니 그 짧은 순간에도 '아니 왜 지금 좋은 게 나중에 안 좋아지지?'라는 물음을 자연스레 가졌을지도 모르죠. 경험의 분절(分節)이자 흥미의 단절(斷絕)을 수도 없이 겪는 어른의 세계를 설명하기에 매우 난처했던 기억이 납니다.
05.
저는 '꾸준함'이라는 가치를 정말 높게 삽니다. 그래서 이상적으로는 '꾸준히 잘하는 것'을 추구하지만, 설사 그럴 수 없다면 '잘하려는 욕심은 잠시 미뤄두고 그냥 꾸준히라도 하자'를 목표로 설정합니다. 그러다 보면 적어도 경험이 끊기거나 흥미가 사라지는 그 이별의 아픔을 조금씩 뒤로 미룰 수 있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정말 이제는 한계인가 보다'라고 생각이 들 때쯤 또 거짓말처럼 조금씩 성장하는 느낌을 받으며 그 게임을 계속 유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이만큼 고생했으니 그래도 한 계단 올려주마'라며 제 목덜미를 잡아 끌어당겨주는 경험이랄까요.
06.
그래서 저는 어떤 일을 잘하고 싶다면 오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공략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쉽게 지루해하지 않는 법, 빨리 체념하지 않는 법과는 조금 뉘앙스가 다르다고 보는데요, 정확히는 '내가 가장 약한 부위에 데미지가 오지 않도록 스스로를 적당히 속일 줄 아는 재주'라고 정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어떤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포기하게 되는지 생각해 보고, 되도록 나 자신이 그 환경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거죠.
07.
저는 운동하는 것과 글 쓰는 것 두 가지를 참 좋아합니다. 운동이야 집에 편하게 앉아있다가도 갑자기 몸을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비교적 능동적인 꾸준함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지만, 이 글 쓰는 것은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는 정말 꾸준히 이어가는 게 참 어려운 분야더라고요. 가장 비극적인(?) 건, 그나마 머릿속으로 좀 떠올려놓은 글감을 한 시라도 빨리 글로 풀어내지 않으면 하루 이틀만 지나도 공기 중에 홀연히 흩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흡사 누군가가 '너 이 소재랑 영감이 필요 없다는 거야? 그럼 가져가서 다른 사람 준다?'하고서 부스러기도 남기지 않고 거둬가는 느낌이죠.
08.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글 쓰는 행위 자체를 멈추지 않기 위해서 꽤 다양한 노력들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제가 좋아하는 시간대에, 좋아하는 무엇인가를 하면서 그 과정 속에 슬쩍 글쓰기를 끼워 넣는 방법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주말 저녁 중 하루는 좋아하는 맥주나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면서 미뤄뒀던 넷플릭스 다큐나 예능 프로그램 하이라이트를 보는 걸 좋아하는데요, 최근엔 '내가 오늘 저 중에서 무조건 글감 하나 건져낸다'라는 생각으로 보곤 하거든요. 여유로운 일상을 너무 타이트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으시겠지만, 의외로 그런 작은 목표가 생기다 보니 그 콘텐츠들을 더 흥미롭고 꼼꼼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콘텐츠를 다 보고 나면 그 즉시 뭔가를 써서 감흥을 이어가는 게 꽤 재밌기도 하더라고요. 덕분에 글 쓰는 행위도 꽤 꾸준히 유지할 수 있게 되었죠.
09.
다시금 류승범 배우의 아내분이 한 말을 곱씹어 보자면 이런 해석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너는 멈췄지만 나는 멈추지 않는 방법을 고민했을 뿐이야'라고 말이죠. 너무도 뻔한 이치지만, 제자리에 멈춰있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라도 동력이 필요합니다. 힘을 가하지 않고는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더불어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상태를 유지하는 데는 비교적 적은 힘이 들지만 완전히 멈춰 선 다음에 다시 움직이기 위해서는 꽤 큰 힘이 필요한 법이죠. 그러니 뭐가 됐든 일단 멈추지 않고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적정한 이득을 얻는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10.
혹시 여러분은 '죽기 전에 이거 하나는 꼭 해보고 싶다'하는 게 있으신가요? 그럼 오늘은 그 질문을 바꿔서 '(죽을 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멈추지 않고 꽤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은 활동은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는 건 어떨까요?
힘은 좀 들지만 지금 멈추기엔 퍽 아까운 것들, 나중에 가서 다시 시작하려면 엄두가 잘 나지 않을 만한 것들을 골라서 내 나름의 동력을 부여해 보는 거죠. 저는 그런 노력이 결국 우리를 성장하게 만들고 또 새로운 기회와 조우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오랜 꾸준함을 우리는 '내공'이라 부르고 있는 건 아닐까도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