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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May 11. 2023

'일'이 아닌 것조차 '일'로 들고 있지는 말자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15

01. 

예전에 한 모임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양에선 '일'을 표현하는 단어가 꽤 다양하고 세분화되어 있는데 동양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영어권만 해도 job / work / task / labor / duty / employment까지 일의 특성과 고용 여부, 책임 소재 등을 기준으로 꽤 다양한 단어들이 일을 지칭하고 있거든요.  

반대로 동양은 '업(業)'이라는 단어 앞에 다양한 글자를 덧붙여서 일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직업을 시작으로 현업 / 과업 / 잔업 / 분업 / 협업 등 떠오르는 것만 나열해도 상당하니 말이죠.  


02. 

언어가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일을 대하는 단어의 차이 역시도 일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의 차이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게 제 개인적인 견해죠.  저는 우리가 참 많은 것들을 '일'로 받아들이고 규정하고 있다고 봅니다. 즉, 일이 아닌 것조차 일로 인식하는 경우도 많은 데다, 심지어 일의 특성이나 유형을 구분하기도 전에 그냥 뭉뚱그려 '일'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아닐까 싶거든요. 

그래서 저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 중에 하나가 '참 이것도 일이다 일!'인 것 같습니다. 필터를 거치기도 전에 우선 '일 바구니(?)'로 직행시켜버리다니! 이만큼 안타까운 일이 어딨겠냐는 거죠.  


03. 

저는 저에게 너무 많은 일이 몰아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하나씩 구분하고 카테고라이징 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때 제가 쓰는 기준은 아주 심플합니다. 

저는 WORK / TASK / LABOR / JUST DO 이렇게 4가지로 구분하거든요. 아 물론 이게 꼭 사전적 의미를 따라가는 것은 아니니 감안하고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각자에게 필요한 언어는 새로 추가해도 좋고요.  


04. 

우선 work는 제 업무들 중 가장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개념입니다. 이뤄야 할 목표가 있는 꽤 장기적인 과제이기도 하죠. 

좀 더 쉽게 비유하자면 '프로젝트 성격의 목표'나 '제 직무에 가장 직결된 과제'를 뜻합니다. 더 더 명확하게 말해보면 업무 평가 때 '내가 한 일'이라고 쓸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볼륨이 크고 가장 단위가 큰 일들이 해당되는 것이죠.  


05. 

그다음 task는 이 work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세부 업무들을 구분하는 데 활용합니다. 즉 하나의 work 아래로 여러 개의 task가 생길 수 있는 거죠 (하나의 task 아래 또 여러 개의 task가 생길 수도 있고요). 그러니 task의 달성 여부에 따라 work의 성패가 가늠되고, task의 진행 속도를 기준으로 work의 볼륨을 측정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task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이 때문이죠. 결과적으로 task를 잘 관리하고 유연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도 드니까요.  


06. 

사무직 종사자에게 육체적인 노동을 뜻하는 labor가 끼어있는 게 좀 의아하실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 기준에선 '필드에 나가는 일'을 labor라 칭하고 있습니다. 레퍼런스 확인을 위해 특정한 공간을 둘러본다든지,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현장을 둘러본다든지, 하다못해 뭔가를 얻거나 알아보러 가는 외근, 출장 등도 저는 모두 labor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머리를 굴려서 특정한 결과물을 내놓는 작업과 직접 발로 뛰며 현장감을 체험하는 작업을 구분해 놓으니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의 밸런스를 맞추는 데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특히 저는 몸으로 뛰는 건 그래도 자신 있는 편인데 누군가를 만나 오래 커뮤니케이션하는 건 기가 좀 빨리는 편이라 이런 작업들도 labor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07.

그리고 마지막 Just Do는 '일이 아닌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뭐? 일을 위해서 하는 건데 일이 아니라고?'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게는 잠깐 짬을 내서 가볍게 처리할 수 있거나, 큰 에너지가 들지 않거나,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부탁할 수도 있거나 (물론 상황을 봐서요...), 업무 외적인 시간에 해도 억울하지(?) 않을만한 일들은 모두 '일이 아닌 것'이라고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것들까지 '일'로 규정하면서 괜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방지하고, 더불어 '나 오늘 일했다'는 이상한 자긍심을 갖는 것도 멀리할 목적으로 Just Do를 고르는 데도 꽤나 신중한 편입니다.  


08. 

제가 이렇게까지 일을 구분해 보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첫째는 특성에 따라서 뭐가 일이고 뭐가 일이 아닐 수 있는지를 구분해서 '더 중요하고 더 잘하고 싶은 것'에 투자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일이 잘 되는 시간', '일이 잘 되는 장소' 등을 찾기 전에 일의 유형을 구분해서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일들 간의 관계를 고려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과 '누군가의 도움, 혹은 시스템적인 조력이 필요한 것'인지를 가려내고 싶어서입니다.  


09. 

work를 위해서는 task를 잘 관리해야 하고, 이 중에서 무엇이 labor로 규정되고 또 무엇이 shun-labor(?) 한 것이 될 수 있는지도 가려보고, 진짜 일로 받아들일 건지 아니면 그저 just do it 해도 무방한 지까지 살펴보다 보면 솔직히 내 삶 자체도 좀 심플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이게 일을 대하는 저의 작은 마음가짐이 아닐까도 생각합니다. 


10. 

그러니 여러분도 한 번 여러분 만의 '일 카테고라이징'을 해보시면 어떨까 싶네요. 꼭 위에서 언급한 기준을 따르지 않더라도 나는 내 앞에 놓은 일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보면 우리 각자가 지고 있는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 질지도 모르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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